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원]
[베를린] 피해자 독일, 하나 추가요
2008-11-12
글 : 한주연 (베를린 통신원)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의 성폭력 다룬 <아노니마 : 베를린의 한 여인> 선봬
<아노니마: 베를린의 한 여인>

세월이 많이 지났나보다. 그동안 전범으로 낙인찍혀 2차대전 영화에서 가해자 역만 해오던 독일인들이 변했다. 독일도 이젠 ‘우리도 나름 피해자였다’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들을 내놓는다. 히틀러의 인간적 고뇌를 그렸다고 해서 논란이 된 <몰락>(2004), 소련에 영토를 빼앗기고 쫓겨나던 시절을 그린 TV 미니시리즈 <도주>(2007)가 그 예다.

최근 희생자로서의 독일인들을 보여주는 영화가 또 하나 나왔다. <아노니마: 베를린의 한 여인>은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소련군 독일 점령 시절에 발견된 한 여성의 일기를 바탕으로 소련군의 독일 여성에 대한 성폭력 실상을 다루고 있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독일-유대인 레즈비언 영화 <아이메와 야구아>(1999)의 막스 페르버뵉이 감독을 맡았다. 주연엔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영화 <옐라>(2006)로 베를린영화제 주연상을 수상한 니나 호스가 캐스팅됐다.

131분 내내 폐허로 무너진 베를린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승승장구 베를린에 입성한 소련군이 난장판을 벌이며 기뻐하는 모습, 독일 여성들을 겁탈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담는다. 주인공은 “러시아군이 우리 건물에 밤낮으로 쳐들어왔다. 한 여자가 목을 맸고, 한 여자는 총에 맞아 죽었다. 무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차분한 어조로 독백한다. 처음에는 그런 지옥이 있을까 싶지만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도 적응하며 그냥 살아간다.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들 사이에서는 “몇번 당했어?”, “네번”, “너는?”이라는 대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오갈 정도다.

주인공은 기자 출신에다 러시아어도 하는 지식인 여성이다. ‘늑대 한 마리를 방패삼아 다른 늑대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의도적으로 러시아군 장교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로맨스로 발전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멜로드라마적 음악과 스토리 전개가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게 흠이다. 주인공은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남편에게 그동안 기록했던 일기를 보여준다. 남편의 반응이 역시 나치 출신답다. “당신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군…. 당신이 역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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