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문성근] 이제는 ‘나 많이 할래’가 됐다
2008-11-26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작은 연못> <자명고> 출연하는 문성근

시작은 문득, 이었다. 마감을 끝내고 술자리에 둘러앉아 다음주엔 누굴 인터뷰할까 고민하던 차에 문득 문성근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말했고, 모두들 궁금하다고 했다. 문성근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혹자는 좀처럼 출연하지 않던 드라마에 연이어 얼굴을 보인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다. <실종> 현장에 다녀왔던 기자는 할 말이 굉장히 많은 것 같았다고 전했다. 누군가는 <수>에서의 가성 연기가 대단하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강우석 감독의 <강철중: 공공의 적1-1>에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내년 전주국제영화제 삼인삼색에서 선보일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 중일 것이라는 누군가의 전언까지 들었을 때, 배우 문성근이 그 어느 때보다 연기에 욕심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 다음날 인터뷰 제안을 위해 수화기를 들었고, 그는 전주에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형 잠깐만!”이라는 홍상수 감독의 목소리가 수차례 들렸고, 결국 인터뷰는 빡빡한 촬영 일정을 감안해 1주일 미뤄진 뒤 이뤄졌다. 홍대 앞 카페에서 만난 문성근의 표정은 지쳐 보였으나 이상하게 생기가 돌았다. 또 근심없이 밝았다. 대화 도중 그는 “요즘처럼 사람들이 예쁘고 인물들이 재밌었던 적이 없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등산복 차림으로 올 줄 알았다.
=인터뷰 전에 약속이 있어서. 안 그랬으면 등산복 차림으로 왔겠지.

-매니저와 함께 다닌 게 언제부턴가.
=1년쯤 됐다. 보람영화사 이주익 대표가 불편해 보인다며 ‘같이 합시다’ 하더라.

-그간 일정 보면 매니저 없이는 소화가 불가능했을 것 같다.
=일이 꼬여서. SBS 드라마 <신의 저울>을 7월 중순부터 찍었는데, 지난해부터 이야기했던 영화 <실종>하고 케이블드라마 <크라임 시즌2>가 공교롭게 그때 들어가게 됐다. <크라임 시즌2>는 내가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작사가 방송사와) 계약을 해서 어쩌지 못했고. <실종>은 내년이라도 약속 지킬 때니까 걱정 말라고 했는데 제작자인 조선묵이나 김성홍 감독이 몸이 달았던 거지. 안 들어가면 흔들릴 것 같고 불안하니까. 여기에 극단 차이무의 <변> 지방공연까지 겹쳤다. 10월 중순까지 넉달 동안 완전 파김치였다.

-역할을 오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하루는 검사(<신의 저울>)하고 하루는 변호사(<크라임 시즌2>)하고 또 하루는 연쇄살인범(<실종>)하고. (웃음) 그리고 또 하루는 변학도(<변>)로 가야 하니까. 잽싸게 변신하는 스릴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억지고. 피곤하지. 정상적으로 그 인물을 살아냈나 싶고.

-드라마는 이전엔 거의 안 찍었다.
=<까레이스키>(1996) 때 잠깐 나왔는데 그건 강제징집당한 거고. 장수봉 PD는 배추장사하면서 학비 벌었던 양반인데 나 대학 시절 연극할 때 배추 팔고 남은 돈으로 술 사줬던 분이라서 어쩔 수 없이 차출됐다. 정식으로 한 것은 그전에 이진석 PD의 <우리들의 천국>(1990)이랑 그전에 황인뢰 PD의 <천사의 선택>(1988)이 전부인 것 같다.

-영화만큼 드라마 제작 시스템도 많이 바뀌었을 텐데.
=풀 HD카메라니까 영화보다 화면이 더 노골적이다. 현장의 모니터가 너무 쨋쨋해서 많이 놀랐다. 홍창욱 PD(<신의 저울>)가 우리집에 놀러온 적이 있는데 TV를 보고 까무라치더라. 1992년엔가 산 것인데, 그걸로 어떻게 모니터를 할 거냐고 놀리잖나. 결국 HD모니터를 하나 사서 걸었는데 화면이 충격이더만. 배우들이 왜 주사 맞고 얼굴 당기는지 알겠더라니까.

