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화다’라는 동어반복의 제목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는 부정문으로, 영화는 ‘영화가 아닌 그 무엇’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감별을 요하는 ‘그 무엇’은 ‘현실’이다 (같은 용법: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하지 말자.’). 둘째는 법어(法語)로, 부정을 통해 재규정되는 깨달음을 뜻한다. 이때 술어는 주어와 같은 것을 지시하지 않으며, 주어가 자기부정을 거쳐 도달하게 되는 최종적 산물이다(같은 용법: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영화는 영화다>는 ‘영화’와 그 대립물인 ‘현실’을 대립·충돌시키며, 이를 통해 영화가 무엇이고 현실이 무엇인지 깨달음을 도출하는 영화이다.
1. 영화와 현실을 충돌시키는 극한의 상상실험
<영화는 영화다>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리얼’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리얼리티를 표방하며, 현실사회에 대한 묘사와 발언을 쏟아내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리얼’은 개념의 차원으로 존재하며, ‘영화’와 대구를 이루면서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즉 이 영화는 ‘리얼’을 상연하는 영화가 아니라, ‘리얼’을 사고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영화다>를 보고 <비열한 거리>를 떠올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주성철, <씨네21> 온라인 100자평). 그도 그럴 것이 첫째, 조폭의 현실이 영화 만들기 속에 녹아든다는 설정이나 둘째, 죽여야 할 자를 죽이지 않은 주인공이 배신의 칼침을 맞는 줄거리, 셋째, 영화판의 실제 스캔들이 소재로 쓰이고 문자그대로의 ‘진흙탕 싸움’이 나오는 ‘리얼’액션영화를 표방한다는 점 등이 유사하긴 하다. 그러나 두 영화의 차이점은 명확하다. <비열한 거리>의 사건과 인물은 (영화 속 현실이긴 하지만) 실제 세계에 속한다. <비열한 거리>에서 영화와 조폭은 ‘영화판이든 어디든 조폭처럼 비열하다’는 명제를 향해 몸을 섞는다. 여기서 방점은 조폭으로 표상되는 ‘비열한 현실’에 있다. 따라서 <비열한 거리>에서 ‘영화’와 ‘리얼’은 주어진 것일 뿐 더이상 재고되지 않는다. 반면 <영화는 영화다>는 비열한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인물이나 사건들도 실제 세계에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은 이름부터 강패(깡패)와 수타(스타)로, 하나의 개념이자 상징이며 작가의 ‘상상실험’을 위해 주조된 전형적인 캐릭터들이다. 강패와 수타가 사는 세계는 <영화는 영화다>의 각본과 제작을 맡고 장훈 감독을 입봉시킨 김기덕 감독의 (면회실에서 두는) 바둑판이다(수타는 흰 돌, 강패는 검은 돌, 옷차림도 ‘블랙&화이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김기덕 감독의 <시간>(장훈 감독이 조연출을 맡았다)이나 김기덕 감독이 시놉시스를 주고 제작한 영화 <아름답다>를 떠올려보자. 두 영화 모두 변화-불변, 사랑-강간의 대립개념을 충돌시켜 극한으로 치닫는 상상실험을 펼쳐 보이며, 이를 통해 그 경계를 반문하는 구조다. <영화는 영화다> 역시 ‘영화-현실’의 대립개념을 충돌시키며 그 경계를 질문하는 영화이며, 굳이 비교를 하자면 <비열한 거리>보다는 <극장전>에 가깝다.
