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소식]
영화사의 한 페이지 속에 있었던 여인
2008-10-09
글 : 이주현
마스터클래스 진행한 <빅토리아>의 안나 카리나 감독

마스터클래스가 열린 해운대 그랜드호텔 스카이홀. <비브르 사 비>(1962)의 안나 카리나와 <빅토리아>(2008)의 안나 카리나의 모습이 나란히 프린트되어 벽에 걸려있다. 흑백 사진 속의 안나는 짧은 머리에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고 컬러 사진 속의 안나는 모자를 쓰고 웃고 있다. 두 사진을 보며 스스로도 “감회가 새롭다”는 안나 카리나가 14살에 처음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은 뒤, 누벨바그의 여신으로 또 장 뤽 고다르의 연인으로 살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열고 그 속에 잠시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라는 사회자 이수원 프로그래머의 말처럼 흥미로운 2시간이었다. 안나 카리나 감독의 마스터클래스는 8일 오후 2시 그랜드호텔에서 열렸다.

덴마크 출신인 안나 카리나가 파리로 건너간 것은 17살.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지 구체적 계획도 없었던 그녀는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잡지 표지 사진을 찍게 된다. “알고 봤더니 <엘르>라는 패션 잡지였어요. 그때 표지 모델로 사진을 찍으면서 얼굴이 알려졌고 여러가지 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죠. 비누 광고도 찍었는데 고다르가 그 광고를 보고 영화 계약을 하자고 연락했어요.” 고다르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다르가 누구인지 얼마나 유명한 감독인지 몰랐던 그녀는 처음에 몇 번 고다르의 영화 출연 제의를 거절한다. 고다르는 끈질기게 구애한다.

“날 좀 만나러 와주겠어요?” 난관은 또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계약서에 서명을 할 수 없어 영화 출연이 어려워진 것. 고다르는 덴마크에 있는 그녀의 어머니를 파리로 모셔 오라고 한다. 그녀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한테 프랑스 영화를 찍게 됐다고 했죠. 돌아온 첫마디가 뭔지 아세요? ‘뭐? 미쳤구나’였어요.” 어렵게 고다르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 안나 카리나는 <작은 병정>을 함께 찍으면서 고다르와 본격적으로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특별한 눈빛 교환”의 시작. “스위스 로잔에서 파티가 있었는데 테이블 밑으로 누군가 제 무릎을 톡톡 두드리는 거예요. 고다르가 몰래 쪽지를 건넸어요. 쪽지엔 ‘사랑합니다. 12시에 제네바에서 만나요.’라고 적혀 있었죠.”

고다르와의 관계가 로맨스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고다르는 어떤 사람이냐는 관객의 질문에 안나 카리나는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얘기를 술술 풀어 놓았다. “고다르는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에요. ‘담배 사올게’하고 나가서는 3주간 안 들어온 적도 있었죠. 그리곤 선물을 들고 집에 돌아오는 거예요. 저의 화를 누그러뜨리려는 의도죠. 또 언젠가는 프랑스 해변에 휴가를 가기로 해서 한밤중에 신나게 출발했는데 200km쯤 가다가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잊은 게 있어. 파리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 트뤼포도 만나야 되고. 파리로 돌아가면 안 될까’ 하면서 차를 돌렸어요. 속상해서 삐쳐있었더니 ‘안나, 해변에 가고 싶구나. 그렇게 가고 싶으면 다시 가자’면서 유턴을 하는 거예요. 결국엔 너무 화가나 차에서 내려 그의 차를 발로 쾅쾅 차버렸죠.”

안나 카리나의 신작 <빅토리아>를 재밌게 봤다면서 ‘감독’ 안나 카리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안나 카리나는 “내가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32살에 처음 메가폰을 잡았다. 여배우가 감독으로 데뷔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자신의 첫 영화 <리빙 투게더>를 만들고 나서 “빈털털이가 됐다”는 그녀는 제작비를 모으는 일의 어려움을 들려줬다. “촬영 들어가기 일주일 전에 프타너 중 한 분이 자금 문제로 참여하지 않겠다고 통보해왔죠. 그것도 크리스마스 전날에. 사람들한테 제 영화에 투자해달라고 돈을 구걸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어요. 때론 수치심도 느꼈어요.” 관객들은 한때 누벨바그의 여신이었던 그녀가 투자금을 위해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기도 했다는 말에 모두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안나 카리나는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을 믿으며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다. “가능한 많이 웃으려고 해요. 낙관주의자가 되려고요.” 부산국제영화제에 뉴커런츠 심사위원장으로, <빅토리아>의 감독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녀가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늘 웃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웃음이 넘치는 마스터클래스였다.

사진 최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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