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는 일종의 사고실험으로, 기존의 처첩(妻妾)제에 대해 성차 뒤집기를 감행함으로써 결혼제도에 관한 다양한 고찰을 시도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원작은 센세이셔널한 제목에 걸맞은 단출한 중혼(重婚) 스토리에,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 성과들을 읽기 쉽게 배치하고, 여기에 남성 독자들의 가독성을 한층 높일 축구 관련 일화들을 버무림으로써 일부일처제의 외부를 상상해보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몇 가지 코드가 바뀌었다. 원작자가 참고문헌까지 밝히며 신경 써서 집어넣었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인문학적 성과들은 짧은 대사 몇 마디로 축소되었고, 축구 관련 아포리즘은 배경과 인물을 묘사하는 요소쯤으로 처리되었다. 남은 것은 중혼 스토리인데 원작의 질박한 반죽은 손예진이 내뿜는 눈부신 미모와 눈웃음의 누룩을 만나 황홀한 남성 판타지로 부풀어올랐다. 그 결과 원작 자체에 이미 있었으나 눈감아줄 만한 흠결이었던 문제들이 쩍 벌어졌다. 결국 영화는 원작과는 사뭇 다른 지점에서 성정치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는 현재의 결혼제도를 그대로 놓은 채 성차만 뒤집으면서 벌어지는 모순을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결혼제도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를 (본의 아니게) 증명한다. ‘그녀가 두개의 결혼을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는 여기에 답하지 않는데, 그녀의 욕망에 주목할수록 영화 속 설정의 모순이 불거지며 그 모순은 바로 현 결혼제도의 불평등성에서 연원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둘째, 영화는 ‘평생 동안 한 사람만 사랑할 자신 있냐?’는 카피를 달고 있지만, 영화가 제시한 상황은 ‘동시’에 두 사람과 ‘결혼’하려는 ‘여성’을 ‘남성’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나머지 조건은 모두 완벽하지만 독점욕을 포기해야 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남자가 있겠는가?’이다. 영화는 사랑의 불변성을 묻는 게 아니라 ‘남자의 독점욕’을 반문하는 것이다.
1. 독자적인 욕망 없이 남자 위해 봉사할 뿐
그녀는 최고의 연애상대이다. (원작과는 달리) ‘10점 만점에 10점~’을 절로 외칠 외모에 재치있는 화술, 거기에 술도 잘 마시고 남자에게 “커피 한잔 하자”는 의미심장한 제안도 척척 잘한다. 그뿐인가! 최고의 섹스 기술과 매너를 지닌데다가 축구에 대한 사랑과 지식으로도 남자를 압도하니 더이상 뭘 바라겠는가? 그녀는 최고의 결혼상대이기도 하다. 잘나가는 전문직업인으로 경제적인 능력도 있는데다 요리와 청소 등 살림 솜씨도 빼어나며, 시댁에도 싹싹하게 구는 며느리에다 그 흔한 불임도 아니며 귀찮은 친정 식구는 아예 없다. 그녀는 성교에 관한 온갖 음탕한 말들을 예쁜 입술로 조악거리며 남자를 흥분시키면서도 ‘성교=사랑’이라는 참한 말로 남자를 다독이고, 남자의 성적 판타지인 밤샘오럴까지 해주면서도 자신의 성적 판타지는 “자기랑 하는 거”라고 말할 만큼 ‘착하다’. 외모·섹스·경제력·살림·감정노동에 이르기까지 시어머니 말마따나 그녀는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이런 그녀가 남편을 하나 더 갖겠다고 하니 그녀의 욕구를 어찌 봐야 할 것인가? 유지나는 “이런 슈퍼여자라면 다부제하는 게 안 놀랍죠”(20자평)라며 다부제가 능력의 문제이지 욕구는 당연한 것인 양 말하였고, 문석은 “여권운동가인 줄 알았는데 섹시한 요부네”(20자평)라며 그녀의 성욕에 주목하는 발언을 하였지만, 그녀가 왜 중혼을 욕망하는지는 납득되지 않는다. 두번의 결혼이 그녀의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는가? 가령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그녀는 의사 남편으로부터는 경제적인 효용을, 시간강사 남편으로부터는 정서적·성적 만족을 얻었다. 두개의 결혼은 그녀의 양보할 수 없는 두 가지 욕망을 채워주는 보완적 관계였다. <투야의 결혼>에서 그녀는 장애를 입은 남편을 데리고 두 번째 결혼을 하는데 여기서 중혼은 경제적 필요와 의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결혼했다>의 그녀는 경제적 독립을 이루었고 더이상의 풍요도 바라지 않는다. 두번의 결혼 모두 경제적 필요 때문이 아니다(소설에선 그녀의 월급이 남편보다 많다고 나온다). 그녀가 아무리 성욕이 충천한 요부라 한들 굳이 결혼을 두번 할 필요는 없다(정말 성욕 때문이라면 한번도 불필요하다).
