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6일 극장에 걸리는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는 오랜만에 맞닥뜨리는 거침없는 데뷔작이다. 줄거리는 짧게 요약하면 ‘삽질의 설상가상’이고 미운 오리 새끼인 주인공은 백조가 될 가망의 씨알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 대한 예측을 번번이 추월하는 이 영화는 관객에게 통쾌한 패배감을 안겨준다. 올해 나온 코미디 중 가장 많은 웃음을 주기도 한다. 그 중심에는 잔인한 세상과 순순히 무릎 꿇지 않는 개인에 대한 서늘한 관찰력이 자리잡고 있다. 한번 보면 기막히고 두번 보면 사랑스러운 <미쓰 홍당무>와 이경미 감독을 소개한다.
“나랑 좀 싸울래요?”
<미쓰 홍당무> 티저 포스터의 공효진은 비죽 내민 입술과 부릅뜬 눈으로 우리에게 시비를 건다. 그리고 그녀에겐 이유가 충분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양미숙(공효진)이 지병인 안면홍조증에 걸린 운명의 날이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단체 사진을 찍는 순간, 급우들은 스크럼을 짜고 미숙을 대열에 끼워주지 않는다. 튕겨져나온 미숙은 궁리 끝에 “하나둘셋”에 맞춰 힘껏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간신히 앵글에 끼어든 미숙의 얼굴은 숯불처럼 벌겋게 타오르고 있다. 하지만 압권은 그 다음이다. 정지된 사진을 향해 줌 인하는 카메라는 뒷줄의 미숙을 프레임 밖으로 유유히 밀어내며 환하게 웃는 중앙의 소녀들에게 다가간다. 그녀가 주인공인 영화조차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 인물, 그것이 양미숙이다.
10년 뒤 어른이 된 미숙은 모교의 러시아어 교사로 부임하지만 중학교 영어 교사로 좌천돼 영어학원 다니며 수업하는 처지가 된다. 왕따의 표식은 문신이라도 되는지, 학생들조차 그녀를 현관 깔개 취급한다. 설상가상 미숙은 이젠 동료가 된 옛 담임 서종철 선생을 열렬히 짝사랑하고 있다(본인은 결코 짝사랑이 아니라 믿는다). 한데 웬걸 유부남 서선생은 다른 여교사와 바람이 난 눈치다. 게다가 밉살맞은 상대는 직장 내 경쟁자인 미모의 러시아어 교사 이유리(황우슬혜). 미숙은 서 선생의 딸이자 미숙과 나란히 전따(전교 왕따) 처지인 중학생 종희(서우)와 손을 잡고 서 선생 부부의 이혼을 저지하는 작전에 돌입한다. 그래서 뭐라도 잘돼갈까? 그럴 리 없다. 일껏 커튼을 열면 창 대신 벽이 나오고, 혹 떼려다 혹 붙이는 사태가 줄을 잇는다.
사람들이 볼거리인 캐릭터 영화
<미쓰 홍당무>의 유일무이한 볼거리는 사람들이다. 먼저 ‘왕따들의 왕따’로 설정된 양미숙을 보자. 그녀는 왜 따돌림받는 것일까. 곰곰 뜯어보면 미숙은 실력이 부족하다지만 안정된 직업도 있고 외모가 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콤플렉스를 가리려는 옷차림이 그녀를 불거져 보이게 한다. 진짜 화근은 그녀의 ‘매너’다. 혼자만 희한한 감정을 품어서가 아니라 그 감정을 사회화된 인간답게 위장하지 못하는 게 문제인 것이다. 안면홍조증이라는 징후는 감정을 은폐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상징에 가까워 보인다(극중에서 미숙의 안면홍조가 남들의 입으로 지적되는 일은 별로 없다).
