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때깔과 눈물에 얽힌 편집증을 걷어내라
2008-10-16
올여름 한국 공포영화 진단- 엉성한 설정에 갇혀버린 <고死: 피의 중간고사>와 <외톨이>

※이 글에는 <고死: 피의 중간고사>와 <외톨이>의 스포일러가 대거 포함되어 있습니다.

갑갑하고 안타깝다. 올해 개봉한 단 두편의 한국 공포영화 <고死: 피의 중간고사>(이하 <고死>)와 <외톨이>를 보고 난 심정이 그렇다. 진정 기사회생의 돌파구는 없는 것일까.

2007년에 개봉했던 공포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고배를 마시면서 2008년에는 신작 한국 공포영화를 단 한편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예년에 비해 확연히 줄어들었을지언정 올해도 두편의 한국 공포영화가 극장에 걸려 그 명맥을 유지했다. 한데 막상 영화를 보고난 뒤에는 또 다른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이제 한국 공포영화가 ‘고사’(枯死) 위기에 처했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이 땅에서 공포영화가 아무에게도 환대받지 못하는 ‘외톨이’ 장르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두 영화의 제목마저 한국 공포영화의 암울한 앞날을 예고하는 듯 불길하기만 하다. 물론 이 두 영화가 한국 공포영화 전체의 현황을 오롯이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영화가 한국 공포영화의 문제점과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는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를 만들어낸 관계자들이 영화들을 기획하고 만들고 극장에 내건 의도가 스크린 너머로도 뚝뚝 묻어났다. ‘저예산 납량특집 팬시상품으로 대충 찍어 본전만 빼먹으면 장땡이야.’

공교롭게도 두 영화에는 몇몇 공통점이 있다. 규모는 다르지만 밀실 공포를 표방한다는 점과 이름이 비슷한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점, 막판에 이르러 설득력없는 반전으로 그나마 미미했던 영화의 완성도를 바닥으로 끌어내린다는 점이 그것이다. <고死>에서 밀실은 주인공 이나의 학교이며, <외톨이>에서 밀실은 주인공 수나의 저택 혹은 그녀의 방이다. 모름지기 밀실 공포영화는 정교하게 짜인 밀실에 인물들을 몰아넣고 절체절명의 극한 상황에 빠뜨려 끈끈한 긴장감을 자아낸다는 점에 그 묘미가 있다. 저예산으로도 대대적인 흥행 성공을 거둔 <큐브>나 <쏘우>가 바로 그런 밀실 공포의 성공적인 사례다. 한데 <고死>나 <외톨이>는 이야기의 중요한 틀이 되는 밀실의 성립 배경 자체가 너무도 헐겁고 안일하다. <고死>의 학교는 전화가 끊기고 외부와 연락을 취해보겠다고 뛰쳐나간 교사가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는 이유로 등장인물들이 교문이나 담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밀실이 되고, <외톨이>의 저택은 수나가 휴대전화를 잃어버리고 가족들과 오페라를 즐겁게 감상하는 사이, 단짝 친구 하정이 자신을 따돌리던 패거리들의 강요에 못 이겨 속옷을 훔치다 봉변을 당하고 자살했다는 이유로 수나가 두문불출하는 밀실이 된다. 그런 엉성한 설정에 갇힌 와중에도 <고死>와 <외톨이>의 인물들은 우왕좌왕하다 하나둘 죽어나간다. 두 영화에서 인물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빈틈이 숭숭 뚫린 밀실이 아니라 허술한 각본이다.

장르 미덕 모두 포기한 저예산 납량특집 팬시상품

서두의 예지몽을 제외하면 영화 내내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하는 주인공 이나가 거의 유일하게 알아낸 ‘범인은 성적순으로 차례차례 죽인다’는 단서나 ‘문제를 맞혀야 친구가 살 수 있다’는 <고死>의 규칙은 일언반구의 변명도 없이 수시로 어겨지며, 범인이 제시하는 문제들도 지하철 가판대에서 판매되는 퍼즐잡지에 싣기조차 민망할 수준에 불과하다. 지척에서 학생들이 죽어나가는 판국에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나선 학생들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아도 지도교사 창욱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며, 범인을 포함해 아홉명의 인물이 죽어나가는 동안 수십명의 등장인물들 중 아무도 범인 몰래 학교를 빠져나가 실상을 알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당신들도 자식 잃은 슬픔을 느껴보라는 억하심정으로 학생들을 학교에 몰아넣고 죽였다는 범인의 고백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는 직쏘의 교훈이 차라리 명언으로 느껴질 정도로 과장되고 터무니없어서 영화의 말미에 창욱이 중얼거리는 ‘미안해’라는 대사야말로 이 영화의 관계자들이 관람료를 지불하고 극장 좌석에 앉은 관객에게 해야 마땅한 사과가 아닐까 싶을 지경이다.

