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 오디세이]
[걸작 오디세이] 6일 만에 만든 누아르의 전설
2008-11-20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우회> Detour, 에드가 울머, 1945

에드가 울머는 독일영화계 출신이다. 표현주의 시절에 그는 무대 디자인을 하며 경력을 쌓았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 <M>(1931), 또 F. W.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1924), <선라이즈>(1927) 등에서 미술을 담당했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등장하자 울머도 무르나우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울머는 곧 바로 유니버설에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유니버설은 호러영화 전문 스튜디오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울머는 호러 스타인 벨라 루고시와 보리스 칼로프가 주연한 <검은 고양이>(1934)로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치른다. 표현주의에서 닦은 미술 솜씨가 성공의 토대가 된 것은 물론이다.

호러 감독으로 할리우드 경력 시작

그런데 울머는 <검은 고양이>를 만들며 유니버설의 사주인 칼 램믈의 조카며느리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메이저 스튜디오에 속된 말로 ‘찍혀’버렸다. 괘씸하게도 영화계의 힘있는 집안의 여성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울머는 변방으로 밀려 변변한 영화는 만들지도 못하고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종족영화들을 발표하며 겨우 감독 경력을 유지했다.

한때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감독이었지만, 아쉽게도 울머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를 다시 영화계로 끌어낸 작품이 바로 <우회>(1945)다. 독일 출신 감독들이 강세를 보이던 누아르 필름이다. 1940, 50년대 할리우드 주변에는 ‘한방’을 기대하며 일어서고 망하기를 반복하던 저예산의 회사들이 수두룩했는데, 이들을 일컬어 ‘가난한 동네’(Poverty Row)라고 불렀다. <우회>는 ‘Poverty Row’가 단지 돈이 없는 회사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창의력은 있는데 자본력이 좀 달리는 독립 제작사들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기서 ‘B급영화의 왕들’이 줄줄이 배출됐고, 물론 울머는 그들 가운데 스타급이다.

<우회>는 전형적인 저예산영화다. 무명의 배우에, 엉성한 시나리오로, 간단한 세트장에서 단 6일 만에 만들었다. 그래서 ‘가장 빨리, 가장 적은 돈으로’ 만든 영화 가운데 전설적인 사례로 꼽힌다. 개봉 당시는 제법 잘 만든 B급영화 정도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누아르 고전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밤. 수심에 가득 찬 표정의 알이라는 남자(톰 닐)가 무작정 길을 걷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수염을 깎지 않아 더욱 피곤해 보이는 그는 스낵바에 갔다가, 주크박스에서 연주되는 어느 여가수의 노래를 듣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다른 손님과 싸움 일보 직전까지 간 그는 왜 그 노래를 듣고 화를 냈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긴 플래시백을 시작한다. 남자주인공의 보이스오프(보이스오버??)로 설명되는 과거의 어두운 이야기라는 전형적인 누아르의 공식이 펼쳐지는 것이다.

밤과 비와 그림자, 그리고 요부

내용도 전형적이다. 뉴욕의 피아니스트 알이 애인을 쫓아 LA로 간다. 주크박스의 노래는 바로 그녀의 히트곡이다. 알은 히치하이킹으로 고급차를 얻어 탔는데, 그만 사고로 차 주인이 죽고 만다. 알은 그 차를 타고 계속 여행하기로 했고 도중에 베라(앤 새비지)라는 여성을 태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죽은 차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한다고 알을 협박하며 더 큰 돈을 벌 궁리를 하는 팜므파탈이다. 신문에 죽은 차 주인의 부친이 큰 유산을 남겼다는 기사를 본 베라는 알에게 차 주인 행세를 하여 유산을 받으라고 부추긴다. 알이 거절하자 베라는 그러면 살인죄로 신고하겠다고 재차 협박한다. 방 밖에서 수화기를 내려놓으라고 고함지르며 알은 전화기 줄을 계속 잡아당겼는데, 소리가 없어 문을 부수고 방에 들어가 보니 베라는 그만 그 줄에 목이 감겨 죽어 있는 것이다. 순진한 남자가 여자를 잘못 만나 몰락하는 판에 박힌 누아르 이야기다.

졸지에 두 사람의 살인죄로 몰린 알이 자수를 고민하며 스낵바에 앉아 있던 게 영화의 첫 장면이다. 시나리오는 좀 거칠어 엉성하기도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은 스토리보다 누아르 특유의 ‘어두운’ 표현력에 압도됐다. 진짜로 함정에 빠진 것 같은 인상을 주는 톰 닐의 표정 연기도 압권이고, 그런 불안한 심리를 드러내는 그림자 많은 얼굴 클로즈업, 그리고 범죄의 죄의식을 자극하는 어두운 조명의 실내공간은 단숨에 관객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돈이 없다보니 웬만한 장면은 엉성한 세트에서 처리됐는데, 이런 장면들이 싸구려 같지가 않고 더욱 실감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LA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은 집채만한 크기의 연주자 그림자들이 알의 애인을 압도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식이다. <우회>는 창의력이 자본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은 사례로 칭송됐으며, 지금도 오로지 아이디어만으로 승부하는 많은 영화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누아르영화의 불길한 운명은 매우 암시적이었다. 하버드 출신인 배우 톰 닐은 훗날 실제로 아내 살인죄로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점이 참작돼 감옥에서 6년 복역했고, 출옥한 바로 다음해에 58살로 죽는다. 스크린과 현실간의 묘한 근친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었다.

다음엔 울머의 동료였던 F. 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Sunrise, 1927)를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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