<미쓰 홍당무>를 ‘캐릭터 영화’라는 규정에 걸맞게 만드는 조연들도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무늬만 공주인 이유리 선생의 곤경도 연애의 매너에 매끄럽게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양미숙과 듀엣을 이루는 중학생 종희도 남들과 다르게 느낄 때 포장해서 말하는 법을 몰라 미움받는다. 종희의 생활기록부에는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함”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점은 양미숙도 같다. 미숙은 교무실에서 숙식을 하며 목돈 마련에 열심이고 밤이면 가습기와 마사지기, 좌훈기에 붙어 산다. 하긴 아무도 챙겨주지 않으면 스스로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 아웃사이더는 영화에서 가장 흔한 캐릭터지만, 미숙과 종희는 구석에 틀어박혀 눈물 바람을 하는 대신 그악스럽게 자신을 챙기고 방어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어당긴다. 알고 보면 미숙과 별명이 같은 쥘 르나르의 소설 <홍당무>의 소년 역시 구박과 업신여김에 위악으로 대응하는 인물이었다. 미숙과 종희의 닮은꼴로 떠오르는 캐릭터들은 한국영화 바깥에 있다. 토드 솔론즈의 <웰컴 투 더 돌하우스>에 나오는 복수심 가득한 왕따 소녀나, 웨스 앤더슨의 <바틀 로켓>에 등장하는 주류에 편입할 의사가 없는 낙오자들, 그리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승리를 구가하는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의 외톨이 소년 정도다.
그러나 <미쓰 홍당무>의 힘이 단순히 튀는 캐릭터의 디자인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전범을 찾기 힘든 배역을 해석한 배우들의 노력이 성공한 데에는, 과장된 상황과 인물의 현실적 설득력 사이에 균형을 잡은 이경미 감독의 연출을 간과할 수 없다. 제작자인 모호필름 대표 박찬욱 감독 역시 이경미 감독의 첫 장편에 믿음을 가졌던 첫 번째 이유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심심하게 흘러가지 않는 연기를 이끌어내는 재능을 꼽는다.
그녀는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나
<미쓰 홍당무>에서 유머의 뇌관은 사회의 천덕꾸러기들이 허튼 짓으로 망신을 당하는 광경보다, 어떻게든 반격해보겠다고 발버둥치는 험난한 과정에 있다. 미숙과 종희, 그리고 유리는 마땅한 논리도 없으면서 자꾸 계획과 계략을 세우고 잘잘못을 따지고 도리와 원칙을 주장해서 우리를 웃긴다. 그녀들은 하릴없는 헛똑똑이다. 인간관계- 성관계를 포함해- 의 실제 경험이 부족한 그들은 들은 것, 읽은 것을 총동원하지만 현실 앞에서는 백전백패다. 미숙의 투쟁이 자해를 동반하는 것은 그녀 자신조차 겹겹이 쌓아올린 논리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뭐 어때서?”와 “내가 별론 것 나도 알아”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열심히 살아봤자다”와 “나는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해” 사이를 초조하게 서성인다. 애처롭다. 그런데 연민보다 한심함이 앞선다. 이경미 감독의 영화가 박찬욱 감독 영화와 공유하는 유전자가 있다면 그처럼 쓰라린 유머 감각이다.
일견 어이없는 한바탕 소동극을 통해, 이경미 감독은 본말전도와 과잉열성이라는 현대생활의 경향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감독의 전작인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2004)과 <미쓰 홍당무>를 들여다보면 문제와 해결책이 엇나가 있다. 양미숙과 서종희가 벌이는 이혼 지연 작전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할 뿐 아니라 그녀들을 괴롭히는 사태의 본질과 동떨어져 있다. <잘돼가? 무엇이든>의 해운회사 직원 지영은 탈세를 위해 특근을 시키는 사장을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사장에게 잘 보이려는 동료 직원 희진에게 분노를 품는다. 급기야 둘은 누가 장부 숫자를 많이 속였나를 놓고 경쟁을 하고 질투를 한다. <미쓰 홍당무>에서 핵심과 무관한 사안을 갖고 미숙이 기울이는 무의미한 노력의 수준은 도를 지나쳐 식음을 전폐하는 기진맥진한 스케줄에 다다른다. 한 대목에서는 피를 보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엇을 원하냐?”는 질문에 미숙은 멍하니 답한다. “바빠서 거기까진 생각을 못해봤어요.” 그녀들은, 우리는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 대답은 단순할지도 모른다. 작은 일에라도 분노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인 줄 안다.
<미쓰 홍당무>의 클라이맥스에서 미숙과 종희는 객석의 야유 속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한다. 둘에게 고도(Godot)는 끝내 오지 않을지언정 같이 수작하며 기다릴 친구는 있다. 그럼에도 <미쓰 홍당무>를 페이소스가 승한 코미디나 왕따 문화의 자성이라고 부르기는 망설여진다. 무엇보다 이경미 감독은 우리가 양미숙을 비웃은 죄책감을 해소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남는 것은 조촐한 자각이다. 이 세계의 막강한 냉혹함과 자신의 막대한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에 인간은 귀여운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