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보라 카는 이제는 추억의 수사법이 된 ‘은막(銀幕)의 여배우’란 표현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배우다. 할리우드에 명멸한 무수한 스타 중에서 영국식 기품과 지성미를 갖춘 배우라면 단연 데보라 카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녀가 출연한 50편 가량의 작품 중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영화는 <왕과 나>와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아닐까 싶다. 설혹 이 영화의 상세한 줄거리를 잊어버렸더라도, 페티코트로 한껏 부풀린 드레스를 입고 율 브리너와 춤을 추거나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해변에서 버트 랭커스터와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은 기억의 한 자락에 선명히 새겨져 있을 것이다.
금발에 초록 눈동자가 인상적인 데보라 카의 대표작 4편을 제2회 충무로 국제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다. 영국에서 찍은 <검은 수선화>(1946)와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왕과 나>(1956), <어페어 투 리멤버>(1957)가 이번 상영작 리스트로 선정되었다. 1921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데보라 카는 영국에서 발레학교를 다녔으며 가브리엘 파스칼 감독에 의해 영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1941년 <바바라 소령>으로 시작된 영국에서의 필모그래피는 <코로넬 블림프>(1943), <검은 수선화>로 이어진다. 1946년 이후 펼쳐진 그녀의 할리우드 시대는 <쿼바디스>(1951), <줄리어스 시저>(1953) 같은 역사물에서 <차와 동정>(1956), <어페어 투 리멤버> 등의 멜로드라마, 뮤지컬 <왕과 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출연작들로 채워져 있다.
강인한 아름다움을 갖춘 역할 두루 소화
여러 인생을 경험한다는 것이야말로 영화배우가 누리는 최고의 행복일 것이다. 데보라 카 역시 영화 속에서 다양한 인물로 분했는데 수녀에서 불륜에 빠진 유부녀까지 역할은 달랐지만 일맥상통하는 성격이 있다. 대부분의 출연작에서 데보라 카는 주로 우아하고 지적이며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영국 영화사의 중요한 콤비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 감독의 <검은 수선화>에서 데보라 카는 겉으로 드러나는 강한 의지와 애써 감추고 있는 야망을 소유한 클로다 수녀 역을 맡아 어려운 연기를 해냈다. 이 영화의 주제 자체가 당시로선 파격적인 것이어서, 세속의 기억을 잊고 종교에 귀의한 수녀들의 욕망이라는 문제는 종교적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기서 데보라 카는 대사보다는 미세한 표정의 변화나 몸짓으로 내면의 상태를 전달하고 있다. 히말라야 고지대 원주민들에게 교육과 의료 봉사를 하기 위해 파견되는 수녀들을 이끄는 분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베일에 싸인 클로다 수녀의 입가에 번질 듯 말 듯 한 희미한 미소는 출세의 기쁨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국 정부와 원주민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행정관 딘(데이빗 파라)의 남성적이고 자유분방함을 혐오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억누르던 클로다는 마침내 그곳을 떠나는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와 손을 잡는다. 흔들렸던 시간을 뒤로 한 채 다시 자신의 길을 떠나는 클로다와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손끝에 담아 작별하는 딘의 모습이 애틋한 영화다. <검은 수선화>에서 보일락 말락 감춰졌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설정은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는 구체적인 문제가 된다. 데보라 카의 최고의 히트작인 이 영화에서 사실 그녀가 맡은 캐런이라는 배역의 비중은 생각보다 작다. 남자들의 우정과 의리, 전쟁이야기가 좀 더 앞쪽에 놓이는 이 영화에서 사랑은 인생을 스쳐가는 에피소드일 수 있다. 그러나 상사의 부인을 사랑하는 버트 랭커스터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데보라 카의 짧고도 격정적인 사랑은 분량에 관계없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다. 상처 입은 여자가 진정한 사랑을 찾았을 때 느끼는 희열과 사랑을 완성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체념 사이를 오고가는 데보라 카의 연기가 돋보인다.
고전미부터 세련미까지, 폭넓은 패션 감각
데보라 카는 로마시대 H라인 튜닉 드레스나 영국 근세 빅토리아풍의 잘록한 허리와 부풀린 치마를 강조한 드레스는 물론이고 현대 뉴요커의 도회적인 의상까지 두루 잘 어울리는 여배우였다. 특히 <왕과 나>와 <어페어 투 리멤버>에서 데보라 카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의상들을 멋지게 소화했다. 19세기 중반 샴 왕국에 온 영국 귀부인 역으로 나온 <왕과 나>에서 데보라 카는 주로 블루 계열의 드레스를 입어 왕실 여성들의 동양적인 색감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멀고 먼 여로를 통해 동양의 샴 왕국에 도착한 미망인 안나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왕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여성이다. 똑똑하고 당당한 안나는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도 그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현명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데보라 카는 서양 문화를 대표하는 미와 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왕과 나>에서 부정적인 오리엔탈리즘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데보라 카가 안나 역에 적합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939년 작을 리메이크한 멜로드라마 <어페어 투 리멤버>는 1990년대 아네트 베닝 주연으로 다시 한 번 영화화 된 작품이다. 몇 번씩 리메이크 될 만큼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대표하는 영화다. 데보라 카는 여기서 나이트클럽 여가수에서 상류층 부인으로 신분상승을 이루게 된 테리 멕케이 역을 맡았고 그녀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한량 페란테 역에는 케리 그란트가 출연했다. 각자 결혼을 앞두고 승선한 유람선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모든 걸 정리하고 6개월 뒤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102층에서 만나기로 하지만 테리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해후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테리는 물질적 안정을 보장해 줄 남자를 과감히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 있는 여성이다. 이 영화에서 데보라 카는 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며 자립과 재활에 도전하는 씩씩하고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당시로선 첨단의 원피스 수영복 자태를 선보인 데보라 카는 <어페어 투 리멤버>에서는 보다 발랄한 노란색 수영복을 선택했다. 이 영화에서 데보라 카는, 페란테의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입은 살구빛 도는 여성스런 원피스나 디너를 위해 입은 그레이 톤의 주름진 원피스 등 여러 벌의 트렌디한 의상을 갈아입고 나와 패셔너블한 감각을 보여주었다.
데보라 카의 매력은 북유럽의 미를 간직한 잉그리드 버그만,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 도발적이고 발랄한 비비안 리 등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상큼한 아가씨보다는 성숙한 여성미가 돋보이는 역이 어울리는 데보라 카는 고전영화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지닌 배우다. 이는 데보라 카가 함께 작업한 감독들의 이름을 떠올려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프레드 진네만, 빈센트 미넬리, 죠셉 멘키비츠, 머빈 르로이 같은 명감독들이 데보라 카의 우아한 미를 선택하였다. 1969년 은퇴를 선언했다가 80년대 다시 활동을 재개하여 간간히 영화와 TV드라마에 출연한 데보라 카는 파킨슨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2007년 86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6번이나 이름을 올렸지만 안타깝게도 수상하지 못한 그녀에게 1994년 오스카 명예상이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