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뱀파이어물의 농밀한 쾌락
2008-11-27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장르적 리얼리즘을 재구축한 <렛미인>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뱀파이어물의 역사는 수렴과 발산의 반복으로 이해될 수 있다. 20세기 중반의 일반적인 영화팬들은 뱀파이어를 단 하나의 이미지로만 기억했다. 그건 검은 연미복을 입고 여자들의 피를 빠는 중년 남자였다. 벨라 루고시에서 크리스토퍼 리로 이어지는 이 전통적인 드라큘라의 이미지는 브람 스토커 이후 꾸준히 이어졌던 수렴의 결과였다. 이 수렴의 결과는 심지어 브람 스토커의 원래 의도와도 어긋나 있었다.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결코 벨라 루고시가 연기한 연미복을 입은 헝가리 남자가 아니다. 원작 소설이 연극이라는 매체로 옮겨가고 그것이 다시 영화화되고, 벨라 루고시라는 배우가 연극과 영화 모두에 개입하면서 드라큘라의 20세기식 스테레오 타입이 만들어졌고 대중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와 함께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뱀파이어의 다양한 이미지는 이후 루고시식 뱀파이어 이미지에 수렴되었다. 그 이후 드라큘라나 그 밖의 다른 뱀파이어를 연기한 남성 배우들은 일단 루고시의 뱀파이어를 거쳐야 했다.

이런 반복되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뱀파이어 장르의 쇠퇴를 가져왔다. 90년대 들어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드라큘라>를 만들 때 가장 먼저 싸워야 했던 건 그동안 끊임없이 반복되어 관객을 지겹게 했던 뱀파이어물의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이미 더이상 뱀파이어는 공포의 소재가 되지 못했다.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뱀파이어가 아이들에게 숫자 세기를 가르치는 시대가 아니던가.

재료는 <드라큘라>만큼이나 정통적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반복에도 뱀파이어물은 그렇게 얕은 장르가 아니었다. 주류영화들이 익숙한 클리셰에 안주하는 동안에도 장르의 꾸준한 변주는 이어져왔다. 이런 폭발은 무척 자연스러운데, 주류화된 드라큘라의 이미지만으로 뱀파이어 서브 장르가 가진 서브 텍스트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아름답고 늙지 않고 영원히 살며 인간들이 꿈도 꿀 수 없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고 순전히 약탈적 쾌락에 의해 움직이는 괴물을 만들었다면 사람들은 결코 그들을 괴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단지 이런 소비는 권선징악을 강요하는 주류 시스템과 충돌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B급영화의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카밀라>를 원조로 하는 여성 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70년대 에로틱한 호러 장르일 텐데, 이는 해머 영화사의 <카른스타인> 3부작과 <악마의 키스>나 <어둠의 딸들>, 장 롤랑의 뱀파이어 영화들을 낳았다. 뱀파이어를 일상세계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꾸준해서 <살렘즈 랏> <마틴> <로스트 보이즈> <니어 다크>와 같은 현대 미국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뱀파이어 장르가 SF와 결합하면 <라이프 포스>와 <흡혈귀 행성>이 나왔다. 심지어 뱀파이어는 슈퍼영웅으로 개조되어 재탄생하기도 했다. 밤피렐라와 블레이드가 그들이다.

이들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드라큘라>를 통해 뱀파이어물을 재정비하려 시도했던 90년대 초반에 재무장을 하고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블레이드> 시리즈, <언더월드>는 모두 이 시기의 소산이다. 이들 중 가장 영향력이 거대했던 건 조스 위든이 만든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 시리즈와 스핀오프 시리즈 <앤젤>로, 이 두 작품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지금까지 나온 뱀파이어 공식과 클리셰들을 몽땅 정리할 수 있을 정도다.

욘 린퀴비스트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미인>을 볼 때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작품이 검은 연미복의 드라큘라가 폼잡고 있었던 지난 몇 십년간 꾸준히 이어져온 서브 장르의 탐구 결과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렛미인>에 나왔던 기본 재료들 중 장르 밖에서 온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단순히 뻔한 뱀파이어물의 규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주제,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 캐릭터 설정 모두가 장르적이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제목에 사용된 ‘뱀파이어의 초대’는 (기원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버피> 시리즈를 거쳐온 것이다. 뱀파이어에 매료된 왕따 캐릭터는? 세상에 그것처럼 뻔한 스테레오 타입이 어디 있는가! 주인공 이엘리와 보호자 호칸의 관계는? 브람 스토커 이후 끊임없이 재활용된 관계이다. 성적 지향이 모호하거나 성이 불분명한 뱀파이어는? <카밀라> 이후 뱀파이어 장르는 퀴어 서브 텍스트의 텃밭이나 다름없었다. 어린아이의 몸을 한 뱀파이어는?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팬을 보유한 앙겔라-좀머 보덴부르크의 <꼬마 흡혈귀> 동화 시리즈가 있다. 영원한 젊음에 대한 매료와 그로 인한 필연적 고독에 대한 연민은? 장르적 보편 주제다. 재료와 그 활용법을 따져보았을 때 <렛미인>은 <드라큘라>만큼이나 정통적이다. <블레이드>나 <언더월드>처럼 ‘쿨’하고 ‘힙’한 뱀파이어물들이 유행인 요즘엔 오히려 그 성실한 장르 탐구가 낯설고 신선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마 여기서 역할이 컸던 건 뱀파이어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고 선언한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아니라 장르 애호가인 원작자 욘 린퀴비스트일 것이다.