그녀가 두번이나 결혼한 이유는 모두 남자들을 위한 것이다. 한때는 집시처럼 객사가 꿈이던 여자가 남자가 졸라대는 바람에 결혼을 한다(물론 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이 한몫하였다). 두 번째 결혼 역시 그 남자를 위한 것이다. 그녀는 결혼이 뭔지도 모르는 그에게 동거가 아닌 결혼을 선물하고 싶어서 그를 설득했다. 그런데 흔히 관계를 공식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첩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그녀는 말한다. “그와 삶 전체를 포개고 싶어서.” 그런데 그 ‘삶의 포개짐’ 속에 ‘그녀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녀에게는 그 관계를 아는 친정 식구도 친구도 없다(돌잔치에 그녀쪽 하객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인간관계와 절연한 채 두 시댁에 봉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한다. 주말마다 지방과 서울을 오가기도 벅찬데, 질투가 난 남편은 한동안 가사일도 하지 않는다. 임신하고 아기 낳는 수고도 남편들이 대신할 수 없는 그녀의 몫이다. 남편은 말한다. “누구 좋으라고 이혼을 해?” 이 말은 처첩제로 고생하던 어머니의 말이었다. 이들은 모두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그녀는 ‘헌신적’으로 행동한다. “누구 좋으라고 결혼을 해?” 그녀는 슈퍼여자도 여권운동가도 요부도 아니다. 아예 독자적인 욕망을 지닌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21세기 남성 판타지가 빚은 롤플레잉 게임 속 아바타이다.
20년 전 최고의 아내 최진실은 퇴근하는 남편에게 축구방송 녹화 테이프를 건네며, “남편 사랑은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면 됐지만, 21세기 최고의 아내 주인아는 새벽에 클럽축구를 함께 보며 축구에 관한 논평을 풀어낸다. 15년 전 최진실은 영화 <사랑하고 싶은 여자&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사랑하고 싶은 여자’가 아닌 ‘결혼하고 싶은 여자’였지만, 21세기 주인아는 ‘사랑하고 싶은 여자’의 궁극이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최고봉이다. 이를 우리 사회가 드디어 ‘낭만적 사랑’의 완결점인 ‘연애->결혼’에 도달했다는 징표로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남성 판타지의 노골화로 보는 편이 합당하다. 대단한 능력과 화끈한 성욕을 지닌데다, 가부장적인 결혼이 참행복의 길이라 믿으며 두번씩이나 하려는 그녀! 이는 여성 캐릭터의 진화가 아니라 남성들의 취향의 업그레이드를 반영한 결과이다. <엽기적인 그녀>가 혁신적인 여성 캐릭터와는 무관하고 그저 ‘예쁘면 뭐든지 용서가 되는’, ‘발랄하니 좋은데 알고 보니 순정파라서 더 좋았던’ 남성들의 변화된 입맛을 반영할 뿐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영화는 가부장제의 결혼제도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처첩제의 성차만 바꾸어서 시뮬라시옹을 펼쳐 보이지만, 결혼이라는 판 자체가 양성 평등적이지 않다보니 가면을 바꾸어 써봤자 ‘삑사리’만 요란하다. 다만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오류를 통해 현재의 결혼제도가 지닌 남성 중심적 한계를 명확하게 도출시키는 의외의 성과를 보이는 건 반가운 노릇이다.
