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이제야 말문이 터졌습니다”, <달마야 놀자>의 류승수
2001-11-14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이혜정

조용한 절간에서 벌어진 난데없는 ‘369게임’. 숨막히는 긴장 속에 숫자의 행진이 이어지고, 시간이 갈수록 정적 속에 박수만 목탁소리처럼 오고간다. 머리와 육체가 혼미해진 틈을 타 슬쩍 실수를 넘기려던 ‘조폭편’. 그때 게임을 지켜만 보던 한 스님이 외치는 비명 같은 한마디, “그만!!!” 게임의 승패를 가리는 결정적인 단서 제시를 위해 3년간의 긴 묵언수행을 과감히 깨버린 이 스님 ‘명천’은 그날 이후 세상없는 수다쟁이로 돌변한다. ‘왕구라’의 쉬지 않는 ‘구라’에도 모든 대답을 합장으로 대신하던 조용했던 그가, “속세에 있을 때 제 연애 얘기 들어보실랍니까…” 하는 지점에 이르면 관객은 ‘저 사람이 누구야?’ 하는 의문을 품게 되리라.

71년생, 올해 31살의 부산 출신 배우 류승수. 아직 낯선 이름과 얼굴의 그가 충무로를 어슬렁거린 지도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미술관 옆 동물원>의 오프닝 결혼식장면에서 신랑으로, <세이예스>에서 살인마 박중훈에게 한 겨울 목잘려 누워 있는 경찰관으로, 안재욱이 나왔던 <러브러브>부터 시작한 길고 고된 단역생활 끝에 만난 <달마야 놀자>의 ‘명천스님’은 류승수에게 긴 ‘묵언’을 깨게 해준 고마운 역할이었다. “아무도 모를 거예요. 배역 결정되고 내가 얼마나 가슴앓일 했는지…. 처음 시나리오 리딩을 하는데 긴장을 되게 많이 했어요. 그런데 웃겨야 되는 대목에서 아무도 웃질 않는 거예요. 정말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게…. 나한테 실망도 많이 했죠.”

본격적인 촬영을 앞두고 은하사 스님 손에 머리를 깎이던 날. “이제 정말 스님이 되는구나. 그리고 배우가 되는구나” 했던 감격스러운 마음을 기억하는 그는 “하느님 죄송합니다”라며 부처님 앞에 절을 올렸고, 새벽 3시에 도량천을 하고, 불경 CD를 사서 염불을 외우고, 기름기 없는 음식으로 공양을 하면서 조금씩 달라져가기 시작했다. 유난히 어려웠다던 대학수학능력시험날 만난 그는, 수험생도 아닐진대 배우들끼리 호텔방에서 밤마다 가진 ‘야간자율학습’의 효험을 특히 강조했다. “김수로씨와는 대학 다닐 때부터 함께 자취도 하고 어울려 다니며 동고동락했던 형이자 친구예요. 워낙 친하다보니 호흡도 잘 맞아요. 수로 형과 ‘야간자율학습’중에 재미있는 대사 참 많이 나왔죠.” 배고픈 조폭들 앞에서 “밥이 참 잘됐네”라며 염장지르던 능청스런 대사도 그때 나온 애드리브. 그러나 코미디에서 감동으로 키를 옮기는 극의 후반부를 위해선 혼자만의 고민도 필요했다. 모두들 잠든 새벽, 홀로 산사에 올라 동틀 때까지 고요한 산사를 걷던 류승수는 주지스님 처소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큰스님이 정말 열반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 확하니 슬픔이 밀려오더라고요.” 결국 명천스님이 주지스님의 열반 뒤 종루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종을 치는 신은 단번에 OK 사인이 떨어졌다.

빡빡 밀었던 머리에 어느덧 보송보송 자라난 새 머리카락처럼, 두려움이 가득했던 그의 마음은 요즘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스카라극장 앞에서 일반인인 줄 알고 “시사회권 신청하세요”라며 호객행위를 하던 한 카드회사 직원이 영화를 보고난 뒤 사인해달라고 했던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추억하는 그는, 일찍 어머니를 보내고 홀로 계신 아버님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가는 효도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고, “유명한 배우보다는 그저 휼륭한 배우가 되는 것이 목표”라는 소박한 꿈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입을 떼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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