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춘연] “힘들수록 기본에 충실해야지”
2008-11-19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씨네2000 이춘연 대표

“내가 ‘어’ 하면 조폭인 줄 안다니까.”

이춘연 씨네2000 대표의 말이 틀리진 않다. 처음 보는 사람이면 ‘어’ 하고 뒷걸음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지난 10년 동안 영화계를 대표한 ‘큰 바위 얼굴’이기도 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인회의 등을 이끌며 영화계 대소사에 나섰던 이 대표. 올해 4기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후보군 중 영화인들로부터 가장 큰 신임을 얻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진위 위원장 후보 접수를 하지 않았다. 대신 영화계에 봉사하느라 상대적으로 소흘했던 제작 일선으로 돌아왔다. 후반작업 중인 김윤석 주연의 <거북이 달린다>에 이어 <여고괴담5> 오디션과 캐스팅을 마무리하느라 여념이 없는 이 대표를 강남의 새 사무실에서 만났다. 쉬지 않고 매년 꼬박꼬박 1편씩 내놓는 것만으로도 부러움을 사는 그였지만, 배고프긴 마찬가지라며 이 대표는 손사래를 쳤다.

-강남으로 출근하니까 어떤가.
=충무로 사무실은 ‘오며 가며, 사랑방’이었다. 그곳보다는 동료들이 덜 온다. 영화계가 다운된 뒤로 사람들이 전보다 잘 안 돌아다니는 것 같다. 누군가 만나자고 하면 지갑 걱정부터 해야 하니까. 얼마 전에 아시안프로듀서네트워크(이하 APN) 일 때문에 일본을 다녀왔는데 한국에서 13명쯤 갔나. 일정 끝나고 밤이 돼도 다들 안 뭉치더라. (웃음)

-사무실을 옮긴 이유가 뭔가. 충무로에서 강남으로 이사했다는 말만 듣고는 돈 벌었다고 여기는 이도 있을 것 같다.
=여기가 더 싸다. 밥값은 2천원 정도 비싸지만. 어느 순간부터 임대료가 부담이 돼서 올해 1월1일 이사했다. 이쪽으로 온 뒤에 좋은 점도 있다. 강 건너가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예전엔 차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제 지하철 탄다. 다섯 정거장이다. 집 현관에서 지하철 타고 오면 1300걸음이면 회사다.

-아직 영화사들의 상당수는 강남에 있다. 더 자주 보게 되지 않나.
=알잖아. 나 밤무대 안 뛰는 거. 밤에 모여서 밥 같이 먹고, 술 한잔 하고, 잘 안 하니까.

-강남에 있던 영화사들 중 일부는 일산 지역으로 옮겼다.
=불황을 타개하는 방편이라고 생각한다. 제살 깎는 거지. 살림을 줄이면서 새 둥지를 만드는 것이니까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비상이라고 한다. 직원들에게 내 인생에서 가장 혹독하고 어려운 시기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던데.
=힘들지만 어렵다, 위기다라며 전염시킬 필요는 없다. 16, 17편 만들었는데 돌이켜볼 때 흥청망청했던 적 없고. 다만 체감 정도가 전보다 더할 따름이다. 더 힘들면 좀더 굶고, 어려우면 줄이고, 서로 돌려서 매고, 그러다 안되면 피도 뽑고.

-불황이 3년째 계속되는데 출구가 있다고 보나.
=시나리오가 중요하다고들 이제 말하잖나. 힘든 시기임을 부정하고 싶진 않으나 기본부터 충실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 또한 높다. 시나리오를 붙들고 정성을 더 쏟을 수밖에 없는 거지. 투자·배급사에서 기획개발비 받아서 경상비를 메우던 것도 과거지사이고. 투자자들이, 배우들이, 관객이 다시 관심을 갖게 하려면 시나리오가 유일한 승부 밑천이다.

