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아르노 데스플레샹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골치아픈 가족 이야기다. 유전병으로 골수이식이 필요한 엄마를 살리기 위해 가족이 모인다. 그들은 싸우고 투쟁하고 미워하고 화해하거나 혹은, 끝내 화해하지 않는다. 주말 드라마도 지겨운데 지긋지긋한 가족 이야기를 또 봐야하냐고? 이 걸작을 놓치지 않은 PIFF 관객들이라면 데스플레샹의 대사들이 위대한 프랑스 배우들의 입을 통해 쏟아져나오는 순간 발현하는 영화적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됐을 것이다. 데스플레샹 감독 또한 자신의 영화를 똑 닮았다. "한국영화의 역동성과 마찬가지로 생동감이 넘친다"고 부산을 표현한 그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영화의 형식, 그리고 지적인 오락거리로서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유희처럼 즐겼다.
-2002년작 <에스더 칸>은 연극적인 영화고 예술 자체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런데 최근 세 편의 영화는 극영화 형식으로 어떻게든 ‘가족’이라는 테마를 다룬다.
=캐릭터를 구상할 때 주변에 가족을 심어놔야 내가 인물을 잘 이해하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친구들 앞에 부모가 나타나면 굉장히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감춰진 뭔가가 드러나는 느낌이어서 그럴거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드러내고 싶다. 이를테면 존 웨인 같은 영웅 앞에 엄마가 나타나서 꾸짖고 간섭한다면 그 역시 당황하지 않겠는가. 그런 요소들이 추가되면 인물의 새로운 측면이 부가될 수 있다. 오히려 더더욱 진짜 영웅이 될 수 있는거다.
-굉장한 프랑스 배우들이 떼로 등장한다. 그들 모두의 성격과 연기속에서 조화를 찾아나가는 과정은 몹시도 고될 것 같다.
=촬영에 들어가기전 배우들에게 수많은 캐릭터가 나오는 다른 영화들을 많이 보여준다. 그런 스타일의 영화를 찍고 싶다고 미리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미리 설명을 하면 배우들 역시 동등한 위상을 갖고 작업을 하게 될 거란걸 이해하게 된다.
-언제나처럼 엄청난 대사들이 끝없이 등장한다. 이걸 자막으로 보면서 당신이 의도한 표현을 놓치고 있지않나 불안하기도 했다. 당신 영화의 대사들이 자막과 더빙으로 100% 이해될 수 있다고 믿나.
=내 영화가 미국에 소개되는 경우를 보면 오히려 놀란다. 프랑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말도 영어 자막으로는 더 잘 살려놓은 경우가 많아서다. 나 역시 어릴 땐 우디 앨런과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자막으로 충분히 잘 감상했다. 한국어 자막은 어떤가?
-한국어는 다소 축약적인 언어여서 조금 줄어드는 경우도 있을게다. <나의 성생활은 어떻게 토론되어졌는가>같은 초창기 영화들은 단단하게 짜인 수학적 혹은 건축적인 구조인 것처럼 보였다. 요즘은 의도적으로 틈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영화 형식에 대한 요즘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질문이 굉장히 가슴에 와닿는다. 프랑스에는 크리스마스 2주전에 나오는 특별 칼렌다가 있다. 하루마다 창문이 달려있어서 열어보면 사탕 등 그림이 숨어있다. 내 영화도 그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하나의 장이 한 인물을 대변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왜냐면 그런 틀이나 형식 없이는 관객들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틀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구조가 점점 자유로워진다고 느꼈다면 나는 정말 기쁘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는 주인공 중 한명이 수학자고 불치병에 걸린 장모가 살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하는 장면도 있다. 이 영화가 이전 영화보다 구조적으로 자유롭다면, 한 캐릭터에게 수학적인 구조가 모조리 넘어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거의 완벽한 ‘지적 엔터테인먼트’다. ‘지적인 영화’도 많고 ‘엔터테인먼트’도 많다. 그러나 ‘지적인 엔터테인먼트’는 점점 보기 힘들어진다.
=내가 영화를 하면서 가장 행복한 이유는 영화에는 천한 것과 귀족적인 것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적인 것과 지적이지 않은 것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것들을 관객들이 이해하도록 만드는 거다. 추상적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와 관객 사이에 어떤 종류의 질서가 성립이 되고, 그게 스크린에서 보여질 때 이해가 쉬워지는 것 말이다. 지적인 것을 대중적으로 만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