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0일, 홍대의 한 카페로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사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안치환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흘렀고, 카페의 흰 벽에는 파란 작업복 차림에 스패너를 손에 쥔 노동자들의 영상이 비쳤다. 18년 전 이 영상을 보려면 각목과 파이프를 들고 극장 입구를 지켜야 했으며, 필름을 영사기에 걸기까지 검찰의 눈을 피해 몇번의 교란작전을 펼쳐야 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1990년대 상영 투쟁의 전범이었던 <파업전야>의 DVD 출시 기념상영회는 영화를 제작한 장산곶매 회원들과 <파업전야>를 기억하는 50여명의 사람들이 자리한 가운데 이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한국 최초의 노동 장편영화 <파업전야>는 올해 7월31일 DVD 제작을 마쳤다. 영화가 처음으로 상영(1990년 4월6일)된 지 18년이 지났으며, 그동안 독립영화인을 비롯해 꾸준히 영화계 안팎에서 <파업전야>의 DVD 제작 필요성이 제기된 점을 떠올리면 뒤늦은 출시다. 총제작을 맡은 이용배 감독은 기념상영회에서 “예전부터 생각은 있어왔으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몰랐는데, 2007년 11월 인디스페이스 개관 기념 상영회에서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직원들이 추억의 독립영화를 정부에서 지원하기도 한다며 적극적으로 제안해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밝혔다. 몇몇 영화제를 통해 선별적으로 상영되던 <파업전야>는 2008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다양성 영화 DVD 제작지원’ 작품으로 선정돼 6월부터 본격적인 DVD 제작에 들어갔다. 제작을 맡은 이용배와 프로듀서 김숙은 부가영상의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메고 옛 동료들을 찾아나섰고, 촬영감독 오정옥은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18년 전 영화의 색과 소리를 다듬었다. <파업전야>의 DVD 제작 소식을 들은 스탭들은 스틸사진과 팸플릿을 제공했고, 80년대 노동가요로 유명했던 가수 안치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철의 노동자> 등의 노래를 흔쾌히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 결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해도 될 만한” 깔끔한 버전의 <파업전야>가 탄생했다. 스크래치 때문에 잔뜩 빗금이 그어졌던 화면은 말끔해졌고, 부가영상에는 <파업전야>의 주역이었던 제작진과 배우의 18년 뒤 모습이 담겼다.
영화의 복원을 넘어 시대를 복원했다는 평가
독립영화계는 대선배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파업전야> 상영 당시 사수대로 활동했던 서울독립영화제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파업전야>는 와이드 릴리즈란 개념 자체가 없었던 90년대에 전국 대학을 상영관으로 잡은, 보기 드문 기획형 독립영화였다”고 평가한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전국 60만 관객 동원으로 화제가 되었을 때, <파업전야>를 본 관객은 장산곶매 회원들이 집계한 수치에 따르면 100만명에 이른다. 제작과 배급 문제를 앞장서 고민했다는 점에서 독립영화계에 모범적인 성공 사례를 제시한 것이다. 95학번으로 <파업전야>를 대학 영화동아리 ‘사계’에서 처음으로 봤다는 충무로 영상센터 ‘오!재미동’ 운영팀장 권혁구씨는 “사회과학 세미나도 함께했던 우리 동아리에서 장산곶매의 모든 작품은 교양과 교육 차원에서 필독 영화였다”며 “그 당시 영화동아리 중에 <파업전야>를 한번쯤 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라 말했다. 여전히 어떤 독립영화도 <파업전야>의 관객 동원기록을 경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영화만큼 영화학도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는 작품도 드물다는 점에서 <파업전야>는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영화다.