현실과 장르적 꿈의 혼성교배

<렛미인>의 매력도 그 정통성에 있다. 자세히 보면 이 작품이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철저하게 고전적이다. 전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심각한 태도로 재료들의 발전과 변주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장르 안에서 파괴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포스트모던한 변명의 시도도 없다. 단지 지나치게 노골적인 것들은 뒤로 감추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좀더 깊이 팔 뿐이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뱀파이어의 초대’ 설정이다. 이는 최근까지 그렇게 인기있는 설정은 아니었지만(이 설정을 고수하면 드라큘라가 박쥐가 되어 여자 침실로 들어올 수 없지 않은가!) <로스트 보이즈>와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장르 애호가들의 눈에 들어왔고 <렛미인> 역시 이들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고 보는 게 옳다. 단지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이를 익숙한 보호 설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영화는 이를 역으로 이용해, 뱀파이어 주인공 이엘리가 오스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는 장면에 사용한다. 보이지 않는 유리창에 막혀 꼼짝도 못하는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의 뱀파이어들과는 달리 이엘리는 일단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서 눈과 땀구멍으로 피를 흘린다. 이건 지금까지 어떤 뱀파이어물에서(!)도 보지 못했던 당당한 사랑의 시위이다. 이게 어떻게 나왔을까? 간단하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장르 규칙의 가능성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했던 것뿐이다. 이것이 <렛미인>의 규칙이다. 세상의 룰에 신경쓸 필요는 없지만 장르의 전통은 진지하게 고수한다. 이 규칙은 중요하며 어렵지 않게 일반화될 수 있다. 장르 클리셰란 전통의 수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고민 없는 관습의 반복에서 나온다. 장르 규칙을 현실 세계의 규칙만큼 진지하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아이디어와 가능성을 뽑아낼 수 있다.

<렛미인>에서 그린 어린 인간 소년과 ‘아주 오랫동안 12살이었던’ 뱀파이어 소녀(또는 소년)와의 관계 역시 규칙의 준수에서 나온다. 이는 위에서도 언급한 앙겔라 좀머 보덴부르크의 <꼬마 흡혈귀> 시리즈와 비교해보면 구별이 쉽다. 좀머 보덴부르크는 뱀파이어가 나오는 어린이용 동화를 만들기 위해 뱀파이어의 설정을 희석한다. 우리 주인공의 친구 꼬마 뱀파이어들은 아마도 사람을 물고 피를 빨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사람들이 죽을까? 심지어 좀머 보덴부르크는 공포심을 줄이기 위해 뱀파이어를 박쥐 대신 모기로 변신시키기까지 한다.

하지만 <렛미인>에서 규칙의 희석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속의 이엘리는 여전히 흉포하고 위험한 존재이다. 피에 굶주려 있고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희생이 필요하다. 어린아이들이 나오는 로맨틱한 영화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지만, 영화는 거리낌없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설정을 영화 끝까지 끌고 간다. 그와 함께 이들을 가둘 수 있었던 기성품 어린이 동화의 장벽은 깨지고 만다. 동화의 장벽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인기를 끌었던 로맨틱한 뱀파이어의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로 깨진다. 이엘리는 여전히 로맨틱한 존재지만, 이 캐릭터를 소망 성취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엔 불편하고 거슬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것은 장르적 리얼리즘이다. 장르의 규칙으로 구성된 허구의 세계를 실제 세계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의 역학관계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것. <렛미인>이 80년대 초반을 사는 외로운 노동자 계급 소년을 다룬 일반적인 리얼리즘 영화로 자연스럽게 전환될 수 있는 것 역시 이 두 접근방식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렛미인>은 실제 존재하는 일반적인 연쇄살인마를 다루는 정통 스릴러보다 더 사실적이다. 적어도 관객은 연쇄살인마의 비틀린 동기보다 이엘리와 호칸의 동기를 훨씬 자연스럽고 현실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런 장르 탐구가 이어지는 동안 장르 애호가이고 전직 마술사인 욘 린퀴비스트와 왕년의 왕따 소년이었고 호러 장르에 무관심한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만나는 접점이 생겨난다. 한쪽에서는 장르의 규칙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실제와 거의 비슷하게 움직이는 허구의 세계를 만든다. 그럼 다른 한쪽에서는 그 세계에서 자신이 20여년 전에 실제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악몽을 투영한다. 여기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장르적 꿈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장르는 따돌림당하는 어린 소년의 심리와 기대를 그리는 도구로서 일반적인 리얼리즘의 수준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하긴 장르라는 것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진 것도 우리가 같은 것들을 기대하고 같은 것들을 꿈꾸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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