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김민선] 두려워말자, 다 보여주자
2008-11-07
글 : 정재혁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미인도>의 천재화가 신윤복, 김민선

사실 개성이란 말은 변덕 심한 세월이 자기 입맛에 맞게 여기저기 갖다 붙여놓는 단어다. 유행이 세월따라 변하고 또 변하듯 개성도 어제오늘 운명이 다르다. 90년대 후반 등장했던 일군의 개성파 여자배우들, 공효진, 김민선, 이요원, 배두나의 오늘도 그렇다. 공효진이 패셔니스타의 이미지를 지나 <미쓰 홍당무>로 화려하게 피었고 배두나가 세권의 사진집을 내며 도시의 팬시한 스타로 자리잡았지만 이른 결혼으로 활동이 뜸해진 이요원과 톡톡 튀는 목소리가 이젠 더이상 새롭지 않은 김민선은 다소 심심한 배우가 되어버렸다. 개성파 배우의 길 찾기는 변화무쌍한 세월을 이겨내야 하는 암중모색의 과정이다. 김민선이 2007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두편의 영화 <가면>과 <별빛 속으로>를 찍으며 갑작스레 바쁜 몸가짐을 보여준 건 그래서 조금 흥미로웠다. 워낙 높은 톤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튕겨내는 듯했다. 노출이 화두가 되어버렸지만 그림, 남장, 승마, 사극 등 도전 요소가 많은 영화 <미인도>도 그녀의 새 출발을 알리는 신호 같다. 데뷔 10년차. 개성파 배우 김민선은 세월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미인도>에 연기 인생을 걸었다는 그녀를 만났다. 김민선은 <미인도>의 개봉을 앞두고 심한 감기를 앓고 있었다.

-신윤복 역할이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
=내가 신윤복 역할을 하면 끌어낼 게, 풀어낼 수 있을 게 많을 것 같았다.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미인도>란 시나리오 안에 고스란히 있었다. 이거는 내 거다, 라는 생각이었다.

-캐스팅 1순위는 아니었다고 들었다. 전윤수 감독 집까지 찾아갔다고 하던데.
=집은 아니고 근처다. (웃음) 내가 온 마음을 다 바쳐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은 시나리오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이후 10년 만이다.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다. 이걸 못하느니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감독님에게 이 작품 캐스팅 안되면 유학 가겠다고 말했다. (웃음) 협박은 아니고 배우로서 정말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준비도 하고 있었고.

-캐스팅 확정 이전에 준비를 하기 시작한 건가.
=배우가 시나리오가 마음에 든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역할을 달라고 할 순 없지 않나. 운동하면서 체력을 보강했고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가서 신윤복의 작품을 봤다. 사실 수장고는 우리나라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나는 문화관광부에 전화해서 <미인도>란 작품에 신윤복으로 캐스팅된 배우라고 뻥을 치고 보여달라고 했다.

-대단하다. 그리고 대담하다. (웃음)
=여자 대리님이 평소에 제가 연기하는 걸 예쁘게 보고 계셨던 터라 허락해주셨다. 대리님 동행하에 수많은 사람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작품을 봤다.

-<미인도>를 10년 만에 만난 작품이라 했는데 그게 어떤 느낌인가.
=다른 인터뷰 자리에서도 했던 말인데 이전 작품들에서 각각 소매를 만들고, 단추를 꿰고, 품의 사이즈를 알았다면 <미인도>에선 이 모든 걸 합쳐 한벌의 옷을 입은 느낌이다. 그동안 알게 된 것들을 복합적으로 완성한 기분이다. 아마 1~2년 전에 이 작품을 봤다면 이렇게 절실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픔도, 행복도 충분히 아니까 이 작품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들을 이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보여줄 게 많다는 건 부담이 될 요소도 많다는 거다. 특히 <미인도>는 남장에 노출도 적잖다. 또 같은 소재의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방영되는 중이라 문근영과도 비교되는 작품이다. 부담은 되지 않았나.
=일단 세 가지 모두 다 해볼 만한 것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피했을 거다. 우선 남장은 그냥 신윤복이란 인물이 내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가진 톰보이 같은 모습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극중에서 윤복이는 남자로 살다 여자로 꽃이 피는데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내 안의 여성성을 끌어낸 기분이다. 노출 역시 필요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신윤복의 그림은 사실 굉장히 외설적이다. 하지만 그건 그가 눈에 비친 세상을 그대로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 영화는 신윤복의 그림이 왜 야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야하다. 다른 데서 이렇게까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림이 야하니 영화도 야할 수밖에 없다.