2. 완벽한 여자라도 독점 못하면 참을 수 있나
<아내가 결혼했다>가 먼저 중혼을 다루었던 텍스트 <결혼은, 미친 짓이다>보다 더 나아간 게 있다면 첫째, 선혼자의 입장을 다루고 있으며 둘째, 아기문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셋째, 관계의 외화를 다룬다는 점이다. 선혼자의 관점에서 다루다보니 질투문제가 전면화되고, 아이문제가 다뤄지다 보니 혈연의 문제가 발생하고, 관계가 외화되니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불거진다. 이 세 가지 문제는 원작에서보다 영화에서 더욱 증폭된다.
첫째, 선혼자의 질투는 원작에서보다 영화에서 훨씬 많은 사건을 일으킨다. 경주 집에서 남자를 때리고 아내를 목 조르는 행위, 문을 따고 들어가서 책을 집어던지다 다시 꽂는 행위, 그리고 결정적으로 돌잔치에서 ‘판을 깨버린’ 일 등은 원작에서는 상상만 했던 일들이었다. 영화는 남편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의 감정선을 충실히 다루며 남편 역할을 <광식이 동생 광태>와 <싱글즈>에서 ‘순수한’ 남자로 나왔던 김주혁이 맡음으로써 그의 질투 행동들에 쉽게 감정이입된다. 둘째, 영화는 원작자나 주인아가 끝내 허용하지 않았던 친자 감별을 허용해버린다. 이러한 행위가 편협한 것임을 깨닫게 하는 장면이 있더라도 이러한 영화의 선택은 결국 남편의 혈연에 대한 집착을 승인하는 효과를 갖는다. 친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보상태를 거부하고 그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과학적 확답에 피임에 관한 후일담까지 덧붙이면서 선혼자와 관객을 안심시킨다. 원작이 모수족, 정자전쟁, 보노보 원숭이까지 들먹이며 수컷의 혈연에 대한 집착을 상대화하려 노력했던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안일하고 보수적인 선택이다. 셋째, 사회적 인정의 문제 역시 원작보다 공공연해진다. 후혼자와의 결혼생활이 잡지에 실리면서 선혼자의 직장에서 알게 되고, 후혼자의 가족들이 돌잔치 깽판으로 중혼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영화에만 있는 사건이다. 이는 결국 사회적 파국을 초래할 것임이 자명하다. 예상되는 한국에서의 파국은 그녀의 꿈의 구장, 바르셀로나 누캄프에서 다 함께 환호하는 눈부신 엔딩 크레딧과 대조를 이루면서 한국에서의 불가능성을 더욱 선명히 확인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이상 세 가지 변용과 증폭을 거쳐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격하게) 묻는다. ‘다른 모든 면이 완벽한 여자라 할지라도 독점할 수 없다면 이를 참을 남자가 있을 것인가?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인 자식의 핏줄 문제는 전혀 없다 해도 말이다.’ 그리곤 스스로 대답한다. ‘한국에선 절대 불가능하지, 남의 눈도 있으니까.’ 헐! 영화의 답이 무엇이든 이 질문은 그 자체로 성정치학적 보수성을 지닌다. 영화의 질문이 설사 ‘남자의 독점욕만 잘 다스리면 저런 완벽한 여자와의 관계를 즐길 수 있으려나?’로 바뀌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영화의 사고실험은 결국 남자의 독점욕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존재 불가능한 완벽한 아내를 상정하며, ‘완벽한 아내’ 대(對) ‘일편단심’을 천칭에 달아보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미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의 일편단심은 다른 모든 조건들과도 맞먹을 정도로 중요하며, 남자의 독점욕은 그만큼 양보되기 어려운 것’임을 반어적으로 역설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는 일처다부제라는 급진적 여성주의를 논하는 양 허세를 떨지만, 실은 축구와 손예진이라는 남자들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기막힌 감미료를 얹은 ‘꼴보수 마초이즘’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