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에는 차별에 대한 특별한 시선이 들어 있다. 제도화된 차별, 또는 제도화된 폭력에 대한 파스빈더의 비판은 우리가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관습의 허위를 드러낸다. 이런 주제가 절정을 맞은 것은 이른바 ‘독일 멜로드라마’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연이어 나올 때다. 곧 <사계절의 상인>(1972)부터 <중국식 룰렛>(1976)까지 더글러스 서크의 영향 아래 완성된 작품들을 말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는 서크의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1955)을 각색한 것인데, 뜻하지 않게 2주 정도 비는 시간이 생겨 급하게 만든 작품이다. 그런데 이게 예상외로 대표작이 됐다.
2주 만에 완성한 대표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주인공은 모로코 출신 노동자 알리이다.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난 일종의 디아스포라다. 오로지 일만 하고, 퇴근 뒤 아랍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게 그의 생활의 전부다. 이들 아랍인들은 철저하게 고립된 채 산다(지금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비 오는 날, 알리가 친구들과 단골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이곳에“신비한 음악소리가 좋았다”며 어느 독일인 노년 여성이 들어온다. 아무리 낮게 봐도 예순살은 넘어 보이는 그녀는 콜라 한잔을 시키고 다소곳이 앉아 아랍의 음악을 듣는다. 독일 여성으로는 드물게 아랍 음악에 호감을 보이는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는 알리, 그리고는 아랍 젊은이와 독일 노년 여성의 ‘이상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도입부의 이 장면은 우선, 더글러스 서크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순간이다. 형광색에 가까운 불타는 컬러의 옷과 실내장식으로, 바의 내부는 분열적인 분위기를 한눈에 드러낸다. 붉은 색조의 술집은 역시 붉은 계통의 조명으로 장식돼 있고, 여성들은 샛노란색 같은 지나치게 빛나는 색의 옷을 입고 있다.‘파스빈더 군단’의 브리지테 미라가 노년 독일 여성 에미 역을 맡았고, 알리 역의 아랍 남자는 당시 파스빈더의 실제 애인이었던 엘 헤디 밴 살렘이었다. 술집 주인 여성 역은 오스트리아 출신 바바라 발렌틴인데, 록그룹 퀸의 리드싱어인 프레디 머큐리의 한때의 연인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풍만한 육체와 빛나는 금발로 단숨에 관객의 시선을 끈다. 이 세 인물의 관계가 영화의 멜로 부분을 끌고 간다.
영화의 전반부는 외로운 아랍 남자와 역시 그만큼 외로운 독일 노인 사이의 사랑으로 구성돼 있다. 그녀의 남편은 20여년 전 죽었는데, 그도 폴란드 출신 외국인 노동자였다. 나치 당원이었던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미는 폴란드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삶은 피곤한 노동으로 겨우 버틸 정도로 늘 어려웠다. 지금은 자식들도 모두 떠나고, 에미는 건물 청소를 하며 혼자 살고 있다.
“독일인은 주인, 외국인은 노예”
70년대에 독일은 여전히 경제기적을 자랑했고, 우리의 광부와 간호사를 떠올리면 짐작하겠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거 유입했다. 특히 터키 등 아랍권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알리의 표현을 빌리면“독일인이 주인이라면, 외국인은 노예”인 주종관계 속에서 살았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은 바야흐로 외국인들의 노동이 절대 필요한 조건이 됐는데, 이들에 대한 태도는 과거 식민지 주민에 대한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알리는 “아랍인은 개보다 못한 사람들” 취급을 받는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핑크빛 사랑은 이들이 정식결혼을 하고 동거에 들어가면서 무참하게 깨지기 시작한다. 먼저 에미의 자식들은 이 결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어머니의 집을 “돼지우리”라고 모욕한다. 이웃들도 마찬가지다. “더러운 아랍인과 사는 못된 여성”이라며 에미를 비난한다. 건물 청소를 하는 동료들도 에미와는 말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동네 식료품 가게 주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 에미와 알리에겐 물건을 팔지 않는다.
아랍인 알리에 대한 독일인들의 태도는 굳이 여기서 밝히지 않아도 짐작될 것이다. 사람을 벌레 보듯 하는 그들의 시선만 기억하면 될 듯하다. 알리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또 다른 여성이 바로 술집의 바바라이다. 에미를 둘러싼 ‘독일의 제도’에서 벗어나 있는 그녀의 집은 알리에겐 일종의 해방구다. 그곳에는 독일인 가족도, 이웃도, 동료도, 다시 말해 ‘제도’는 없는 것이다.
이 영화가 발표됨으로써 독일에서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 더 나아가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나 외국에 사는 제3세계 노동자들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영화의 주요 테마로 주목받았다. 그럼으로써 이들을 차별하는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들이 의문의 대상이 됐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못 배웠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시선의 아래에 숨어 있는 비이성의 가치들이 하나둘 비판 받았다. 파스빈더의 영화작업으로 타자에 대한 근거없는 차별의 편견이 영화적으로 공격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2004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은 <미치고 싶을 때>(파티 아킨)가 여전히 사회적 반향을 불러오는 데서 알 수 있듯, 또 한국에서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조건들을 볼 때, 지금의 상황이 파스빈더가 문제시했던 그때보다 나아졌다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다음엔 인종차별주의자 괴물 형사가 주인공인 오슨 웰스의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을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