-연기관과는 별개로 노출 연기는 일종의 용기이기도 하다.
=물론 인간 김민선은 쉽게 하지 못한다. 사람이고, 여자니까. 가족도 생각해야 하고. 난 대중목욕탕에도 못 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배우잖나. 배우로서 이 작품이 하고 싶다면, 보여줘야 하는 게 있다면 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 여배우들이 노출에 보수적인데, 나는 오히려 문화의 다양성 면에서 보여줘야 하는 거는 과감하게 보여주는 게 멋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고.

-그림도 배웠겠다.
=영화와 관계있는 것 위주로 배웠다. 10회 정도 레슨을 받았고. 완벽하게 그림을 그리기보다 붓과 친해지려고 했다. 처음엔 진도가 늦었지만 나중엔 내가 원하는 건 붓으로 그릴 수 있게 됐다. 윤복이는 영화에서 자기의 마음을 삭이고 또 삭인다. 그리고 그게 나중에 폭발한다. 나도 <미인도>를 하면서 고독하고 위태로웠다. 촬영은 즐거웠지만 마치고 오면 외로웠다. 그 가슴을 풀 데가 없으니까 붓과 화선지로 했던 것 같고. 영화는 끝났지만 붓이란 친구랑은 헤어지고 싶지 않다.

-뜸하게 작품 활동을 하다 2007년 유난히 바쁘게 보낸 것 같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해피 선데이>에도 고정 출연했고. <별빛 속으로> 개봉 즈음엔 음에서 양으로 나간 것 같다는 말도 했더라.
=어머니가 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이후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다 귀찮고 그냥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품은 꾸준히 했지만 삐뚤어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황상태였다. 극도로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는데 안되겠다 싶었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이미지 소진이 클 것 같아 출연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갑자기 출연하게 된 이유는 뭔가.
=사실 가능하다면 연기로 다 보여주고 싶었다. 김민선이란 친구는 할 줄 아는 게 너무 많다. 그게 단점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나만 알지 주변 사람들은 모르더라. 내가 춤을 춰야 춤 좀 추는 줄 알고, 노래를 불러야 노래 좀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알아줄 줄 알았는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더라. 심지어 포토그래퍼들은 코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내 얼굴을 모른다. 나온 사진들을 보면 참 형편없다. 코앞에서 내 얼굴을 보는 사람들도 김민선이란 사람의 얼굴을 이렇게 모르는데 대중은 어떻겠나 싶었다. 그렇다면 내가 나서서 보여주자, 보여줄 수 있는 걸 보여주자, 두려워말자, 뭐 그렇게 생각한 거다.

-2007년 한해를 보면서 개성파 배우 김민선이 길을 찾으려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배우들에겐 일종의 레시피가 있다. 정해진 단계를 밝고 길을 찾아가면 된다. 하지만 나는 그게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거, 필요한 걸 두려움 없이 보여주는 게 맞는 것 같다. 이제 마음이 너무 편하다. 그동안 관객은, 시청자는, 김민선이란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 봐왔다. 내가 가진 9는 놔두고 1만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끊임없이 다른 걸 도전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미인도>를 기점으로 이제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들에 따라와줄 것 같다. <미인도>는 그동안 나라는 사람에게서 생각할 수 없었던 작품이니까. 사실 1보다 9가 크지 않나. 똑같이 소중한 건데 1만 보면 너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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