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변화는 역시….
=역시 뭐요.
-슈트죠 슈트. 역시 슈트.
=슈트가 뭐요.
-피어스 브로스넌 시대부터 지난번 <카지노 로얄>까지, 본드는 항상 브리오니(Brioni)를 입었잖아요. 왜 최소 600만원은 기본이고 맞춤복은 1천만원을 능가한다는 이탈리아 슈트. 제냐나 아르마니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최고급 슈트. 근데 이번에는 디자이너 톰 포드가 만든 맞춤 슈트를 입으셨더라고요. 몸에 샤라락 감기는 게 끝내주던데요.
=뭔 소린지 모르겠군. 나는 MI6에서 제공하는 슈트를 입을 뿐이라고.
-에이. MI6에서는 한도없는 크레디트 카드를 제공할 뿐이죠. 슈트는 직접 고르신 거 아닙니까요.
=베스퍼가 직접 골라준 슈트도 많소. 그나저나 브리오슈건 톰 포드건 슈트가 다른 게 뭐 그리 큰 변화라는 소리요.
-브리오슈가 아니라 브리오니요. 브리오슈는 버터와 계란이 듬뿍 든 프랑스 빵이고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 아마도 바게트였겠지요? 여튼 빵이 없다고 난리를 치자 그랬다잖아요. 아니. 이런 황당한지고.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잖는가.
=브리오슈가 뭔지는 저도 압니다. 왜 갑자기 빵 이야기로 빠지는지….
-여튼 브리오니는 뭐 저도 입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꽤나 클래식한 고급 슈트라거든요. 돈 많은 영국 신사가 입을 만한 옷이죠. 하지만 톰 포드는 생전의 베르사체를 제외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야한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 중 한명 아닙디까. 그가 만든 본드씨 슈트도 은근히 섹시해요. 들어오고 나간 근육과 도톰한 궁뎅이를 강조하는 걸 목표로 최선을 다한 듯한 슈트더라고요. 아무나 입을 수 없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요.
=저는 그런 거 잘 모릅니다. 슈트는 비밀스럽게 적진으로 잡입하거나 첩보를 위한 파티에 참가하기 위한 눈속임 의상일 따름이지요.
-흠. 톰 포드의 슈트를 입고 비밀스럽게 적진으로 잠입하다니 그거 참 비밀스럽네요.
=슈트나 브리오슈 이야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촌스러우시긴. 네 알겠습니다요. 그나저나 세월이 흐르니 바뀌는 것도 많습니다. <카지노 로얄>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거의 뭐 제이슨 본의 큰형님이시더군요. 근데 본드가 지붕을 뛰어다니며 몸을 막 굴릴 이유가 또 뭔가요. MI6 정도면 인공위성으로 다 추적 가능한 거 아니었습니까. Q한테서 비밀 추적기 같은 거 받으시지 않았어요?
=Q가 누구죠?
-그 왜 MI6 비밀창고에서 이상한 비밀병기 제조하는 영감님 있잖습니까.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Q와 알프레도 집사가 동일 인물이 아닌가 지난 10여년간 의심해왔습니다. 낮에는 MI6에서 일하다가 밤에는 고담시의 저택에서 배트카를 설계… 흠. 표정을 보아하니 모르시는군요. 머니페니는 아십니까?
=머니 중 가장 작은 게 페니죠.
-이거 혹시 유머?
=….
-머니페니는 M 사무실에서 일하는 비서잖아요. 제임스 본드를 은밀히 연모하는 사무직 요원 말입니다. 평소에는 안경을 쓴데다 할머니한테 물려받은 것 같은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어서 상당히 너디해 보이지만 침실에서는 180도 돌변해서 활활 타오를 것 같은 그녀 말입니다. 이런 걸 OL(오피스 레이디) 판타지라고도 하지요.
=알다시피 저는 MI6에서 일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M 사무실 개인비서는 죄다 남자들이더군요. 게다가 MI6 사무직 요원들과 로맨스를 벌일 만한 처지도 아니고요. 일단 원칙적으로는 금지돼 있습니다만.
-흠. 그렇군요. 왠지 새로운 제임스 본드는 사생활이 재미가 없단 말이죠. 비극적으로 죽어버린 첫 여자만을 사랑하는, 귀신잡는 해병대 스타일의 돌쇠 제임스 본드라.
=누가 한 여자만 사랑한답디까. 베스터 그 스파이 년과 저의 관계는 사랑 따윈 아니었수다.
-꺅. 역시 제임스 본드 맞군요. 역시 본드는 그래야 본드죠. 앞으로는 만나는 본드걸과 즐겁게 침대에서 놀아주십쇼. 참. 보드카 마티니는 마실 줄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