-주사 맞고 얼굴 당겨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멕 라이언도 당겼는데 잘못됐다면서. (웃음) 어디 문상 갔는데 누가 나를 뜩 하고 보더니 얼굴에 덮어쓰는 거, 거 뭐지? 아, 팩. 그게 배우 얼굴이냐면서 팩을 사준 적이 있다. 화면 보면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되긴 한다. 촬영하면서 팩을 한두번 했는데 끝나니까 또 안 하게 되네. 나이 먹는 대로 사는 거지, 뭐.

-드라마 제안을 거절했던 이유는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 때문이었다고 말해왔다.
=시청자가 극중 인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이 알고 싶다>의 문성근이라고 먼저 받아들이니까. 방송 드라마의 빠른 제작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고.

-<그것이 알고 싶다>에 대한 애정은 남달라 보인다.
=퍼스낼리티 프로그램 포맷은 처음이었고 그게 이후 방송의 한 가지 스타일이 됐으니까. 내가 만들었다고 할 순 없지만 연기와는 다른 재미가 있다.

-바른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영화할 때는 일부러 센 악역을 찾으려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92, 93년에 방송하고 나서는 의도적으로 그런 적이 있다. 하지만 98년에 복귀할 때는 그런 이미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겠다 싶었다. 나를 캐스팅하려는 누군가가 특정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고.

-<신의 저울>을 뒤늦게 챙겨 봤다. 대쪽 검사가 살인을 한 아들 앞에서 자신의 아버지 이야길 하면서 눈물을 보이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 회고장면을 보면서 문득 고 문익환 목사가 떠올랐다. 그 장면 연기할 때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흐느낀 것 아닌가 하고.
=이전에 문목(아버지 문익환 목사)이 할아버지 이야길 한 적 있다. 방 안에서 불 꺼놓고 혼자 우는 장면을 보고서 너무 슬퍼서 자신도 따라서 울었다고. 실제 대본이 나왔을 때 문목이 일러준 그 상황이 떠올라서 작가와 감독에게 이야길 했다. 그게 어느 정도 대본에 반영됐다. 연기할 때는 극중 상황에 기대서 한 것이지만.

-어디서 보니까 <한씨연대기> 공연 때 아버지(문익환 목사) 생각을 하면서 울었다고 말하면서 ‘이건 진짜 연기가 아니지요’라고 연출가에게 물었다던데.
=아마 김석만 연출가가 글을 썼던 모양인데, 난 잘 모르겠다. 여튼 내 딸도 그걸 물어본 적 있다. 배우가 극중 인물의 상황과 다른 상황을 가져다가 써도 되는 것인가. 어떤 배우도 자기 친척이 돌아가셨는데 슬퍼서 막 울다가 어느 순간 ‘아, 이 감정을 기억해야지’라고 그러는 자신을 보고 굉장히 죄스럽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르고 따질 문제는 아니다. 연기자의 직업비밀에 속한다고 봐야겠지.

-눈썰미가 예리한 감독들과 많이 작업해왔다. 관객으로서 영화를 볼 때 홍상수의 문성근과 이창동의 문성근과 강우석의 문성근에서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
=일단 내가 출연한 영화를 시사 때 한번 보고 안 본다. 괴롭거든. 장 가뱅(프랑스 영화배우)은 한번도 안 봤다잖아. 나는 소심해서 한번은 보는데, 찍던 순간의 감정 상태가 다시 되살아나기 때문에 별로 유심히 안 보게 된다. 그러니까 저 인간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나 하는 게 눈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배우라는 직업이 흥미로운 건 작품별로 인생이 끊긴다는 거다. 인생의 장이 넘어간다고 할까. 넘기면 기억도 사라진다. 현장에서도 난 내 연기에 대해 불만족을 강하게 갖는 편이라 되돌아볼 여유가 없다.