2. 태극처럼 맞물리며 회전하는 두 사람
여기 두명의 사내가 있다. 수타는 스타로서의 자의식이 팽배한 자로, “캐릭터 변신이 안 되고, 자기가 만든 캐릭터 속에 산다”. 그는 영화를 현실세계로 끌고나와 산다. 그의 생활세계는 영화로 잠식되어 있다. 그는 대사를 자기 말인 양 뇌까리고, 연애도 톱스타로서의 강박 때문에 ‘대면없는 섹스’만 가능하다.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주먹깨나 썼을 것이라며 거만을 떠는 그는 상대배우나 팬들에게 감정을 그대로 분출해버린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상대화히지 못하고 연기와 일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즉자적이고 유아적이며 나르시시즘적인 인물이다(그는 팔뚝이랑 차에 자기 이름을 새겨넣고, 거울보기를 좋아하며, 초콜릿과 뻥튀기를 갖고 다니면서 먹는 등 구강기적 모습을 보여준다). 즉 수타는 ‘영화->현실’이다. 강패는 한때 배우를 꿈꾸었고 홀로 극장을 찾는 영화광이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리얼’ 액션의 세계에 산다. 그는 고독하고 고단한 성인 남자의 아우라를 물씬 풍긴다. 자기 수하도 믿지 못해 홀로 택시를 타고 “여기저기” 호텔을 전전하며, 속옷과 양말을 빨아 널고 맥주와 수면제를 삼키며 자신이 나왔던 영화 DVD를 보다가 잠든다. 그는 “흉내는 못 내며” 분장도 필요없이 실제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영화로 들어온다. 즉 강패는 ‘현실->영화’이다.
이 둘이 우연히 만난다. 김기덕 감독의 전작들 <빈 집>이나 <숨>에서 그러하듯이, 두 인물은 겉으로 보았을 때 완전히 반대인 역상(逆像)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강렬한 충동과 결핍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거울상이다. 한 사람 앞에 한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고 이들은 강한 이끌림에 의해 연기(緣起)를 맺는다. 격렬한 회전으로 태극을 이루고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며 각자의 모순을 끝까지 밀어붙여, 마침내 서로 다른 도착점에 당도한다. 그 도착점은 한 사람에게는 성숙 혹은 귀환이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파국 혹은 초월이다. 그러나 이는 불평등한 결말이 아니다. 그들 각자의 합당한 몫이요, 길이다. 어느 날 강패가 수타 앞에 홀연히 나타난다. 강패는 “왜 그러고 살아, 짧은 인생, 나중에 자식들한테 창피하지 않겠어?”라는 수타의 말에 강하게 끌린다. 자신의 결여를 가장 잘 함축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가 영화를 찍고자 한 표면적 이유는 진짜로 주먹질을 한다는 거만한 수타와 겨루어보고 싶어서이지만, 내면적 이유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그는 영화를 찍으면서, 또 여배우와 사귀면서(“당신과 있으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다른 인생을 맛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질 수 없는 뭔가를 꿈꾸어본 적 있어? 내가 아닌 다른 삶을 꿈꾸어본 적 있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 그리고 죽은 듯이 살아”라는 대사에 ‘필이 꽂혀’ 현실 속에서 내뱉으며 박 사장을 살려준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 현실의 모습 그대로 영화를 찍던 강패가 현실에서 대사를 읊으며 박 사장을 놓아주는 이 장면이 바로 영화가 현실로 역삼투해 들어간 순간을 보여준다. 즉 그는 ‘현실→영화’에서 ‘현실↔영화’가 되었다. 한편 현실이 영화인 듯 살며, 언제나 카메라를 의식하던 수타(“날 보지 말고 카메라를 봐야지”)는 몰래카메라에 의해 ‘리얼 다큐멘터리’-섹스동영상이 찍히고 깡패들에게 협박을 당하면서, 자신의 삶이 경멸해 마지않던 깡패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자인하는 사태를 겪는다. 또 강패의 부하에게 무릎을 꿇은 채 뺨을 맞으면서, 차츰 현실인식에 눈뜬다. 섹스동영상에 의해 스타가 아닌 비루한 몸뚱이로 대자화되고, 진짜로 맞으니 눈물나게 아프다는 몸의 감각을 통해 현실세계에 대한 환기를 얻은 것이다. 그는 비로소 스타가 아닌 한 남자로 커피숍에서 애인과 대면하는데, 이 장면이 수타가 자신의 현실세계를 잠식했던 영화로부터 빠져나오는 대목이다. 즉 수타는 ‘영화→현실’에서 ‘영화//현실’이 되었다.
