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의 배우스케치]
[듀나의 배우스케치] 박재정
2008-12-05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저는 지금부터 제가 쓰는 글을 반어법적 농담이나 야유로 이해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거부합니다.)
처음엔 전 박재정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너는 내 운명>이 시작되었을 무렵 그의 ‘발연기’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KBS1의 오후 8시30분 일일연속극에서 허우대 멀쩡한 젊은 남자 배우가 발연기를 선보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그게 일종의 의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야 진짜 주인공인 여자배우가 더 살지요. 괜히 그 자리에 신인을 쓰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몇 개월 지나다 보니 소문의 종류가 다릅니다. 인터넷이 움짤과 플짤이 하나둘씩 올라오고 그에게는 발호세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궁금해진 저는 인터넷 소스들을 하나씩 챙겨봅니다. 그리고, 네, 고백하겠습니다. 전 그 발호세(또는 호세 레저)의 연기에 매혹되었습니다. 그건 내가 지금까지 익숙해져있던 KBS 일일연속극 발연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박재정의 연기는 그냥 나쁜 것일까? 물론 기술적으로는 좋지 않습니다. 발성이 흐릿하고 동작은 어색하고 늘 지나치게 긴장한 티를 내지요. 네, 서툰 연기 같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냥 서툰 연기가 아닙니다. 박재정의 연기는 서툴지만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만의 퀄리티가 있습니다.

플짤로 유명한 ‘바람처럼 쓰러지는 호세’ 또는 ‘다리 힘 없는 젊은이’ 클립을 예로 들죠. 사실 이 장면의 인위성은 박재정의 책임이 아닙니다. 멀쩡하게 건장한 젊은이가 아저씨 따귀 한대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넣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거죠. 하지만 일단 박재정의 연기가 들어가면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가 생겨납니다. 캐릭터의 어쩔 수 없는 어설픔이 무용처럼 체화되어 표현적인 동작으로 구현되는 것이죠. 아마 이것은 박재정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연기였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엔 머스 커닝엄의 춤과 같은 예술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죠, 결과가!

그의 다른 플짤들 그러니까 어색하게 걷는 호세, 미친 개에 쫓기는 호세, 호세 토닉, 정직하게 분노하는 호세, 술 취한 채 절하는 호세, 새벽 호세와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로 중독성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로 엮어서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접했던 진부한 재벌 2세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어떤 초상이 그려지지요. 그런 진부함을 보기엔 박재정의 독특하게 긴장된 모습이 너무나도 진실되고 독특해 보이는 것입니다. 강호세는 인위적이고 어색하고 조작되어 있을수록 더 진짜 같아요. 이런 경우를 다른 연속극에서 보셨나요. 전 기억 안 납니다. 정말 특이한 경우예요.

사실 박재정의 연기는 드라마 내에서 보면 플짤보다 덜 재미있습니다. 일단 드라마가 재미가 별로 없지요. 그리고 그의 연기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면 플짤 때보다 덜 어색하고 더 정상적입니다. 호세 플짤은 박재정과 그의 독특할 퀄리티를 제대로 감지할 줄 아는 심미안을 가진 팬들의 합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진부한 드라마와는 품격부터 다른 독특한 예술품으로 완성되지요. 호세 토닉 플짤을 무한반복해보셨나요? 스티브 라이히의 음악 뺨칩니다.

과연 이런 것들을 만든 사람들은 자신을 팬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안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박재정의 연기가 <너는 내 운명>의 유일한 그리고 아마도 진정한 재미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너는 내 운명>이 끝나면 가장 아쉬워할 시청자도 그들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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