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폴 뉴먼] 메소드 스타의 죽음, 메소드 연기의 퇴장
2008-10-14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9월26일, 83살 일기로 사망한 폴 뉴먼의 연기 인생

할리우드가 비탄에 잠겼다. 지난 9월26일, 폴 뉴먼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향년 83살. 배우이자 감독이었고 제작자이면서 운동가, 성공한 사업가인 동시에 레이싱 경주를 즐기던 스크린의 전설은, 오랜 암투병 끝에 코네티컷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1925년 오하이오에서 태어난 폴 뉴먼은 젊은 시절 인상적인 외모로 거친 반항아 또는 패배자를 연기해 캐릭터 배우로 입지를 확고히 했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허슬러> <허드> 같은 전성기 대표작을 통해 10번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나중에 마틴 스코시즈가 감독한 <컬러 오브 머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2007년, 더이상 최고의 연기를 보여줄 수 없게 되었다며 은퇴했다. “내가 원하는 수준만큼 연기할 수 없게 됐다. 기억을 잃기 시작할 것이고, 자신감도 잃기 시작할 것이다. 창작에 대한 욕구도 그럴 것이다.” 외모와 연기력으로 사랑받은 것을 불공평하다고 여긴, 그래서 더 많이 사회에 돌려주고 싶었던 거인. 그의 연기인생을 영화평론가 한창호씨가 되짚어봤다.

서양인들의 푸른 눈에 대한 매혹은 물신숭배에 가깝다. 금발에 대한 욕망도 이에 못지않지만, 단 하나의 선물이 가능하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푸른 눈을 선택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삼킬 듯한 깊고 푸른 눈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마법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 영화계의 대표적인 푸른 눈이 폴 뉴먼이다. 그가 데뷔한 1950년대는 컬러영화와 와이드 스크린이 일반화될 때였다. 크고 넓은 스크린에 잡힌 그의 얼굴, 그리고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른 눈동자는 스타덤 등극에 유리하게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그는 금발이기도 하다.

만약 제임스 딘이 살아 있었다면

폴 뉴먼이 영화계에 등장한 1950년대는 이른바 ‘메소드 연기’의 배우들이 전성기를 열 때다. 그는 몽고메리 클리프트, 말론 브랜도와 함께 뉴욕의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 1세대 메소드 연기자다. 그런데 푸른 눈의 이점에 비하면 스타로서의 등극은 늦은 편이었다.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선두주자였다. 그는 불과 26살에 하워드 혹스의 <붉은 강>(1948)에서 존 웨인과 공연하며 일약 스타가 됐다. 곧이어 말론 브랜도도 엘리아 카잔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로 역시 스타가 됐다. 그야말로 뉴욕 브로드웨이 출신 배우들이 할리우드를 ‘공습’했다. 이들과 거의 나이가 같은 폴 뉴먼은 이들보다는 뒤늦게 30살을 넘겨 배우로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는 1958년 마틴 리트의 <길고 긴 여름날>을 통해 알려졌다.

폴 뉴먼이 겨우 관객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50년대 후반은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말론 브랜도의 시대였고, 이들보다 한참 후배인 제임스 딘은 이미 죽어 전설이 되어 있었다. 뉴먼은 동년배들과의 경쟁에서 밀린 채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후배인 제임스 딘에게 이미 추월당한 상태였다. 만약 제임스 딘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지금의 폴 뉴먼이 가능했을까?

복잡한 메소드 연기를 아주 간단하게 해석하면, 배역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배역이 ‘되는’ 것이다. 러시아의 연출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이론을 계승하여, 엘리아 카잔과 리 스트라스버그 등이 뉴욕에서 ‘액터스 스튜디오’라는 작업실을 열고 실험한 연기법이다.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인데, 과거의 연기와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심리연기의 발전이었다. 심리묘사에 기반을 둔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섬세함, 그리고 말론 브랜도의 폭력성은 이들의 페르소나로 각인됐다. 상대적으로 폴 뉴먼의 이미지는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자 반항의 상징 같은 제임스 딘이 등장했다. 메소드 출신들이 저마다 독특한 개성으로 치고 나가는데, 뉴먼은 엉거주춤한 모양새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폴 뉴먼의 전성기는 1955년 제임스 딘이 죽은 뒤 찾아온다. 그의 첫 번째 성공작 <상처뿐인 영광>은 제임스 딘이 죽은 1년 뒤 발표된다. 제임스 딘이 예민하고 심리적 상처에 쉽게 노출되는 반항아라면, 폴 뉴먼의 반항은 ‘의도적인 부적격자’의 이미지에 가깝다. 애초부터 제도 속으로 들어갈 의도가 전혀 없는 인물이다. 제도와 맞서 있는 점에선 반항아가 맞지만, 그는 히스테리컬한 인물이 아니라 절대 물러서지 않는 ‘꼴통’이다. 그는 제도에 신물을 내는 의도적인 패배자다.