-투자·배급사 대신 제작사들이 제작비 상당 부분을 떠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투자쪽 분위기는 어떤가.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창투사는 창투사대로 주저주저한다. 누구도 확신을 못 주니까 그런 것 같다. 조직을 차렸으니 안 할 수는 없는데, 이윤 창출이라는 부분에서 손해를 볼 수는 없고. 딜레마인 거지. 저질러야 스파크도 일고, 영화계도 출렁일 텐데. 확실한 건 아직 선진화가 안됐다는 사실이다. 10년 전에 아이디어가 돈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믿었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이디어가 아이디어가 아니었거나 아이디어가 돈이 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지 못한 거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창출하기보다 여전히 하드웨어에 선택당하고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화예술기획은행 등과 같은 기구를 만들어서 영화뿐만 아니라 공연, 출판 등과 같은 부문에 집중 지원을 해야 쓸 만한 콘텐츠가 나올 텐데 그런 부분에 대한 배려도 없고. 영화계 안에서도 보면 여전히 벽들이 높다. 창투사에서 심사하는 사람들 중 영화전문가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섞여야 리스크도 나눌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니 다들 리스크를 떠넘기려고만 한다.

-씨네2000이 생각하는 좋은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스스로 설득이 되고, 감동이 되는 이야기여야 한다. 지금까지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마음이 바뀌는 관객의 성향을 우리가 모조리 알고 있고, 또 그들을 속일 수 있다고 영화인들이 착각했던 것 아닌가 싶다. 정보통신사회로 급변하면서 관객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적당히 꾸미고 치장하면 관객이 극장으로 알아서 오겠지 하고 순진하게 생각한 거지. 카피 하나로 관객이 들뜨던 시절이 아닌데 말이다.

-제작비가 많은 영화들은 시장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포장을 요구하는 것이 현실이다. 씨네2000은 지금까지 비교적 평균 제작비에 근접하는 영화들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마케팅에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 아닌가.
=씨네2000도 한때 유혹이 있었다. 블록버스터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모 아니면 도를 택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성향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남보다 더 잘할 영화가 아니라면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 게다가 한국영화시장이 한계가 명백한데, 그 이상을 쓰면 위험하다. SF영화도 해보고 싶지만 할리우드를 이길 수는 없는 일이고.

-신인감독들과 계속 작업하는 이유는 뭔가.
=함께한 감독들 중에 기성 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 이는 이명세(<지독한 사랑>), 장윤현(<황진이>) 감독 정도다. <3인조>는 박찬욱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니까. 신인감독에 대한 애착은 좀 남다르다.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이 1부터 100까지 있다고 치면 기성 감독들은 50에서 100까지 한다. 1에서부터 50까지는 해봤으니까. 신인감독들은 고집을 부려서라도 1에서 100까지, 아니 그 이상을 하려 든다. 난 현장에서 더 하려는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이 행복하다. 쓸데없이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말 못한다. 혼신을 걸고, 목숨을 걸고 하는데 해봐서 안다고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다.

-만족할 만한 조건을 제공하지 못해서 미안한 때도 많았을 텐데.
=작품 하다 보면 감독이든 나든 다 한두번은 운다. 나야 힘껏 돕는다 해도 상대에겐 언제나 부족할 테니까. 사람들 앞에서 울 수는 없지만 혼자 운전하거나 화장실에 앉아 있거나 잠 들기 전에 기도도 하고.

-기도 내용이 구체적으로 뭔가.
=아멘은 아니고. 일종의 자기최면, 자기반성, 자기결심 뭐 이런 거다. 내가 오늘 감독에게 뭐라고 했는데 저 친구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되는데, 노심초사하고. 이런 일은 와이프한테도, 오랜 친구한테도 말 못한다. 그러니까 하늘과 대화하는 거다.

-제작자로서 가장 많이 곱씹는 시기는 언제인가.
=제작사로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황진이>가 아닐까 싶다. 모든 사람들은 (송)혜교가 노출을 했어야 했다고 한다. 흥행 결과를 놓고서 말이다. 그런데 장윤현 감독하고 합의했던 것도 배우가 안 벗어도, 눈요기 없이도 감동을 전할 수 있다고 봤다. 나도 어린 배우에게 특정한 목적 때문에 ‘좀 벗어라’라고 말할 뻔뻔함도 없고. 원작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많이 담았다고 봤는데, 흥행에 실패하고 나니 죄인 심정이 되더라.

