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김혜수] 어디에도 없는 여자, 슬픔을 감춘 여자
2008-09-19
글 : 주성철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모던보이>의 난실, 김혜수

김혜수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었다. 영화의 상황을 두고 해명(박해일)은 왜 그랬을까, 혹은 나(난실)는 왜 그러지 못했나, 탄식하며 영화의 기분에 한껏 취해 있었다. 분명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영화마다 맡은 캐릭터의 느낌에 충실하고, 인터뷰에서 성심성의껏 그날의 기분을 떠올리는 것은 배우로서 당연한 자세일지 모르겠지만 왠지 이번 영화에 대한 느낌은 달라 보였다. “영화 한편 끝날 때마다 그 영화는 완전히 잊어버린다”고 말하는 그가 좀체 난실로부터 빠져나오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맡은 배역과 너무 깊은 사랑에 빠져버려 도무지 미련을 떨칠 수 없다고나 할까. 그래서 김혜수는 인터뷰 내내 <모던보이>를 ‘우리 영화’라고 말했다. 그가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를 그렇게 지칭했던 경우는 무척 드물었던 것 같다. 아니면 아예 없었거나. <모던보이>가 보여주는 시대의 슬픔, 멜로의 우수를 떠올리며 결국 인터뷰 도중 눈물을 보였다. “우리 영화만 생각하면 계속 눈물이 나요. 해명이나 난실이나 지금도 계속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고 얘기하는 거 같아요. 난 그게 너무 슬퍼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사람들, 자신의 욕망을 어쩔 수 없이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요.”

김혜수가 <모던보이>를 위해 참조했던 것은 극영화들이라기보다 그 시대의 여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들은 과감했고, 자신의 행동 앞에 당당했다. 단순히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이라고 말하기에는 평범하지 않은 재능과 열정을 안고 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재능과 열정은 시대의 혼탁한 공기 아래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 채 립싱크를 하는 다른 가수의 노래를 대신 부르기도 하고, 사랑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처지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 수 없는 난실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해명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무대에서 매혹적인 자태로 노래를 부르는 난실은 누구의 눈에나 띄는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살아가야 하는 ‘어디에도 없는 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난실은 해명처럼 독립운동이든 친일이든 아무 상관없이 낭만만 좇으며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을 거예요”라는 말처럼 난실은 깊은 슬픔을 평생 가슴에 안은 채 살아간 사람이다.

그래서 난실이 해명을 바라보는 느낌은 늘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하는 애틋한 마음이다. 늘 해명을 만나고 기분 좋은 연애를 즐기지만 매번 마지막이라는 기분으로 그를 만난다. 그것은 마음대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시대의 무게 앞에 난실에게 주어진 운명이기도 하다. “분명 그 기분을 이해하지만 이번처럼 내 사적인 감정이 개입된 경우는 드물어요. 난실도 해명도 너무 가엽고 슬퍼서 계속 인물들한테 말을 걸고 싶은 거죠.” 그런 점에서 그가 떠올린 영화는 <색, 계>다. <모던보이>가 한창 촬영 중일 때 개봉한 <색, 계>는 ‘항일운동 시대를 살아간 여성의 비극적 운명’이라는 점에서 큰 감동을 줬다. “시대나 이데올로기의 무게 속에서도 열정에 순수하고 과감한 사람들의 모습이 좋았어요. <북회귀선>(원제는 ‘Henry & June’)처럼 끈끈한 매혹을 풍기기도 했고, 하여간 <모던보이>는 <색, 계>를 보기 전에 시작한 영화지만 암울한 시대 속에서 퇴폐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집요한 낭만이 있었어요. 당시 기록을 보면 전시 상황이지만 전쟁 사망자 못지않게 사랑 같은 이유로 자살한 사람들의 수도 많았대요. 그 느낌을 이제 알 것 같아요.”

정지우는 <해피엔드> <사랑니>를 보면서 김혜수가 꼭 한번 함께 작업하고 싶은 감독이었다. 제작 소식을 듣고는 1930년대를 정지우만의 디테일로 풀어낸다면 과연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출연이 결정되고서는 이내 그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제 제가 경력도 그렇고 일취월장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다만 1%라도 더 나아갈 여지가 있다면 아무 생각없이 맡기고 싶어요. <모던보이>가 그랬죠. 매 감정이 고통스러웠지만 괴롭지 않았고, 그렇다고 즐겼다고 할 순 없지만 늘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이만한 열병을 앓은 영화도 없을 거예요.” 그렇게 김혜수는 아직도 난실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아마도 그 꿈이 영원하길 바라면서.

스타일리스트 윤상미(인트랜드)·헤어 득예(라륀느)·메이크업 고우리(라떼뜨)·의상협찬 템퍼리, DVF, 김연주, labliss, 마놀로 블라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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