언제나 ‘타고난 패배자’였던 뉴먼

폴 뉴먼이 제임스 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이미지를 구축한 작품이 바로 <허슬러>(로버트 로슨, 1961)이다. ‘패스트 에디’(Fast Eddie)라는 별명을 가진 당구 사기꾼의 이야기다. 우선 메소드 연기자답게 뉴먼은 진짜 당구 귀신의 솜씨를 선보인다. 그냥 당구를 치는 척하는 게 아니라 연습 끝에 프로급의 실력을 갖추었다. 에디는 상대방을 압도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스스로 그 재능을 파괴하는 복잡한 캐릭터다. 패스트 에디의 재능을 피 빨아먹듯 이용하는 악역으로 조지 스콧이 나오는데(그도 역시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 그는 에디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타고난 패배자야.” 이것이 에디의 성격은 물론이고, 폴 뉴먼의 스크린 속 이미지까지 단숨에 설명한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다 한들 그는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요구, 곧 제도의 요구를 수용하길 거부하면서 무너지고 마는 의도적인 부적격자인 것이다.

이런 불안한 성격이 관객으로부터는 큰 사랑을 받았다. <허슬러>의 애인처럼 여성들은 적응하지 못하는 그에게 보호본능을 느꼈고, 남성들은 사회적 요구를 거절하는 반영웅의 모습에 매료됐다. <허슬러>의 성공으로 굳어진 그의 스크린 속 페르소나는 <허드>(1963), <폭력탈옥>(1967) 등으로 상종가를 쳤다. <허드>의 자기중심적인 현대판 카우보이, <폭력탈옥>의 불굴의 자유의지를 실천하는 탈옥수 루크는 그대로 폴 뉴먼의 페르소나로 굳어졌다. 그는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부터 <허슬러> <허드> 그리고 <폭력탈옥>까지 흥행성공을 이어갔고, 또 네 작품 모두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 후보에 올라 배우로서도 전도양양한 60년대를 맞았다.

<상처뿐인 영광>
<허슬러>

그런데 폴 뉴먼은 스타로서는 더이상 부러울 게 없는 경력을 보여줬지만, 배우로서는 아쉬운 대목도 남겼다. 그는 스타로서의 인기가 배우로서의 역할보다 매우 높게 평가된 경우에 속한다. 다시 말해, 관객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에 걸맞은 걸작을 남겼는지는 큰 의문이 드는 배우다. 그는 60년대까지만 따져도 아카데미에서 모두 네번이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출연한 작품 중 단 하나도 작품상 후보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다시 말해 아카데미상이 작품의 질을 가늠하는 절대 잣대는 아니지만, 그가 출연한 작품은 고만고만한 수준의 것이었다. 그가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후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은 배우로서가 아니라 그의 감독 데뷔작인 <레이첼 레이첼>(1968)의 연출자로서였다. 폴 뉴먼의 출연작들은 동료 메소드 연기자인 클리프트나 브랜도 등에 비하면 확실히 무게감이 떨어졌다. 배우로서 아쉽다는 점은 바로 이런 상대적으로 빈약한 작품목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스타성에 비해 빈약한 작품목록

그의 대표작으로 소개되는 조지 로이 힐의 <내일을 향해 쏴라>(1969)는 당시 새로운 스타로 부각되던 로버트 레드퍼드와 짝을 이룬 폴 뉴먼 최고의 출세작이다. 막대한 흥행성공에 아카데미에서 4개 부문을 수상(촬영, 시나리오, 음악, 주제가)했다. 이 작품은 이른바 수정 웨스턴의 일종으로, ‘68’ 이후 청년들 사이의 공통적인 가치인 ‘자유와 저항’의 테마를 끌어왔다. 자살과 다름없는 마지막의 그 유명한 장면은 기존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의 몸짓으로 읽히기도 했다. 그런데 진정성의 면에서, 같은 연도에 발표된 또 다른 수정 웨스턴인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와 비교하면 맥이 좀 빠진다. <내일을 향해 쏴라>는 성장을 거부한 두 청년의 막가는 인생을 그린 ‘감상적 웨스턴’이라고 폄하해도 별 할 말이 없는 작품에 머물렀다. ‘거부’, ‘저항’ 같은 테마는 표피적으로 표현됐고, 도피와 포기의 유아기적 치기가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퍼드라는 두 스타를 우려먹은 계산된 흥행물의 냄새가 짙은 작품이었다.

두 스타가 또 함께 나와 역시 막대한 흥행성공을 거둔 <스팅>(조지 로이 힐, 1973)은 범죄의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스릴을 제공하는 케이퍼 필름(Caper Film)인데, 사회적 제도에 균열을 내는 범죄의 긴장된 역할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두 스타의 속임의 기술만 부각돼 있을 뿐이다. 역시 진정성보다는 흥행성을 고려한 일반적인 상업영화에 다름없었다. 폴 뉴먼은 <컬러 오브 머니>(1986)로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을 때까지 주연상 후보에는 번번이 올랐지만 수상하지 못한 배우로 유명했는데, 작품들을 보면 그의 상업성이 감점으로 작동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뉴먼의 단짝 로버트 레드퍼드는 아직까지 배우로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적은 한번도 없다. 두 배우 모두 스타로서는 더없이 행복한 조건을 즐긴 데 비해, 연기자로서는 아쉬운 점을 많이 남겼다.