<외톨이>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영화의 전반부 내내 이어진 하정의 이야기는 수나를 은둔형 외톨이로 몰아넣는 역할 외에는 그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하는 사족이라 아예 걷어내도 무방할 정도이며, 오랜만에 가족들이 둘러앉은 식탁에 모습을 드러낸 수나가 이해할 수 없는 폭식을 해댄 뒤 털어놓는 출생의 비밀은 이 영화의 제작연도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진부하고 어처구니없다. 더구나 나중에 수나의 친부로 밝혀진 세진이 방문 앞에 앉아 털어놓는 진실은 수나의 생모인 송이란 여자의 정신 상태마저 의심하게 하며, 송이의 집에 찾아가 진상을 알아낸 윤미는 사건 해결에 열쇠를 던져줄 것이라는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고 스크린에서 종적을 감추어버린다. 게다가 막판에 밝혀지는 진상은 이 영화가 왜 굳이 은둔형 외톨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택해야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케케묵은 가족사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으며 일말의 설득력조차 없다. 이 영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은둔형 외톨이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편견도 불쾌하기 짝이 없다. 명백히 <장화, 홍련>을 의식해 세트 제작비용에만 3억원을 들였다는 수나의 저택은 왜 그토록 호사스러워야 했는지, 바퀴벌레들은 왜 그토록 외톨이 머릿속에서 다량으로 서식했으며,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순간부터 다들 왜 그토록 자신의 신체를 칼로 서슴없이 그어댈 수 있는 담력이 솟아났는지, 문 열쇠가 없으면 잠긴 문 따는 기술자를 부를 일이지 왜 그토록 사다리를 타다 넘어지고 방문을 때려 부수느라 애먼 살림살이만 거덜내는 촌극을 벌어야 했는지, 음악은 상영시간 내내 왜 그토록 장엄하게 관객의 귀를 고문해야 했는지, 결국 영화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외톨이가 아닌 한낱 출생의 비밀인데 왜 그토록 영화 내내 은둔형 외톨이를 들먹였는지, 영화를 보고난 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풀 길 없는 수수께끼 천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나가 아무리 눈물로 외톨이의 고통과 슬픔을 호소한다 한들 관객에게 자아내는 것이, 감정이입이 아닌 코웃음뿐이라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고死>의 유일한 미덕은 85분이라는 짧은 상영시간 안에 이야기를 몰아넣어 장면 전환과 전개가 빨라 적어도 관객이 지루해할 여지는 없다는 점인데, 그나마 상영시간이 117분에 이르는 <외톨이>는 그런 미덕조차 찾아볼 수 없다.

장르에 대한 애정과 치밀한 완성도만이 해법

성공적이었던 이전 공포영화들의 설정이나 플롯을 벤치마킹하는 전략을 탓하는 게 아니다. 팀 버튼이나 피터 잭슨, 샘 레이미 같은 오늘날의 대가들도 B급 공포영화의 감성과 애정을 자양분으로 정상에 오르지 않았던가. 협소한 국내시장에서 저예산으로 공포영화의 활로를 모색하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고死>와 <외톨이>의 벤치마킹은 벤치마킹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조악한 수준이며, 두 영화의 치명적인 약점은 예산이 아닌 부실한 아이디어와 드라마투르기에 있다. 게다가 두 영화는 관객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던 이전의 여러 한국 공포영화의 폐단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공포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완전히 결핍해 있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인형 같은 여배우들의 꼭두각시놀음과 무의미한 충격 효과들, 반전에 대한 강박과 번들거리는 겉치레뿐이다. 대체 언제쯤이면 한국 공포영화에서 때깔과 눈물에 얽힌 편집증을 걷어낼 수 있을까.

모터사이클에 카메라를 매달고 악령의 질주장면을 찍었다던 <이블 데드>의 가난하지만 빛나는 실험 정신, 실제로 수풀에 찢기고 다치며 추격장면을 찍고 안전장치도 부실한 전기톱에 다치지나 않을까 가슴 졸이며 연기했다던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에서 묻어나는 열정과 뚝심, 자신의 창조물이 별볼일 없는 시리즈물로 전락하는 게 싫어서 몸소 <뉴 나이트메어>를 만들어 시리즈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던 웨스 크레이븐의 장인정신. 그런 땀내 나는 면면을 한국 공포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마냥 허황된 욕심일까.

장르에 대한 애정과 치밀한 완성도 없이는 걸작도 흥행도 없다. <고死>가 13억원이라는 제작비로 160만 관객을 동원했다지만, 그것은 올 여름 유일하게 개봉한 한국 공포영화였으며 학생 관객이 기꺼이 지갑을 열 수 있는 소재를 택했다는 이점, 그리고 방송과 언론이 퍼부은 대대적인 홍보에 기댄 바가 크다. 그런 요행이 내년 극장에서도 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공포영화보다 현실이 더 무서운 요즘, 한국 공포영화가 나아가야 할 바는 자명하다. 단 한편의 공포영화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어 극장에 내거는 것. 그것은 불안한 현실을 벗어나 100분간의 안전한 공포 체험을 기대하며 영화표를 끊고 객석에 앉은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모쪼록 간절히 바란다, 부디 내년 여름 <피의 기말고사>가 극장에 걸리는 일은 없기를.

김종일/ 작가(<몸> <손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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