-어떤 불만족인가.
=인물에 대한 몰입도라고 해야 할까. 그 면에서 허점이 자꾸 보여.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인가.
=그렇지. 연기는 나이먹으면서 발전하는 게 아니다. DNA에 찍힌 부분이 많다. 그거 갖고 넓혀가는 거지. 그래서 광대(廣大)잖아. 다양한 변주가 가능해야 하고 그 안에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인데, 기분 좋게 연기했다고 하더라도 조금 지나서 보면 저 새끼 저기서 걸렸구나, 막혔구나 하는 게 보인다. 그 불만이 연기의 재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은 불만이 덜하다. 나로부터 굉장히 먼 것을 요구하지 않거든. 같이 하기로 결정한 나 자신의 현재 상태에서 그대로 하면 되니까. 인물을 만드는 데 있어서 부담이 없다.

-나를 모두 드러내야 하는 부담도 있지 않나.
=그전에 세상을 바라보는 홍상수의 안테나를 존중한다. 공감하지 않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가 다른데 그걸 지켜보는 게 재밌다. 허망하고 우스운 인간들의 모습을 파고드니까. 배우에게도 강요한다기 보다 가장 편안한 상태로 유도를 해서 그걸 그대로 담는다. 연극 출신이라 나 또한 신을 잘라 쓰는 게 싫은데 홍(상수)은 길게 찍기 좋아하니까 편하다. 힘든 건 술 마셔야 한다는 거.

-이번(2009년 전주국제영화제 삼인삼색 상영작인 홍상수 감독의 <첩첩산중>)에도 많이 마셨나.
=곧 <자명고>라는 사극에 출연해야 해서 임플란트를 했다. 원래 크게 웃으면 금니가 보인다. 그런데 왕이 금니를 끼웠을 리 없고. 그걸 빼고 사기로 갈아끼웠는데 그 와중에 치아 뒤가 흔들렸다. 병원에 갔더니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수술했다. 그리고 나오는데 의사가 3주 동안 술·담배를 하지 말라잖나. 곧바로 홍(상수) 감독한테 전화했다. 홍 감독 알잖나. 술 마시는 장면에서 술 먹이고 찍으니까. <오! 수정> 때도 망가지는 꼴을 기어코 보려 하니까 힘들었다. 본인은 천천히 오랫동안 취하는데, 나는 안 취하다가 갑자기 졸도한다. 이번에 술 마실 거면 못하겠다고 했는데, 요번에는 ‘안 마시고 찍읍시다’라고 해서 했지. 결국 나만 안 마시고 (이)선균이랑 (정)유미만 마셨다.

-무슨 역할인가.
=교수. 전주에서 돈 받았으니까 전주대학교 교수지. (웃음) 소설가로 유명하고. 그 교수랑 제자 세명이 나온다. 정유미는 예전에 연애했던, 김진경은 요새 연애하는 여자. 나랑 정유미가 끝난 다음에 정유미는 이선균이랑 사귀었는데 이선균은 그 뒤에 한참 떠나 있었고. 그런 네 남녀가 전주에서 만나 얽히는 이야기다.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촬영 일정이 빡빡해 보이던데.
=홍상수는 전염성이 강하다. 주변을 다 그렇게 만든다. 그 안에서 젊은 후배들의 개성이 더 잘 보이더라. 짧은 문장으로 모든 답변을 끝내는 유미도, 따박따박 정확한 진경이도, 선명하게 잡히지 않는 선균이랑 즐겁게 어울릴 수 있었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예뻐 보일 때가 없다.

-돌이켜보면 문성근이라는 배우는 늘 혼자였다. 유사 경로를 거친 경쟁자가 없었다. 부쩍 사람들이 예뻐 보이는 건 외로움과도 관련이 있을 텐데.
=영화로 처음 넘어왔을 때 박광수 감독한테 연극배우들 중에 괜찮은 친구들이 많다고 했다. 그랬더니 차라리 길가는 사람을 캐스팅하지 왜 연극배우 쓰느냐고 하더라. 번역극의 이상한 대사투가 싫었던 거지. 물론 연우무대의 사실적인 연기 패턴 덕에 그 이후 (송)강호든, (설)경구든, (유)오성이 영화에 왔지. 장진 사단의 배우들도 그러하고. 연배도 비슷하고 뿌리도 비슷한 친구들이야 서로 통할 수 있는데, 나야 없으니까 좀 외로웠겠지.

