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그녀들의 자각, 그녀들의 고민
2008-11-24
글 : 오정연
3인3색 여성감독 특별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여성적 화법을 고민해왔던 세명의 아티스트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자.

15살이 되던 해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를 보고 영화 만들기를 결심한 유럽의 거장(샹탈 애커만), 베트남에서 나고 자란 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이어나간 제3세계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활동가(찐민하), 그리고 올해 전주영화제를 찾았던 실험영화의 거장 제임스 베닝을 아버지로 둔 미국의 레즈비언 비디오 아티스트(사디 베닝). 국적도, 이론적 배경도, 지향하는 바도 모두 다르지만 돋보이는 문제의식을 보여준 실험적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이 ‘3인3색 여성감독 특별전’에 모인다. 11월23일부터 25일, 29일과 30일, 12월2일에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으면 된다(문의: 서울아트시네마 ·아이공 ).

찐민하 <그녀 이름은 베트남>
샹탈 애커만 <국경 저편에서>

프루스트를 자신의 미학으로 소화한 <갇힌 여인>, 유럽식 로맨틱코미디 <카우치 인 뉴욕> 등 국내 개봉작으로도 익숙한 샹탈 애커만은 그간 서울여성영화제 등을 통해 꾸준히 소개됐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영화적 내러티브와 기술을 통한 실험으로 점철된 그의 필모그래피 중 ‘디아스포라’를 키워드로 묶을 만한 작품만 모았다. <남쪽> <국경 저편에서> <저기> 등 물리적, 심리적인 경계를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사건, 불안에 대한 영화들이다.

지난해와 올해, 아이공에서 강연회와 특별전을 가지기도 했던 찐민하의 작품은 모두 세편이 소개된다. “묘사적이지도, 설명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방식으로 아프리카의 낯선 문화를 탐구하는 <벌거벗은 공간: 지속되는 삶>, 현대사에 걸친 베트남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자료영상 사이로, 다양한 프레임과 분위기로 촬영된 베트남 여성 다섯명과의 인터뷰가 이어지는 <그녀 이름은 베트남>, 미야자와 겐지의 소설에 대한 오마주로 <은하철도 999>식의 몽환적인 로드무비인 <밤의 여로> 등 장르도 화법도 저마다 다르다. 이를 관통하는 것은 주류에 대항하는 총체적인 대안으로서의 화법에 대한 고민. “여성에 대한 이미지와 현실이 있다. 때때로 그 둘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녀 이름은 베트남> 속 코멘트는 1세계에서 살아남은 3세계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실천가로서 찐민하의 변함없는 화두일 것이다. 끊임없이 겹치는 그녀들의 목소리는 베트남 사회 속 여성에 대한 고민과 하나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을 거쳐, 같은 대상을 일컫는 서로 다른 단어에 대해 고찰한다. 이 모든 인터뷰가 연출된 것임이 드러나는 엔딩 크레딧에 이르면 그녀들의 고민이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음을 알 수 있다. 재미 삼아 제공하는 뜬금없는 팁 하나. 전형적인 동양의 기담 구조를 띤 <밤의 여로> 속 주인공 친구의 이름은 나비로, “한국어로 butterfly라는 뜻”이라는 대사까지 등장한다.

15살 때부터 아버지가 선물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자신을 드러내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익힌 사디 베닝의 단편 12편은 16살부터 25살까지 그녀가 걸어온 개인적인 영화적 사고의 궤적이다. “나는 내가 뼛속까지 퀴어라는 걸 알게 되었다”라는 단호한 코멘트로 막을 내리는 <졸리스>는 17살 소녀가 비디오로 써내려간 일종의 ‘성정체성 자각기(記)’이다. 간절한 구애와 이에 대한 거절이 내레이션과 휘갈긴 글씨의 자막으로 오가는 <나와 루비프룻>은 ‘자각된 성정체성이 겪는 최초의 사회적 좌절기’라 할 만하다. 김경묵 감독의 <나와 인형놀이>의 원전 혹은 ‘언니 영화’ 정도로 설명될 수 있겠다. 성조기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미소 짓는 백인 소녀의 얼굴 위로 “어릴 적 할머니는 내가 저 백인 소녀처럼 되기를 바랐다”는 내레이션이 흐르는 <사랑스러운 곳>은 폭력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18살 베닝의 화두이다. 여성 밴드 ‘쥴리 루인 밴드’의 뮤직비디오에 해당하는 <에어롭사이드>는 여성에 대한 오해와 비하를 당연시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까지 눈을 돌린다. 뮤직비디오 형식을 취한 다른 작품들도 주목할 만하다. 배회하는 개들마냥 동네를 소요하는 청춘들의 모습과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생생한 <저먼 송>은 보스턴 출신 얼터너티브 밴드 ‘Come’의 음악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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