3. ‘리얼’을 끝까지 밀어붙여 ‘실재’(Real)에 도달하기
영화 속 감독은 매우 재미있는 역할이다. 코믹하기도 하지만, 그가 영화와 현실이라는 두 개념의 격돌을 중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주문한다. “좀 리얼하게 못하나?” 상대배우가 리얼하게 하려고 수타를 몇번 치자 수타의 발길질이 작렬한다. 감독은 “리얼하다”며 좋아하다가 진짜임을 알고 “진짜 때리면 어떡해? 이건 영화야”라 말한다. ‘진짜처럼’은 좋지만 ‘진짜’는 곤란한 이중구속(double bind) 상태에 (영화적) ‘리얼’의 핵심이 있다. 강패는 촬영장에서 여배우에게 기습키스를 감행하고 “87신 한번 해봤습니다”라 말한다. 이때도 감독은 중계를 한다. “연기인지, 진짜인지?” 통상 연기가 가짜이면서 진짜인 양 하는 것임에 반해, 그는 진짜이면서 가짜인 양 연기한다. 그가 여배우를 덮치는 장면은 한발 더 나아간다. “강패씨, 진짜로 했어?” 행위의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감정의 섞임은 진짜이다. 강패는 여배우를 사랑하게 되어, 급기야 연기로 물에 빠지는 그녀를 구하려 한다.
강패가 수타를 쫓는 추격신에서 느리다는 지적을 받자, 아예 수타를 앞지른다. 감독 왈 “거리 유지하고, 다시!” (영화적) ‘리얼’이 현실을 바짝 쫓아야 하지만, 영화가 현실을 따라잡거나 앞질러선 안 되며, 항상 간극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결국 강패의 파국 혹은 초월에 대한 복선이 된다. 수타가 영화로부터 현실을 구분해내며, 현실을 향해 걸어나오는 반면, 강패는 영화 속에 자신을 던진다. 두 사람이 전혀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엉겨붙어 싸운 갯벌장면에서, 마지막에 육지로 걸어나온 것은 수타였다. 강패는 갯벌에 눕는다. 여기서 갯벌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이자 현실과 허구의 경계이다. 흡사 크리스테바의 코라(Chora)를 연상시키는 갯벌은 <해안선>에서도 그랬듯, 서사의 공간이자 상징의 공간이다. 마지막 갯벌 장면을 찍은 뒤, 강패는 현실로 ‘영화’를 완결한다. 그 ‘영화’는 다큐멘터리로, 카메라 대신 수타의 눈에 찍힌다. 강패는 백주에 거리에서 박 사장을 불상으로 때려죽인다. 여기엔 한치의 망설임이나 위장도 없다. 이는 영화라는 상징의 외피를 벗어던진 ‘실재’(Real)의 모습이며, 이를 본 수타는 구역질을 한다. ‘영화→현실’에서 ‘영화//현실’로 다소 성숙해진 수타에게 강패는 수타가 열망해왔던 ‘영화 같은 삶’, 혹은 ‘리얼’을 끝까지 밀어붙여 도달하게 되는 ‘궁극의 리얼=실재(Real)’을 눈앞에서 펼치고, 흉기이자 깨달음의 징표인 불상을 건넨다. 현장에서 잡힌 강패는 경찰차 유리를 이마로 깨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이민다. 얇고 투명한 유리조차 허용치 않고, 자신의 ‘쌩얼’을 드러내려는 강패는 스크린을 찢고 나온 ‘실재’(Real)의 무시무시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는 ‘현실→영화’에서 ‘현실↔영화’를 거쳐 ‘현실→영화→현실*’이 된 강패의 얼굴과 상징을 걷어버린 ‘실재’(Real)의 침입으로 겁에 질린 수타의 얼굴을 대비시키며 끝난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자 객석이 나타나고, ‘이것 역시 영화였음’을 보여주며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이는 “영화는 영화다”라는 제목의 부정문으로서의 의미를 재확인시키는 사족이다. 그것이 불필요한 이유는, “영화는 영화다”는 제목이 영화와 현실의 상호침투를 거쳐 결론적으로 도달한 선문답임을 영화를 통해 충분히 설명 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