한편 <파업전야>의 DVD 발매는 시대를 증거하는 자료로서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총제작자 이용배 감독은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80, 9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파업전야>는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파업전야>는 1990년대 당시 관객에게 단순한 영화가 아니었다. 제작진이 실제로 파업 중이던 인천의 한독금속사업장에서 영화를 촬영했으며, “파업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검찰이 직접 나서 필름과 영사기를 압수하고 영화 관계자와 관객을 연행하는 등 <파업전야>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영화와 현실의 거리를 크게 좁히는 계기로 작용했다. “영화를 무기로 한 정치 투쟁을 가능하게”(<씨네21>)했고, “진보세력에 영화라는 매체를 새롭게 발견하는 충격을 안겨줬다”(시나리오작가 심산). 때문에 이번 DVD 발매는 한 영화의 복원을 넘어 그 영화가 상영되던 시대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장산곶매의 회원들은 <파업전야>와 더불어 시대의 정신을 반영했던 노동영화 <오! 꿈의 나라>와 <87에서 89로 전진하는 노동자> <닫힌 교문을 열며>의 DVD 제작도 잠정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그들의 첫 작품으로 <파업전야>를 선정한 건 이 영화의 파급력과 상징성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이전 세대와 지금 세대의 연결고리가 되길
하지만 장산곶매 회원들의 마음이 마냥 가벼운 건 아니다. 이용배 감독은 “이번 DVD 출시는 선배로서 장편 노동영화의 맥이 끊기게 만든 원죄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장산곶매가 해체된 이후 장편 노동영화가 제작되거나 화제를 불러일으킨 경우는 거의 전무했다. 영화 안으로 현실을 끌고 들어가는 영화의 정치적 기능이 퇴색한 것이다. 상업영화 진출과 운동권 영화 제작으로 장산곶매의 미래를 다르게 전망한 회원들은 분열과 탈퇴 등의 이유로 <닫힌 교문을 열며>(1992)를 마지막으로 조직을 해체하고 영화 제작을 중단했다. 이은, 장윤현, 공수창, 최호 등 장산곶매 출신들이 현재 한국 영화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지만 정작 독립영화의 맥을 잇는 지원군이 되지는 못했다고 회원들은 자평한다. 최근 <안녕! 허대짜수짜님>의 주연배우로 출연하며 여전히 노동영화에 매진하고 있는 <파업전야>의 배우 엄경현은 “우리가 90년대에 시도했던 영화적 문제제기를 그 이후 계승·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DVD를 출시해서 뭐 어쩌라고’식의 냉소적인 반응도 충분히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파업전야>의 재조명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장산곶매 회원들의 부가영상 촬영이 올해 6월10일 대규모 촛불집회가 있던 시청 앞 광장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은 2008년 현재 <파업전야>가 시사하는 바를 알 수 있게 한다. “민주화라는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지만 사회적 약자는 여전히 존재한다. 못 가진 자의 상대적 박탈감을 고려하면 지금이 오히려 더 안 좋은 상황 같다.” 장동홍 감독이 밝히는 ‘광장으로 나선 이유’다. 시대가 변하고 ‘민주화’라는 시대정신도 바뀌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이다. “‘88만원 세대’라는 말도 있듯 젊은 세대의 상대적 박탈감도 굉장하다. 이런 문제를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후배들도 많다.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다를지 몰라도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파업전야>는 이전 세대와 지금 세대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권혁구 운영팀장의 말이다. 이 말에 대한 평가는 <파업전야> DVD를 앞으로 보고 느낄 관객에게 달려 있는 것 같다.
장산곶매 회원들이 말하는 <파업전야>의 추억
올해 6월24일부터 25일까지 이틀간 부가영상 촬영을 의논해보자고 장산곶매 회원들과 안면도로 MT를 떠났다. 솔직히 다들 촬영은 핑계고 뒤풀이에 더 열심이었다. (웃음) 못다한 얘기들이 너무 많았거든. 제작 당시 정분났던 얘기도 하고, 정설과 비설이 섞여 있는 부분은 서로의 기억을 맞춰보기도 하고. 거기서 술 한잔씩 한 다음에 다들 애창곡을 불렀다. 이 장면이 너무 좋아서 나는 DVD에 넣자고 했는데, 다들 추하다고 넣지 말라고 하더라. (웃음) 나중에 업그레이드 버전이나 디렉터스 컷을 만들 수 있다면 꼭 넣고 싶은 장면이다.(이용대, <파업전야> 제작자)
<파업전야>의 촬영을 마치고 일본쪽과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를 한국의 인기 여배우로 알고 있더라. 일본의 한 영화잡지에서 1990년 당시 <파업전야>에 대한 기사를 비중있게 다루면서 나를 한국 대표 여배우로 소개했다고 한다. 영화를 찍으며 정말 힘들게 연기했는데, 그런 노력을 해외에서도 알아주니 무척 기분이 좋았다.(최경희, <파업전야>의 여주인공 미자 역)
배우 입장에서는 우리 밥 세끼 먹여준다는 것도 아니었고, 따뜻한 데 재워주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눈에 불을 켜고 <파업전야>는 성공해야 한다고들 했다. 그만큼 독재나 노조문제를 한번쯤 생각해본 연기자들이 많았다. 즉석 분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현장에서 분장사가 따로 없으니 촬영할 차례 되면 그 자리에서 신문지를 태워서 얼굴에 검댕을 묻히곤 했다. (웃음)(엄경환, <파업전야> 배우)
촬영 당시 공장이 파업 중이었는데 따뜻한 물도 없고 냉방에서 자다보니 제작진이고 배우고 모두들 거지 차림이 됐다. 하루는 노조분이 지나가다가 “아니, 우리가 저렇게 지저분해?”라고 하시더라. (웃음) 노조분들은 교대 근무를 서니까 다들 말끔했다. 우리보다는 행복했던 거지. <파업전야>는 그렇게 어렵게 찍은 영화다.(장동홍, <파업전야>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