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 오디세이]
[걸작 오디세이] 웨스턴은 존 포드의 동의어
2008-10-16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나는 존 포드요. 웨스턴을 만듭니다. 미국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방에서 세실 B. 드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세실 B. 드밀을 바라보며) 그러나 나는 당신이 싫소. 당신이 지지하는 것도 싫소. 오늘밤 여기서 당신이 말한 것도 싫소.”

매카시즘이 불어닥칠 때 감독협회에서 존 포드가 행한 연설의 일부다. 당시 협회는 조셉 맨케비츠가 회장이었는데, 그는 일부로부터 친공산주의자라고 비판을 받았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세실 B. 드밀이었다. 드밀과 그의 추종자들은 무려 4시간에 걸친 연설을 하며 매카시즘 전파의 선봉에 섰다. 드밀은 협회의 모든 감독들은 ‘충성맹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위기를 압도했다. 이때 드밀에게 정면으로 반박한 인물이 바로 존 포드였다.

“나는 존 포드요. 웨스턴을 만듭니다”

연설에는 존 포드의 두 가지 특성이 드러나 있다. 우선 반골기질 혹은 아웃사이더로서의 비판적인 태도다. 매카시즘이라는 일방적 애국주의에 많은 감독들이 주눅이 들어 있을 때, 포드의 용기는 팽팽한 긴장의 얼음판을 깨버렸다. 그의 발언 이후 분위기가 역전된 것은 물론이다. 두 번째는 웨스턴에 대한 자부심이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네번이나 받았지만, 한번도 웨스턴 덕분에 수상한 적은 없다. <분노의 포도>(1940) 같은 드라마에 비해 웨스턴은 저급한 장르로 치부될 때였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웨스턴을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장르에 대한 일종의 반골 기질이기도 하다.

웨스턴에 대한 사랑과 아웃사이더로서의 기질, 이 두 가지 특성이 모두 들어 있는 걸작이 바로 <수색자>(1956)다. 할리우드의 장르 가운데, 장르와 감독이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유일한 경우가 바로 웨스턴의 존 포드다. “웨스턴은 존 포드”라고 말해도 결코 어색하지 않다. 빈센트 미넬리가 아무리 뮤지컬을 잘 만들었다 해도, “뮤지컬은 미넬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만큼 존 포드라는 감독의 이름은 장르 전체를 의미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이다.

<수색자>의 주인공은 이산 에드워드(존 웨인)라는 아웃사이더다. 그는 남북전쟁 때 남쪽 군인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지 3년이 지나도록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그는 그동안 멕시코에서 용병으로 혹은 반군에 합류하여 싸운 듯하다. 그는 여전히 남군을 상징하는 칼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는 사랑에서도 패배한 경험이 있다. 지금 동생의 아내가 된 마사는 사실 그의 여자였다. 도입부에서 마사와 이산 사이의 각별한 시선에서 이들의 과거사를 짐작할 수 있다. 전쟁에서의 패배, 그리고 사랑에서의 패배는 그를 고향으로 쉽게 돌아오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이산 에드워드가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동생의 집은 인디언의 공격을 받는다. 동생 부부와 조카가 살해되고, 여조카 두명이 납치됐다. 납치된 조카들을 찾기 위한 5년에 걸친 수색이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다. 텍사스 순찰대(Texas Rangers)와의 합동 작업을 빼고, 마틴 폴리(제프리 헌터)라는 동생 부부의 양아들과 팀을 이뤄, 둘만 돌아다닌 기간만 따져 5년이다.

황야로 사라지는 존 웨인의 뒷모습

영화는 이산 에드워드의 광적인 수색에 초점이 맞춰 있다. 그는 인종주의자이며 특히 인디언들을 증오한다. 마틴은 1/8 인디언 혈통인데, 처음 만났을 때는 물론이고 함께 수색을 하면서도 동생의 양아들인 그를 절대 조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존 웨인이 이렇게 신경질적이고 야만적으로 나온 적이 없다. 그는 늘 여유있는 서부의 전문가였다. 그런데 여기선 걸핏하면 고함지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려 든다. 그는 가족을, 특히 마사를 살해한 인디언 추장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가득 차 있다. 이산이 불탄 집을 보고 뛰어들어갈 때, 처음 부르는 이름도 마사였다. 증오와 복수는 그를 5년간 벌판에서 헤매게 했던 것이다.

이산과 마틴이 황야를 돌아다니며 가끔 서부 공동체로 돌아올 때, 집이, 문명이 얼마나 편안한 것인지 강렬하게 느끼도록, 야만과 문명은 극명하게 대조돼 있다. 이산은 두 이질적인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남자다. 그런 성격은 웨스턴 최고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평가받는 결말부에서 극적으로 표현돼 있다.

살아남은 조카를 안고 서부의 공동체로 돌아온 날, 그의 모습은 집 안의 문을 통해 액자 속 인물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집 안으로 들어온 뒤, 혼자 남은 이산은 잠시 문밖에서 서성이다, 그대로 몸을 돌려 저 멀리 황야로 혼자 걸어간다. 문, 다시 말해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서 그는 황야를 선택한다. 황야에 문명을 가져오기 위해 그렇게 수많은 웨스턴을, 그리고 서부의 사나이들을 만들어왔는데, 존 포드는 막상 문명의 공간에선 서부 사나이를 위한 여지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더이상 웨스턴은 여기 문명에 존재할 수 없으며, 서부의 사나이 존 웨인도 시대의 저쪽으로 사라져간다. 존 포드는 <수색자>를 통해 웨스턴의 사라짐을 애달프게 바라보았고, 이런 이별의 감정은 6년 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를 통해 절정에 달한다.

다음엔 조셉 맨케비츠의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 1950)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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