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소식]
냉철한 비평가, 영화를 그리는 스타일리스트
2008-09-06
글 : 홍성남 (평론가)
‘아시아 영화의 재발견: 작가’로 대표작 상영하는 일본영화의 거장 이치가와 곤
이치가와 곤 감독

원래 <버마의 하프>(1956)는 이미 전쟁 중의 병사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영화감독이면서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영화 감독인 다사카 도모타카가 연출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병을 앓게 되자 이치가와 곤이 감독 자리를 물려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별로 관심도 없는 프로젝트에 대신 자리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영화의 원작이 되는 책을 읽고 나서 이것을 스크린으로 옮겨내는 것이 자기가 할 일종의 사명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말로 하면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을 완수한 그는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된다. 이치가와의 영화 경력에서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할 최고작이 아니라) 분수령에 해당하는 작품이 <버마의 하프>이다. 이치가와의 영화로는 처음으로 <키네마 순보> 베스트 텐 리스트(5위)에 오른 이 영화로 이걸 만든 감독은 일본의 영화비평가들로부터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으로 <버마의 하프>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산 지오르지오상을 수상했고, 그럼으로써 수상 소식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영화가 영화제에 출품되었는지조차 몰랐던 그 영화의 감독을 국제 무대에 입성케 했다.

물론 <버마의 하프> 이전에 만든 이치가와의 영화들 가운데 눈여겨보아야 할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이 영화 이후로 이치가와는 비평의 영역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그리고 제작자들로부터는 보다 많은 창작의 여지를 갖게 되었다). 이후로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축조한 그는 일반적으로 일본영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와 함께 꼭 언급할 것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에도 여전히 이치가와에 대해서는 모종의 ‘의심’들이 존재해 왔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통일된 비전을 찾아볼 수 없도록 잡다한 요소들로 자신의 영화 세계를 구축한 기회주의자 혹은 (보다 좋게 이야기한다면) 절충주의자라는 의심일 것이다. 이는 이치가와도 자리를 같이 한 1963년에 열린 심포지엄에서 영화평론가 이와사키 아키라가 한 이야기에서 잘 요약이 된다. 그는 자신을 너무 믿는 나머지 어떤 유형의 영화에도 열정적으로 손대는 이치가와의 면모에 대해 이렇게 충고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예를 들어보죠. 오즈의 두부 식당에서는 오모지 두부와 돈까스만을 팔지 두부, 돈까스, 비프스테이크, 튀김을 다 팔진 않습니다. 따라서 감독님도 자신의 주제를 고르거나 그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유키노조의 복수>(1963)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패할 것입니다.”

사실 이치가와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그것을 관통하는 어떤 일관된 흐름이나 동력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우선 그는 시대극, 스릴러, 코미디,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에 속하는 영화들을 만들면서 그 안에서 다양한 문제와 관심사들을 다루었다. 이치가와 자신은 자기가 펼쳐놓은 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들을 밝고 유쾌한 부류의 것(이치가와의 다른 표현으로 하면 “나의 디즈니적인 측면”)과 그렇지 않은 부류의 것으로 대별한 적이 있다. 이 구분법에 따르면, <남동생>(1960)이나 <검은 10인의 여자>(1961) 같은 영화가 전자의 범주에 속할 것이고 후자의 범주에는 <버마의 하프>와 <불꽃>(1958) 같은 영화가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이치가와 자신이 세운 이러한 식의 분류는,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한대로, 타당성이 있어 보이다가도 보다 그의 영화들을 보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금방 무너지기에 아주 정확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치가와의 많은 영화들에서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서로 섞여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치가와의 영화들은 종종 블랙코미디의 영역에 다가가는 것이다.

