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은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5월9일 영상자료원 내에 문을 연 한국영화박물관을 위한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며 전시품 기증 캠페인을 벌입니다. 55번째는 김충남이 기증한 <생명> 시나리오와 촬영일정표입니다.
1958년 7월16일 수도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한 이강천 감독의 <생명>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이자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의 1호 작품이다. 이승만 정권의 특혜 속에 1957년 6월 건립된 안양촬영소는 3만3500평의 부지와 동시녹음이 가능한 200평과 400평의 A, B스튜디오를 포함한 건평 1975평 규모에 미국에서 들여온 미첼카메라 3대, 웨스트렉스 녹음시설은 물론 수중촬영이 가능한 ‘풀’ 시설, 필름 현상시스템, 독자적인 발전소까지 갖춘 그야말로 꿈의 영화공장이었다. 이와 더불어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본떠 본격적인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해 스스로 ‘제너럴 프로듀서’를 맡았다. <생명>은 김말봉의 신문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신인 최성진, 문정숙, 장민호, 이민자 등이 출연했다. 반공 휴머니즘 영화의 초기 대표작 <피아골>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이강천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김학성, 이필우 등의 베테랑 스탭이 참여했다. 김학성 촬영감독은 시네마스코프 촬영을 위해 미첼카메라에 비스타라마 렌즈를 장착해 촬영했는데, 당시에는 시네마스코프에 제작사 이름을 붙여 ‘수도스코프’ 혹은 대형 ‘스크린’영화라고 불렀다.
<생명>은 ‘동양최대 규모’ 안양촬영소의 1호 작품이라는 기대를 업고 야심차게 제작되었지만 캐스팅과 녹음기술의 실패라는 평가를 받으며 흥행에 참패했다. 한국 영화기술의 개척자 이명우가 국내 최초로 웨스트렉스 녹음기를 가지고 작업했지만 실패하고 2세대 녹음기사 이경순이 마무리해 한국영화 기술 인력의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안양촬영소는 2호 작품 <낭만열차>(1959)의 연이은 실패로 수십억원의 부채를 떠안아 결국 부도 처리된다. 한국영화의 중흥기라 불리는 1950년대는 ‘1사 1작’이라 불릴 정도로 군소 영화사가 난립했던 시기로 정부의 한국영화 면세조치(1954) 등의 정책적인 지원이 더해져 많은 작품이 제작되었다. 안양촬영소의 부도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영화기업화’는 요원한 꿈이었다. 이 꿈은 이후 ‘신필름’이 이룬다. 1966년 박정희 정권의 지원으로 안양촬영소를 인수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