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표현주의가 영화미학에 미친 첫 번째 영향을 꼽자면 단연 미술의 이용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을 기억해보라. 미쳐 돌아가는 세상은 광기의 그림에 의해 극적으로 표현됐다. 불안한 심리를 실물 크기의 그림으로 그린 세트에서의 드라마는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시각적 효과를 드러냈고, 이는 독일 표현주의라는 큰 흐름을 낳았다. 여기에 프랑스 인상주의에서 발전된 유연한 카메라의 움직임까지 끌어들인 인물이 바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다. 1925년 발표된 <마지막 웃음>은 표현주의와 인상주의의 성공적인 통합 사례를 보여줬다. 할리우드 폭스 스튜디오의 윌리엄 폭스는 <마지막 웃음>의 매력에 푹 빠졌고, 곧바로 무르나우를 미국으로 초대했다.
불안한 데이트, 그 절묘한 롱테이크
무르나우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과 <마지막 웃음>의 시나리오를 썼던 ‘심리의 작가’ 칼 마이어와 함께 할리우드로 향했다. 아버지가 투자에 실패하는 바람에 자살했고, 불과 15살에 그런 불행을 겪어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글을 팔아 동생들을 먹여살린 입지전적인 작가다. 이들의 미국에서의 첫 작품이 바로 <선라이즈>(1927)다. 시골에 사는 젊은 부부의 위기와 극복을 다룬다. 도시에서 세련된 여성이 휴가차 시골에 왔다가 남편과 불륜에 빠진다. 그녀는 아내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자기와 함께 도시로 도망가자고 부추기는 팜므파탈이다. 도입부에서 이들이 달밤에 만나 도시로의 환락을 꿈꾸는 장면에서의 카메라 움직임은 끊임없이 언급되는 무성영화 최고의 장면 가운데 하나다.
폭스 스튜디오의 세트에서 촬영됐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롱테이크로 찍힌 밤의 데이트는 무르나우가 ‘끊이지 않는 카메라’(Unchained Camera)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보여준다. 남자가 호숫가의 갈대밭으로 애인을 만나러 가는 장면인데, 한번의 컷도 없이 카메라는 남자를 트래킹으로 따라간다.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그리고 남자를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고,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는 정도로만 해서 좁은 공간임에도 범죄를 모색하는 두 인물의 불안감은 물론이고, 쉽게 연결될 것 같지 않은 이들의 관계까지 단번에 암시한다. 히치콕이 <로프>(1948)에서 시도했던 원 숏-원 시퀀스의 카메라 움직임, 오슨 웰스가 <악의 손길>(1958)에서 롱테이크로 찍은 도입부의 트캐킹 숏 등은 <선라이즈>에서 빚진 것으로 읽는 평자들이 많다. 이 한 장면만 봐도 앙드레 바쟁을 비롯한 리얼리즘 옹호자들이 왜 무르나우를 그렇게 찬양하는지 알만 하다.
영화의 전반부는 도시와 시골의 대립으로 구성됐다. 도시/시골의 대립은 팜므파탈/현모양처, 혼란/평화, 향락/노동, 최종적으로는 악/선으로 대조된다. 도시는 악의 소굴이고, 시골은 평화의 땅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대립도 중반부에 들어선 싹 바뀐다. <선라이즈>는 ‘도시의 교향악’에 다름 아니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가 이 영화보다 효과적으로 표현된 사례를 찾기 어렵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대한 교향악
아내를 살해할 생각까지 했던 남편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빈다.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은 용서와 화해로의 변화가 마법처럼 이뤄지는 곳이 바로 도시다. 특히 시골 부부가 놀이공원에서 보내는 밤장면은 표현주의와 인상주의의 절묘한 결합을 보여주는 절정이다. 공원의 입구에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미래적인 세계가 시선을 압도한다. <메트로폴리스>의 세계가 묵시록적이라면, <선라이즈>의 세계는 꿈처럼 환상적이다. 놀이공원으로 입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메트로폴리스>의 그들과는 달리 꿈을 꾸듯 들떠 있다. 젊은 부부도 거대한 건물과 장치들, 그리고 명멸하는 빛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만다. 과장되고 왜곡된 인공적인 장치가 표현주의적이라면, 이런 세상을 담는 카메라는 인상주의적이다. 건물에 반사된 빛과 그 빛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빛의 여운들은 인상주의 영화는 물론이고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마저 떠오르게 한다. 무도장의 큰 유리창을 통해 세련된 도시의 젊은이들이 춤을 추는 장면을 바라보는 신부의 시선은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의 꿈꾸는 시선과 무척 닮았다. 그녀의 눈에도, 관객의 눈에도 빛의 잔영들이 마법처럼 명멸한다. 도시는 꿈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무르나우는 할리우드에 이처럼 성공적으로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창작열이 최고조로 향할 때인 1931년, 42살에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만다. 죽을 때 함께 타고 있던 사람이 14살짜리 소년이어서, 무르나우의 성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고 제기됐다. 그의 할리우드행도 독일에서의 소문이 곧 발각될 것 같아 도피의 수단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목을 빠는’ 드라큘라의 이야기를 각색한 <노스페라투>(1922)가 그의 출세작이었다는 점도 무르나우의 일탈적인 성정체성을 의심케 했다. 한편 지금 볼 수 있는 <노스페라투>는 해적판을 복원한 것이다. 원작 소설가 브람 스토커의 자손들이 표절이라고 저작권 소송을 걸어, 무르나우는 패소했고 영화의 프린트는 모두 파괴됐기 때문이다.
다음엔 인상주의의 걸작 장 비고의 <라탈랑트>(L’Atalante, 1934)를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