이치가와 영화의 이런 경향은 아마도 기본적으로는 인간을 바라보는 냉정한 시각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사람들이 흔히 갖는 오해와는 달리 이치가와의 천성은 감미로움의 자취가 없이 건조한 것이라고 지적한 이는 유명한 일본의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였다(그는 이치가와가 문인으로서 좋아했던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영화 <불꽃>은 미시마의 <금각사>를 영화로 재해석해낸 것이었다). 그는 과거 일본 영화에 깊이 스며들었던 감상성을 회피하는 데 이치가와는 그 누구보다 재능이 있다고 썼다. 그리고는 “진정으로 일본적인 피상성의 표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치가와의 작품들이 감상에 빠져든다고 비난받는 것은 독특하게 일본적인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제 이치가와는 비교의 대상이 될 만한 서구의 영화감독 하나를 더 불러낼 수 있는데, 그는 바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일원으로서 먼저 유명한 클로드 샤브롤이다. 이치가와와 샤브롤은 영화 만들기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면에서도 닮은 데가 있지만(이치가와로 말하자면, 그는 50여년의 작품 활동 기간 70편이 넘는 장편영화를 만들어냈다), 거리를 두고서 침착하게 분석하는 듯한 태도로 인물들을 지켜보는 곤충학자의 시선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불꽃>이나 <열쇠>(1959) 같은 영화들은 인물들을 실험실 속의 곤충을 관찰하듯 냉철하게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치가와의 시선을 어렵지 않게 감지해내게 하는 작품들이다. 한편으로 <불꽃> 같은 영화를 변화해 가는 일본 사회를 보며 갈등하고 반항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본다면 이치가와는 영화 속 인물들로 당대 일본 사회의 내면 상태를 비춰내려 했다는 이야기도 가능하다. 실제로 일본의 전통과 제도, 순응주의의 문제를 영화 속에 끌고 들어온 그에 대해서는 당대 사회의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지녔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곤충학자라든가 혹은 사회비평가라고 하는 면모가 이치가와의 가장 압도적인 측면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제 우리는 그의 가장 특출한 면모, 즉 자신의 시선을 어떻게 프레임 안에 가둬놓을까에 대해 특히 고민했고 거기에서 큰 성공을 거둔 스타일리스트 혹은 유미주의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화가가 될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어서도 자신을 (영화의) 화가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인물로 서슴지 않고 월트 디즈니를 드는 그가 애니메이션에서 경력을 시작한 것은 그 분야가 미술과 영화를 결합할 가능성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은 종종 그에 대한 비난이나 조롱의 목소리를 담아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불렀지만 이치가와 자신은 그런 명칭을 오히려 달갑게 받아들였다. 그런 그가 구도나 빛을 뛰어나게 활용해 만들어낸 영화의 이미지들은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이치가와를 일컬어 그의 조감독을 지냈던 마스무라 야스조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이미지만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영화감독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 이치가와의 영화적 유미주의는 그의 영화에 만연한 니힐리즘을 상쇄하는 중요한 원칙이기도 했다.

이치가와는 스스로도 이야기하듯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진 이가 바로 영화감독으로서의 ‘나’로 간주한 사람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인물이었다. 그가 완벽함을 추구하느라 비용과 일정을 초과해 제작자들의 원성을 사곤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파계>(1962)를 만들 때 그는 진짜로 눈 내리는 장면을 찍으려고 안 그래도 돈이 많이 드는 산 속 마을에서 수주일을 기다렸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치가와의 완벽주의는 자신의 작품에 완전한 통제를 가하겠다는 바람과도 연결된 것이었다. 마치 앨프리드 히치콕처럼 이치가와 역시 촬영 전 공들여서 콘티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촬영 중에는 이미 계획된 것에서 한 가지 요소라도 바꾸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또한 촬영현장에서의 그는 카메라 앵글, 조명, 세트 디자인, 배우 연기 등 모든 것에 자신의 손길을 주느라 바삐 뛰어다녔다. 그래서 이치가와는 촬영현장의 모든 곳에 있는 감독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건 모두 “감수성과 테크닉은 그 자체로 예술이고 그 자체로 사유의 형식”이라고 하는 이치가와의 기본적인 믿음으로부터 파생된 행위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치가와는 이런 신념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정열을 불살라낸 ‘영화적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뜨거운 영화적 신념과 정열의 고결한 산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