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에서 그는 먹구름 같은 존재다. 네명의 남성이 만들어낸 햇살로 환히 빛나던 케이크숍 ‘앤티크’는 한 프랑스인의 출현과 함께 갑작스레 어두워진다. 그는 앤티크의 파티셰인 선우(김재욱)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아니 그보다 끊겼던 선우와의 사랑의 끈을 다시 잇기 위해 한국을 찾은 케이크의 명인 장 바티스트다. 프랑스 배우 앤디 질레는 이 시대의 로맨티스트 장 바티스트에 여러모로 걸맞는다. 에메랄드 빛의 눈과 빛나는 금발, 그리고 여성적인 얼굴선뿐 아니라 “프랑스인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사랑 말고 인생의 모토가 될 만한 게 있던가”라는 태도까지.
장 바티스트에 걸맞은 프랑스 배우를 수소문하던 민규동 감독의 레이더에 걸려 <앤티크>에 출연하게 된 앤디 질레는 외국인 ‘재연배우’가 아니다. 1981년생인 그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로맨스>(Les Amours d’Astree et de Celadon)에서 주인공 셀라동을 연기했던 프랑스의 유망주다. 첫 해외 프로젝트에 꽤 만족하는 듯 시종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던 아름다운 청년에게서 <앤티크>와 <로맨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앤티크>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장 바티스트라는 인물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인생에서 사랑이 없다면 일 또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이다. 그래서 스스로 떠나보낸 사랑을 다시 찾으려고 지구 반대편까지 찾아가는데, 그런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연출자가 민규동 감독이라는 사실이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극장에서 보고 매우 좋아했는데, 이 영화의 감독이 민규동 감독이라는 사실을 알고 서슴지 않고 오케이를 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 나오면서 주가도 오르고 바빠졌을 텐데 한국에서 작업한다는 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나.
=로메르의 영화를 찍고나서 바빠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평소 한국영화를 보면서 감성이 농밀하고 색채가 풍부하다고 생각해왔다. 당연히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고 꼭 출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이전에도 한국영화를 많이 봤나.
=프랑스가 세계 여러 나라의 영화를 가장 많이 보여주는 곳 아닌가. 내가 알기로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파리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첫 한국영화인데, 그 당시에 찾아가서 봤다. 그 뒤로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도 빠짐없이 봤다. 시네필이냐고? 글쎄, 하여간 영화 보는 것은 정말 좋아한다.
-촬영 때 한국에는 얼마나 체류했나.
=딱 1주일이었다. 너무 스케줄이 빡빡해서 한국을 충분히 즐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여기저기를 관광하지는 못했지만 현장에서 한국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서 음식도 먹고 대화도 나눴기 때문에 나름 한국 문화를 제대로 느꼈다고 생각한다. 홍보를 위해 찾아왔지만 이번에도 여유는 없다. 두번 다 일정이 짧아서 불만스럽긴 하다.
-한국의 현장 분위기는 딱 정해진 시간만 일하는 프랑스의 그것과는 달랐을 것 같다. 밤새워서 찍고 무한정 기다리고….
=(웃음) 촬영하는 리듬이며 뭐… 모든 게 완전히 다르다. 그 다른 점 때문에 한국영화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도움이 많이 됐다. 사실 시차도 있고 해서 찍는 내내 피곤하긴 했지만 다시 불러준다면 언제든지 오겠다.
-<로맨스>가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되긴 했지만, 사실상 <앤티크>가 한국에서는 당신의 첫 영화이다. 남자와의 키스신도 있고 해서 첫인상치고는 강렬한 편이다.
=어중간한 건 싫어하는 편이라 처음부터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은 좋다. (웃음) 김재욱은 키스신을 찍을 때 불안해하기도 했는데, 문화적으로 봤을 때 그의 불안감과 나의 긴장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프랑스에서 남자끼리 키스한다는 것은 대단한 터부가 아니잖나. 긴장하는 정도는 크게 차이가 났지만 촬영 당시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민규동 감독을 비롯한 스탭들이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해줘서 서로 웃으면서 별 어려움없이 촬영을 마쳤다.
-로메르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것은 굉장한 행운인데.
=내가 연기수업을 듣는 학교에서는 매년 연말이 되면 학생들의 연기를 보여주기 위한 무대공연을 연다. 나 또한 그 무대에 섰는데, 에릭 로메르의 오랜 동료이자 이 영화의 프로듀서인 프랑수아즈 에체가라이가 셀라동을 연기할 배우를 고민하다가 이 연극을 보고 나를 로메르에게 소개했다. 로메르를 만난 뒤 많은 변화가 있었다. <로맨스>의 셀라동 역은 감성이 풍부해야 하는 배역이라 우선 연기가 많이 늘었다. 그리고 그 영화 덕분에 유명해지까지 했다. (웃음)
-<앤티크>에서는 잘 몰랐는데 실제 만나보니 외모에서 여성적인 느낌이 난다. <로맨스>에서 했던 여장 연기 또한 인상적이었다.
=<앤티크>를 찍을 때는 수염도 기르고 피곤하기도 해서 남성적으로 보였던 것 같은데, 나 역시 내게 여성적인 이미지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긴 그런 인상 덕에 로메르 감독의 영화에도 출연한 것 아니겠냐. (웃음)
-에릭 로메르가 준 가르침이 있다면.
=무엇이든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뭔가 좋은 것을 만들어내려 한다고 해서 굳이 심각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웃음) 에릭 로메르는 심플한 분이다. 그는 모든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로맨스>는 <앤티크>와 비슷하다. 겉보기에 심플하고 가벼운 이야기이지만, 따지고 보면 사회가 부여하는 아픔과 그것에 적응해나가는 사람들의 깊고 내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