-돌이켜보면 외로움이 독이었나 약이었나.
=시행착오들을 쉽게 빨리 덜 수 있었을 텐데 싶다. 보고 배우면 낫지 않았겠나.

-영화계 안팎의 일에 활동적이었던 것도 배우로서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텐데.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이든 영진위 일이든 연기자로서는 손해보는 일이었다. 노사모 활동도 그렇다고 봐야 하고. 하고 싶고 또 해야만 할 일들이라면 가장 좋겠지만, 하고 싶지 않은데 해야 할 일들도 있다. 그 일들이 그런 경우에 속할 거다. 나로서는 최선을 찾아서 움직였다고 보지만, 배우로만 놓고 보면 방해라고 볼 수도 있겠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기 위한 목표치가 낮아졌으니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일이 실제 하고 싶은 일 아니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걸 내가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박재동 화백이 어디엔가 문성근에 관해 쓴 글을 보니 정치를 하면 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문익환 목사가 했다던데.
=전해 들은 적 있다. 면회 갔을 때 주변 정세 전하면서 이번에는 한 2년 사실 것 같다 그랬는데 그때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인사들이 대거 구속됐을 때 구속자 가족들을 대표해서 뒤치다꺼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썼던 문건들을 나중에 DJ가 보고서는 비서진을 통해서 정치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정치에 뜻이 있었더라면 그때 했겠지. 정치라고 하면 개차반이라 부르고 불신하지만, 엉망진창인 것 같아도 철저하게 두루 공부해야 하는 분야다. 정치인 말고 정치부 기자를 하라고 했으면 또 모르겠다. (웃음)

-정치 참여는 권리를 넘어 의무라고 했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구상하고 있나.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한 공화국에서 시민의 정치참여는 의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시민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참 어렵다. 오해를 받게 되고, 정작 그로 인해 본업을 못하게 생겼으니까.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연기자로 남겠다고 한 거지. 정치 이야긴 그만 하자.

