[커버스타]
쿨가이, 사랑의 노예가 되다, <물랑루즈>의 이완 맥그리거
2001-11-14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그에게 이런 눈빛이 있었던가. 에든버러 뒷골목길을 한없이 질주하던 <트레인스포팅>의 냉소적이고 쿨한 마크 랜튼이, 돈가방을 위해 친구를 살해하는 <쉘로우 그레이브>의 여피 알렉스가, 마스카라 흘러내린 검은눈과 타이트한 가죽바지의 ‘치명적 유혹’으로 글렘록 스타를 사랑의 절망 속에 좌초시킨 <벨벳 골드마인>의 커트 와일드가, “무엇이 온다 해도, 나 죽는 날까지 당신만을 사랑하겠소”() 같은 닭살스런 연가(戀歌)를 능청스럽게 부르게 될 거라고, 질투와 갈망에 휩싸여 연인의 가슴에 화대를 던지며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난 맹목적 사랑의 노예가 될 거라고 어디 한번 상상하기나 했던가.

언제나 비주류 아웃사이더였던 이완 맥그리거는 갈망의 대상이었지 주체가 아니었다. 사랑을 조롱했지 사랑에 허우적대지 않았으며 격정의 순간에서도 가장 냉담해질수 있는, 오히려 그가 ‘창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물랑루즈>가 전하는 그의 매력은 다르다. 그의 눈동자가 이렇게 청명한 푸른색이었던가.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녹아들 듯 달콤했던가. 환락의 도시 파리. 사랑을 믿지 않는 여자가 사랑을 믿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다이아몬드만이 여자의 영원한 친구’라고 노래하던 창녀가 ‘다이아몬드를 제외한 모든것을 가진’ 보헤미안 시인의 사랑을 농염한 기술로 농락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바로 이 푸른눈의 주인공 이완 맥그리거이기 때문이다.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사라져버릴지 몰라 압정처럼 시선을 고정시킨 크리스티앙의 순수 속에 붉은 입술의 샤틴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녹이길 원한다.

“세상에! 그는 진짜 가수야!” 시종일관 춤추고 노래하는 뮤지컬영화 <물랑루즈>에서 이완 맥그리거는 직접 노래를 불렀다. <Your Song> 같은 노래의 사용을 흔쾌히 허락했던 엘튼 존의 탄식에 가까운 찬사는 그가 완벽히 크리스티앙을 소화해냈음을 증명해준다. “배우가 되지 않았으면 로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할 만큼 오아시스의 오랜 팬이자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이완 맥그리거는 <벨벳 골드마인>의 열정적인 록음악들도 직접 불렀고,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브라스 밴드 이야기 <브래스트 오프>에서는 연주실력을 뽐냈다.

대니 보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바즈 루어만 그리고 이완 맥그리거가 만드는 애증과 연대는 묘하다. 바즈 루어만의 전작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소녀들의 가슴에 사랑의 독약을 쏟아부었던 디카프리오는 대니 보일과 만난 <비치>로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대니 보일의 <트레인 스포팅>을 찍기 전 <로미오와 줄리엣>의 머큐쇼 역에 오디션을 보았다가 떨어졌던 이완 맥그리거는 <트레인 스포팅>으로 할리우드가 탐낼 스타덤에 올랐고 결국 바즈 루어만의 <물랑루즈>로 그가 함유한 당분을 녹여내 보였다. 헤어질 사람과는 헤어져야 한다. 한때 대니 보일의 페르소나로 불렸던 맥그리거에게 디카프리오를 선택했던 대니 보일의 선택은 결별의 선언과도 같았다. 하지만 늘 역전의 드라마가 그렇듯 버림받은 자가 더욱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셈이다.

스코틀랜드 언덕도시 크리프에서 자라난 이완 맥그리거는 <이완 맥그리거: 스타가 되기까지> 같은 책까지 발간되어 그의 ‘욕지거리를 내뱉고 다니던 빨강머리 문제아’ 시절을 폭로당하기도 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그저 스타워즈 3편 <제다이의 귀환>에서 레아 공주의 비행기 조종사로 출연했던 삼촌의 영향으로 배우를 결심했던 그 순간만을 기억할 뿐이다. 삼촌은 맥그리거가 할리우드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협>의 오비완 케노비 역을 흔쾌히 응한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스타워즈…>의 출연은 고향에서와 달리 “배우를 ABC등급으로 분류하고, 특수효과를 위한 단순 연기만 반복해야 하는”등 할리우드 시스템에 많은 회의를 느끼게 만든 영화였다.

이제 스코틀랜드의 고원을 밟던 그의 발은 에든버러의 뒷골목을 거쳐 칸의 붉은 주단과 할리우드의 넓은 갈림길에 섰다. 하지만 이 청년의 가는 길을 걱정하진 말자. 정신과 근육을 자유자재로 이완시키고 경직시키는 제3의 감성뇌를 가진 그는 다행히도 “<인디펜던스 데이> 같은 영웅주의 영화쪽으로 절대로 기울지 않을” 전정기관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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