-결과를 둘러싼 말 때문에 상처입은 적 있나. 뼈아픈 지적이거나 근거없는 오해이거나.
=말을 주워담아 곱씹는 스타일이 아니다. 영화 내놓는 순간부터 보는 사람이 주인이니까. <씨네21>이 영화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써서 항의 전화 한 적은 없잖나.

-몇년 전에 별점을 적게 준 것에 대해 개봉 뒤에 불만을 털어놓은 적은 있었는데.
=허물없는 자리이고, 상대니까 한 거지. 정색하고 항의한 건 아니잖나.

-<여고괴담> 5편은 대규모 오디션을 열었다. 전형료로 1만원씩 받았다고 하던데.
=이춘연이 지원자들에게 전형료 받아서 제작비 벌었다는 괴담은 나도 들었다. (웃음) 그런 말 들을 때면 가끔 짜증난다. 올해 <여고괴담> 시리즈가 탄생한 지 10주년이다. 그동안 10편까지 시리즈를 한다고 말했으니까 내 입장에서는 중간평가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여고괴담>이라는 브랜드를 알리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광고를 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 포스터 제작하고 광고까지 하고 모두 1억원 가까이 들었다. 전형료는 모두 거기에 썼다. 지금까지는 오디션을 하긴 했지만 대개 매니지먼트사에서 미리 알음알음 배우들을 물색한 경우였다. 5편의 경우에는 배우가 되고 싶지만 소속사가 없어서 어려운 친구들에게까지 다 기회를 주고 싶었고, 그래서 대규모 공개 오디션을 하기로 한 거다. 지원서 낸 몇 천명을 다 제대로 봤다고 말할 순 없지만, 서류 심사를 통과한 600여명의 배우지망생들은 꼼꼼히 눈여겨봤다. 오디션 본 친구들이야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고 여기겠지만.

-‘남고괴담’은 안 만드나.
=여고생들 말고 남자 청소년들 이야기를 해보자고 해서 만든 게 <돌려차기>다. 의욕이 넘쳐서 그런지 너무 돌려차서 내가 얻어맞은 영화지. <서프라이즈>도 관객 놀라게 해준다고 했다가 내가 놀란 경우이고. 가끔 동료들이 포인트를 못 맞췄다고 뒤늦게 말하는데 속으로 그런다. 그럴 줄 알았으면 와서 뜯어 말려야지. 저것도 망하는구나, 하고 내버려뒀느냐고.

-리메이크를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나.
=김유진 감독의 데뷔작인 <영웅연가>. 너무 빨리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김유진 감독은 20년은 지나야 뭘 하지, 그러는데. <3인조> 같은 경우도 비슷하다. 특히 박찬욱 감독이 이후 승승장구하는 걸 보면서 더 그런 것 같다.

-<거북이 달린다>는 후반작업 중이고 <여고괴담>은 곧 촬영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외에 준비하는 프로젝트가 있나.
=예전에는 <씨네21> 제작진행표에 빠지지 않고 올리라고 했었는데 요즘은 그런 시기도 아니고. 진짜 카메라가 돌아야 찍는구나 하니까 리스트를 읊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한참 쓰고 있는 코믹물 중에 <체포왕>이 있고, <시체는 울지 않는다> <살인마패> <결혼 시뮬레이터> 등이 있다.

-시나리오를 직접 보는 편인가. 아니면 후배 프로듀서들에게 일임하나.
=이 사람아. 제작자가 시나리오를 안 보면 어떻게 하나. (서류 뭉치 더미 탁자를 가리키며) 달달 외운다니까.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깐깐하게, 촬영 들어가서는 띄엄띄엄이 내 원칙이다.

-상황이 호전될 것 같나. 허리띠를 풀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재작년부터 양보 운동 하자고 그러고 다닌다. 가치를 30%만 양보하고, 자존심도 30%만 양보하고. 서로 동업자라는 생각이 힘을 낼 수 있는 출발점이다. 손해도 나누고, 이익도 나누고. 그렇다고 양보할 것 없는 조수급 스탭들에게까지 양보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불법 다운로드나 공정한 유통 구조나 다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양보가 선행돼야 한다. 난 영화계가 신당동 떡볶이 타운이나 신림동 순대타운하고 비슷하다고 본다. 내가 잘해야 저 사람도 잘되고, 저 집이 잘돼야 내 집도 잘된다. 너무 전도사 같은 말을 했나.