-영화계로 논의를 좁혀보자.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한국영화가 좋은 국면은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아쉽고 생각난다. 첫 번째는 99년이다. 당시 산업자원부에서 추진하던 투자조합 사업을 영화계에 도입했다. 당시 CJ는 CGV에 주력하던 때라 아직 본격적인 힘을 발휘하기 전이었고, 강우석 감독이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과 손잡으면서 독점 체제를 구축했다. 강 감독의 독주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그때 주요 제작자들을 만나 투자조합 사업을 설명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강우석 감독의 독점을 견제할 투자·배급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잘되지 않았다. 또 하나는 2001년쯤이다. 공정 경쟁을 위한 비공식 모임을 열었는데 바깥에서 메이저들끼리 다 해먹겠다는 것이냐는 근거없는 비난이 쏟아져서 ‘에잇, 나 안 해’ 하고 손 뗐다. 세 번째는 프리머스가 CJ로 넘어간 것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 감독이 프리머스를 공기업 형태로 남겨두겠다고 했을 때 개인적으로 프리머스 체인을 바탕으로 부율 조정 등 당시 현안을 해결할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고, 영화인들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공격받더라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어야 했는데 하고 자책한다. 마지막으로는 스크린쿼터다. 참여정부 시절에 그렇게 축소된 것이 먼저 안타깝고 아쉽다.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발표 이후 영화계 안팎에서 투쟁이 전개되는 동안 문성근, 명계남은 어디에 갔느냐는 힐난도 적지 않았다. 특히 보수단체와 언론에선.
=스크린쿼터 축소 발표 몇달 전에 영화인들과 문화관광부 사이 협상 테이블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정부 부처들에서는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몇년 동안 40%를 넘었다는 이유로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스크린쿼터는 한국영화의 와이드 릴리즈 배급과 함께 외화의 시장 지배를 효과적으로 방어해냈는데,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면서 작은 한국영화들의 입지가 줄어드는 상황이 발생했다. 문화다양성을 위한 스크린쿼터 제도가 현실에선 문화다양성에 해를 끼치게 된 거지. 이를 감안해 당시 협상 테이블에선 한국영화 스크린쿼터 92일에 다양성 영화 쿼터 18일, 110일 운용안이 나왔다고 들었다. 2500억원가량의 정부 지원이 덧붙여진. 이후에 개인 자격으로 30, 40명의 영화인들과 함께 이 안을 두고 논의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스크린쿼터를 단 하루도 줄일 수 없다고 하는 것보다 우리가 그동안 싸워서 이겼다고 선언하고, 실제 110일이고 하니 감경일수를 감안한 종전 106일 스크린쿼터보다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영화산업에 미칠 영향도 크지 않다고 했다. 대신 굉장히 크게 양보하는 것처럼 제스처를 취하되 이후 더 줄일라고 치면 사생결단으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반대 의견이 컸다. 스크린쿼터 싸움을 치러 오면서 이미 한국은 문화다양성을 위한 투쟁의 상징국이 돼버린 측면도 있었고. 결국 영화계가 단일 의견을 낼 수 없는 것으로 정리를 하면서 더이상 이와 관련된 발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축소 발표 이후에는 영화인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내가 나서서 김뺄 이유도 없고. 다만 영화인들과의 자리에서 인신공격을 당하기도 했는데 참담했다. 나름 영화계를 위해 일해왔는데 이렇게 당하는구나 싶었다.

-<작은 연못>과 <실종>은 후반작업 중인가.
=<작은 연못>은 CG작업 중이다. 내년쯤 개봉하지 않을까 싶다. <실종>은 믹싱 중이고. 이창동 감독 표현에 따르면 캐릭터 잡는 건 (앞 못 보면서) 문고리 잡는 것이라고 했는데. <실종>의 연쇄살인범은 도대체가 상상이 안되는 인물이라서 불안하더라. 이기적인 쾌락과 욕망에 사로잡혀서 나머지는 안중에 없는 인물인데, 내가 먹물이라서 그런가. 그걸 찍으면서도 이런 인물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공동체가 잘 굴러갈 수 있을까 싶더라니까.

-<자명고>는 언제부터 촬영에 들어가나.
=다음주부터 시작이다. 고구려 대무신왕으로 나온다. 호동왕자의 아버지다. 이전엔 수염 붙이기 싫어서 사극 안 했다. 수염이 꼭 나야 하나. 실제 난 수염이 안 나거든. 정형화된 분장, 문어체의 대사투도 싫고. 이전에는 그래서 무조건 ‘나 안 해’였는데, 이제는 ‘나 많이 할래’가 됐다.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모든 사람이 예쁘고, 모든 인물이 다 재밌다. 다 할래라고 하니까 또 고민이 생기기도 한다. 말투는 어떻게 하나.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한문투로 모든 대사를 치려고 생각하니 머리에 쥐가 나기도 하고. <왕의 남자>처럼 한문투 버리고 가면 좋은데. 또 사극 보면 왕들이 다 소리지른다. 내가 보기엔 발성이 제대로 됐을 리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왕자였던 이들은 모두 골골하다. 왕이 오죽 먹었겠나. 전날 숙취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가 있었겠어. 왕의 사망원인 1위는 성병이고 2위는 치통이다. 마이신이 없으니까 이 썩어도 간다고. 세종도 당뇨였잖아. 어디 기록 보면 보료 위에 누워서 가운데 구멍 뚫린 대나무 통을 확성기 삼아 지시를 내리는 왕도 있었다. 누가 뭐라 하면 ‘씨발 그렇게 하든가’ 욕을 하는 왕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고 유영길 촬영감독이 이 말 들으면 그러실 것 같다. ‘니가 감독할 때 그렇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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