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 피곤한 남자다. 꿈만 꾸면 헤어진 연인이 나타나고, 깨어나면 란이라는 여인이 자신의 몽유병을 책임지라고 한다. 란도 피곤한 여자다. 눈만 감았다 하면 몸이 진의 꿈대로 움직이고, 경찰은 잠결의 행동을 증거 삼아 그녀를 채근한다. 꿈 때문에 피곤한 이 두 남녀가 김기덕 감독이 만든 <비몽>의 주인공이다. 김기덕은 피곤한 영화를 지향하는 감독이다. “쓰레기 더미를 헤치면 향기가 난다”, “눈뜬 세계보다 눈감은 세계에 심취해 있다”는 감독의 세계관은 이 영화에서도 명징한 줄거리보다 기호와 상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쓰레기 더미를 헤치는 대신 꿈과 현실을 충돌시켜 그 파편에서 비장한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것이 <비몽>이다.
인기의 기본 조건인 근사한 외모는 물론, 폭넓은 작품 선택과 기행으로 한국인의 입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일본 배우 오다기리 조가 ‘진’의 역할을 맡아 꿈과 환상 속을 헤맨다. 현해탄까지 건너와 이 몽중설몽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속내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압구정의 한 카페에서 곧 출국 예정인 그를 만났다.
-촬영이 끝난 뒤로는 첫 번째 방문이지만, 전에도 한국에 자주 드나들었다.
=거의 그렇다. 많이 방문했긴 했어도 열번까지는 아니다. (웃음)
-<비몽>은 한국적인 영화다. 한국식 가옥이나 한복도 빈번히 등장한다. 실제 당신과 한국의 거리는 어떻다고 느끼나.
=상당히 가깝다. 한국을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정이 많아 좋다. 특히 김기덕 감독이 그랬다. 유교 문화가 신선한 것도 이유다. 다른 나라에 없는 한국 유교만의 특색이랄까. 존칭어나 높임말 같은 것들 말이다.
-20대 때만 해도 청춘, 반항을 대표하던 스타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의외다.
=그건 영화 속 이야기다. 본래 나는 딱딱하고 차분한 편이다.
-드라마에서는 밝은 역할을 주로 맡았고, 영화에서는 어두운 역할을 주로 맡으며 양쪽의 역할을 큰 기복으로 오갔다. 실제 본인이 선호하는 역할은 어느 쪽인가.
=젊었을 때에는 <유레루>처럼 진지한 드라마를 좋아했다. 아예 코미디는 연기가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심각한 배역이 부담스럽고 피로하게만 느껴진다. <비몽>도 심각한 영화여서 무척 힘들었다. 그런데다 나이가 들고 코미디의 진수를 연기하는 것도 꽤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이제는 어느 쪽도 어렵고 힘들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왜 <비몽>처럼 진지한 영화를 선택했나.
=드물게도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직시하고 있는 감독의 세계관이 마음에 들었다. 죽음을 향해가는 방향성이 기타노 다케시와 비슷하다. 김기덕은 기타노 감독과 비교했을 때에도 개성있는 감독이며, 세계적으로 드물고 중요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봤더니 만만치 않더라. 그의 작품인 <비몽>은 어려운 영화일 것이 뻔했지만 그 점이 오히려 내 도전욕을 자극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서 올 때는 만반의 각오를 하고 왔다. 영화 자체는 각오한 것 이상으로 잘됐다. 특히 감독이 좋은 사람이어서 항상 의기가 충천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비몽>에 출연을 결정하게 된 당시의 상황은 어땠나.
=<도쿄타워>의 홍보차 한국에 방문했을 때였다. 김기덕 감독이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더라. 평소에도 너무 존경하는 분이라 부담되어서 사양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랬더니 김기덕 감독이 <도쿄타워>의 감상평과 자신이 제작할 <비몽>의 줄거리를 이메일로 보내주면서 괜찮다면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이제 30대에 접어들었다. 나이를 감안했을 때 <비몽>에는 중요한 의의가 있을 듯한데.
=20대에는 이기적으로 활동했다. 내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서 한 작품 안에서도 매번 소란을 일으키곤 했다. 배역에 있어선 아무에게도 내 몫을 양보하기 싫었다. 오기 때문에 바빠진 뒤부터 출연횟수를 점점 줄여나갔다. 그와 비교해 지금의 나는 많이 누그러진 편이다. ‘절대 안 돼’싶던 것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는 식으로 바뀌었다. 일보다는 인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비몽>의 촬영환경은 어땠나.
=<비몽>은 아주 단시간에 완성된 영화다. 이렇게 짧은 건 처음 경험해봤다. 그래선지 특별히 힘든 것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 장면들을 찍는 과정은 재미있었다. 함께 주연으로 출연한 이나영씨는 멋진 사람이었다. 닮은 부분이 많은데다 서로 존경하는 상대를 파트너로 삼게 되어 같이 연기하기 편했고 분위기가 좋았다. 사랑할수록 고통을 느끼는 진의 숙명에는 큰 슬픔을 느꼈다.
-일본 관객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김기덕은 일본에서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감독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좋아하지만, 나머지는 김기덕을 모른다. (웃음) 그래서 이번 작업을 계기로 그의 작품이 일본에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김기덕 이후 앞으로 함께하고 싶은 감독이 있나.
=현재 특별히 함께 일하자고 점찍어놓은 감독은 없다. 흥미있는 줄거리와 재능만 있다면 어느 감독이라도 좋다. 한국의 감독과 일해봤다고 해서 꼭 다른 나라에서 계속 작업할 생각은 없다. 재미가 가장 중요한 여건이다. 계속 재미없는 줄거리로 제안이 들어오면 당분간 영화를 쉴 수도 있다.
-인간 오다기리 조로서의 목표는 뭔가.
=당나귀를 한 마리 사고 싶다. 그래서 어디든 갈 때마다 그걸 타고 가고 싶다. (일동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