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전세계를 통틀어 3500개쯤 만들어진 전쟁영화들은 실제로 전쟁 중 있었을 법한 갖가지 인간 존재방식들을 보여준다. 전쟁이 터지기만 바라는 무기상(이른바 ‘죽음의 상인’), 전선의 참호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질려 머리를 감싸는 앳된 병사, “무조건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사령관 등 여러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이스라엘 출신 영화감독인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2008)이 보여주는 인간 군상은 40대 중년의 사내들, 그리고 바로 그들이 기억의 타임머신을 타고 20여년을 거슬러간 20살 안팎의 병사들이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정을 다룬 이 영화는 베이루트의 팔레스타인 난민수용소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벌어졌던 학살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류사의 부끄러운 기록 가운데 하나인 사브라-샤틸라 학살사건(1982년 9월16일)은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과 관련이 깊다.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전 이스라엘 총리)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무장게릴라 세력을 없애겠다며 베이루트를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기독교 민병대(팔랑헤당) 지도자 바시르 제마엘을 친이스라엘 꼭두각시 정권의 대통령으로 내세우려 했다. 그런데 제마엘이 대통령 취임을 바로 앞두고 암살당하자 기독교 민병대원들은 피의 복수를 바랐다. 저녁 무렵 150~200여명의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원들이 “팔레스타인 테러분자들을 잡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난민촌에 들이닥쳤다. 최소한 800명(팔레스타인쪽 추정은 3천명)이 희생됐고, 그중 절반을 넘는 수가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이었다.
26년전의 아우성을 전해주는 총탄자국
분명한 것은 학살사건의 배후에 이스라엘군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원들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들어가 학살극을 벌이는 동안 이스라엘 군대는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의 명령에 따라 (영화 끝부분에서 보듯이) 난민촌 외곽을 탱크로 둘러싸고 밤새도록 조명탄을 쏘아 올려 난민촌 주변을 밝혔다. 학살사건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매체를 타고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자 이스라엘 정부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샤론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때 조사단은 “샤론이 앞으로 공직을 맡아선 안된다”고 못박았다. 샤론의 정치생명은 끈질겨 20년 뒤 이스라엘 총리가 됐고, 팔레스타인 목조르기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200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지금은 식물인간이 돼 있다. 샤론에겐 ‘전쟁범죄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2001년 희생자 유가족쪽의 변호인단은 샤론을 벨기에 법정에 고소했다. 벨기에 국내법이 전쟁범죄에 대한 ‘보편적 사법권’(Universal Jurisdiction)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기에는 샤론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싱거운 판결이 내려졌다. 지금껏 그날의 학살 가해자들은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1982년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일어났던 학살이 중동의 정치지형에 끼친 영향은 컸다. 레바논에서는 반이스라엘 투쟁의 중심세력으로 헤즈볼라(우리말로는 ‘신의 당’, 지도자는 하산 나스날라 사무총장)가 바로 그 무렵에 결성됐다. 레바논 시아파 중심의 정치무장세력인 헤즈볼라는 이른바 자살폭탄테러(모슬렘들의 용어로는 ‘순교작전’)의 원조다. 1983년 레바논 베이루트 주둔 미 해병대 막사를 폭탄트럭으로 들이받아 미 해병대원 241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헤즈볼라는 팔레스타인 정치조직 하마스(1987년 결성)에 ‘순교작전’의 폭파기술을 전해주었다. 2000년 이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intifada, 봉기)에서 하마스가 벌인 잇단 ‘순교작전’들은 이렇듯 그 뿌리를 캐보면 1982년 난민촌 학살로까지 거슬러간다.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헤즈볼라 사이의 전쟁 회오리가 불고난 뒤 레바논 현지 취재 때 베이루트의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에 가보았다. 1948년 이스라엘이 중동 땅에 독립국가를 세우면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세운 곳들이다. 쓰레기 더미가 곳곳에 쌓여 악취를 뿜어내는 도시 빈민촌의 모습이지만, 골목길 담벼락 곳곳에 야세르 아라파트(팔레스타인 지도자, 2004년 사망)의 대형 초상화, 하마스 지도자들의 사진, 이스라엘군에 맞서 싸우다 죽은 ‘순교자’들의 포스터,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염원이 담긴 벽화를 볼 수 있었다. 일부 건물들 벽에는 총알들이 박혔거나 튕겨나간 자국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 자국들은 26년 전(1982) 이곳 난민촌을 휘감았던 아우성과 비명을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었다.
레바논도 이스라엘도 아쉬운 영화
학살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곳은 난민촌의 자그마한 추모공원이다. 이곳에서 만난 70대 초반의 한 팔레스타인 여인은 “죽은 남편과 세 아들의 얼굴이 꿈에 나타날 때마다 이곳에 오곤 한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난민촌 사람들은 당연히 이스라엘군이 학살을 부추기고 도운 공범이라 여긴다. 총상을 입고 살아남은 몇몇 남자들은 웃통을 벗거나 바지를 걷어올려 몸에 난 그날의 상처를 보여주며 “이스라엘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고, 살인교사라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우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은 뭔가 밝힐 듯하다가 그만둔, 한마디로 허탈한 느낌을 주는 영화일 것이다.
레바논 사람들 역시 이 영화에서 아쉬움을 품게 마련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레바논인들의 정서는 좋지 않다. 20세기 후반 들어 네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 과정과 맞물려 거듭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탓이다. 레바논과 이스라엘은 국경이 맞닿아 있어도 외교관계는 없다. 시아파, 수니파 가릴 것 없이 레바논 모슬렘들은 이스라엘에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레바논 기독교인들은 모슬렘들보다 적개심은 덜하더라도 이스라엘을 ‘적국’으로 여기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2006년 여름엔 34일 동안 이스라엘군의 마구잡이 공습을 겪으면서 1100여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이렇듯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레바논 사람들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을 본다면 집단학살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좀더 분명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영화에 대해 평은 엇갈린다. 보수우파적인 유대인들은 “영화감독 아리 폴만이 조국 이스라엘을 지키려다 전사한 유대인들의 명예에 흠집을 냈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폴만을 ‘배신자’라고 몰아세울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우리와 이웃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다. 중동 땅을 ‘하느님이 약속해주신 땅’이라 우기기보다는 이른바 ‘땅과 평화의 교환’(팔레스타인에는 그들이 바라는 독립국가를 세우도록 해주고,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은 평화를 얻는다는 입장)이 합리적이라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1996)의 길을 연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이 중동평화의 서막이라고 박수를 쳤던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골수우파들은 이들을 가리켜 ‘좌파’라 부르지만, ‘좌파’들은 스스로를 ‘합리적 평화주의자’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들 ‘합리적 평화주의자’들이 다수가 아니고 소수라는 점이다. 이들 ‘좌파’들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을 본다면 팔레스타인이나 레바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엘 샤론의 전쟁범죄를 직접적으로 고발하지 않았다”고 비판을 가할 것이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를 만든 폴만 감독은 좌우로 갈려 갈등을 거듭해온 이스라엘의 미묘하기 그지없는 정치지형에 신경을 쓴 나머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제대로 다 전하지 못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