폴 뉴먼도 이런 점을 염려했는지, 1966년 앨프리드 히치콕의 <찢겨진 커튼>에 출연하는 등 이른바 거장 혹은 작가 감독들과의 협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70년대 들어 이런 작업은 활발했다. 그는 존 휴스턴을 만나 <법과 질서>(1972)와 <맥킨토시의 사나이>(1973) 등을 발표했고, 70년대 후반에는 로버트 알트먼과 <버팔로 빌과 인디언>(1976)과 <퀸테트 살인게임>(1979)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작업도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휴스턴은 당시 쇠락기에 있었고, 알트먼과의 만남은 메소드 연기자로서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알트먼의 영화에선 심리연기가 중요한 메소드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는 요소이다.

80년대 들어 폴 뉴먼의 시대는 이제 저무는 듯 보였다. 나이도 쉰을 훌쩍 넘겼고, 새로운 메소드 연기자들이 나왔다. 더스틴 호프먼, 잭 니콜슨이 먼저 등장했고, 곧이어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 등이 스타덤에 올랐다. 이들은 모두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들이다. 클리프트, 브랜도, 뉴먼에 비해 10년에서 20년 정도 차이나는 이들은 ‘제2기 메소드 연기자’로 분류할 수 있다. 70년대부터 이들은 선배들을 밀어내고 스타덤에 올랐으며 80, 90년대에도,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금도 스크린을 압도하고 있다.

<컬러 오브 머니>, 메소드 연기의 퇴장

오하이오주의 시골에서 태어난 유대인의 아들 폴 뉴먼이 바야흐로 스크린에서 밀려날 때, 역설적으로 그의 최고작이 나왔다. 바로 마틴 스코시즈의 <컬러 오브 머니>다. 만약 이 작품마저 없었다면 폴 뉴먼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쉽게 잊혀졌을 것이다. <컬러 오브 머니>는 스코시즈의 최고작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흥행성으로 물든 뉴먼의 작품목록을 보면 <컬러 오브 머니>는 일종의 샘물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폴 뉴먼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메타 뉴먼’의 영화다. <허슬러>의 ‘패스트 에디’가 늙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영화는 이런 모티브에서 출발한다. 이는 늙은 에디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폴 뉴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 페르소나 그대로 스타가 된 뉴먼의 정체성이 ‘늙은 에디’로 통합돼 있다. 백발이 성성한 에디는 여전히 당구장 주변에서 내기 당구나 치면서 살고 있다. 한때 젊음의 달콤함을 후회없이 탕진해보기도 한 이 늙은 에디 앞에 자신의 젊은 모습과 똑 닮은 빈센트(톰 크루즈)라는 당구도사 청년이 나타난 것이다.

<내일을 향해 쏴라>
<컬러 오브 머니>

에디/뉴먼은 잊고 살았던 당구에 대한 정열을 되찾는다. 잊고 살았던 승리에 대한 쾌감도 다시 맛보고 싶다. 그는 세월 앞에 밀려난 과거의 한물간 스타가 아니다. 에디/뉴먼은 한판의 승부에서 멋지게 승리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막상 승리가 다가왔을 때 에디/뉴먼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허무를 느끼며, 모든 것에 냉소적인 태도를 갖는다.

<컬러 오브 머니>는 폴 뉴먼에 대한 고별사나 다름없는 영화다. 에디/뉴먼은 자신의 분신을 보자 불꽃같은 라이벌 의식을 느껴 승부욕을 다시 불태웠지만, 곧 그것이 자기 자신의 사라짐을 붙잡으려는 안타까운 제스처임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리고는 에디/뉴먼은 스크린 뒤로 사라진다. 이 영화를 발표함으로써 뉴먼은 사실상 스크린에서 물러났다. 오로지 스타만이 향유할 수 있는 스크린과 현실에서의 동시적인 물러남이 한편의 영화를 통해 표현됐다. 마치 존 웨인이 <수색자>에서 저 멀리 황야로 사라지며 스크린에서 물러났듯, 뉴먼/에디도 그렇게 스크린에서 사라진 것이다.

폴 뉴먼의 죽음으로 메소드 연기의 한 세대가 마감됐다. 1세대는 모두 죽었고, 지금 2세대도 곧 에디/뉴먼의 입장이 될 듯하다. 그럼으로써 아마 메소드 연기는 그 역사를 다할 것 같다. 이제 왠지 심리를 강조하는 메소드 연기를 보고 있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유행가를 듣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은 발터 베냐민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배우는 연극배우처럼 배역과의 동일시가 일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설명하며 이미 지적한 것이다. 메소드는 출발부터 연극에 적합한 기술이지, 영화와는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연기법 같기도 하다. 뉴먼/에디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 ‘메소드 세대’라는 영화사의 한 시대가 사라짐을 예고하고 있다. 개인의 죽음이 한 시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스타만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다.

사진제공 EVER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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