-수익률 개선 방안과 관련해 한국영화 부율(극장과 투자·제작사의 수익 배분 비율) 및 극장 요금 인상 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변화는 없었다. 그 가운데 영화계의 방만함에 대한 바깥의 질타도 거세졌다.
=유명 감독과 유명 배우만으로 투자가 이뤄지던 시절을 방만의 시기라고 쳐보자. 현장 살림을 지켜본 나로서는 그런 시기에도 여전히 부족하고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본다. 영화계의 냉정한 자성을 기회 삼아서 일부의 실수를 전체의 방만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부율이나 극장 요금 인상은 충분히 우리 뜻이 전해졌다고 본다. 다만 극장이라는 상대가 있으니 우리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일단 시장을 안정화한 뒤에 본격적으로 다시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영진위에 관한 질문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영화계 대소사에 관여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물을 수밖에 없다. 강한섭 위원장의 4기 영진위에 대해서 몇점을 줄 수 있나.
=후보자 접수를 하지 않아서 도망자, 배신자 소리도 들었다. 지금 위원회에 대해서 잘한다, 못한다 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다. 다만 이런 바람은 있다. 책임자가 되는 순간 잘못한 것은 덮고 잘한 것은 계승하고 아이디어가 있으면 실현하면 된다. 그런데 말들만 들려오는 게 이상하다. 대통령도 이념의 시대 넘어서 선진의 시대로 가자는데 왜 그럴까. 위원장이 되고 나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자신이 미워하고 자신을 미워했던 사람한테 먼저 가서 보듬어야 한다. 그런 자리는 또 외롭다. 외로움을 덜려면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보다 의견이 다른 사람을 더 구해야 한다. 10년 동안 준비했던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걸 탁 내놓고 사람들을 끌어야 하는데. 계속 과거 위원들이 말아먹었다는 식으로 가면 글쎄. 큰 일이 있을 수 없는 작은 동네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계속 흠집을 내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누가 토끼 잡으려면 귀를 잡고, 닭을 잡으려면 날개를 잡고, 사람을 잡으려면 마음을 잡으라고 하더라. 몇 개월 흘렀지만 이제 시작이니 새로 다잡았으면 좋겠다. 강 위원장도 권력이나 파워를 쥐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심부름센터 운영자라고 생각했으면 하고.

-아예 후보자 접수를 하지 않은 이유는 뭔가.
=하마평에 오른 것 자체로 고맙다. 영진위 위원장 또한 벼슬이 아니라 봉사하는 자리다. 걸뱅이지. 여기저기 뛰면서 부탁해야 하니까. (웃음) 지금껏 영화계를 위해 충분히 봉사했다고 생각했다.

-제작자로서의 은퇴를 생각해본 적 있나.
=카메라 앞에서 장렬히 전사할 때까지 걸맞은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왔는데. (웃음) 나름대로 적응 노력도 해왔다. 후배 프로듀서가 33살이라고 치면, 난 그 나이에 무슨 생각했나. 그때 사장이 영감처럼 쓸데없는 말을 해서 힘들었다면 나는 말 줄여야겠구나. 철없이 사는 게 중요하다. 폼 잡지 말고. 내 얼굴 봐라. 가만 있어도 ‘어’ 하면 폼 잡는 외모다. 현장에서 내 의견과 다른 주장이 나와도 ‘옛날에는 말이지∼’라고 안 하려고 한다. 그게 아무런 도움이 안되거든. 후배들에게 농담하는 것도 그런 노력 중 하나다.

-후배들이 잘 웃어주나.
=칭찬 많이 받는다. 이번 거 셌다면서, 간만에 한건 하셨습니다, 그런다.

-최근에 가장 반응이 좋았던 농담은 뭐였나.
=너무 야해서 여기서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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