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역사적 유희라는 모호한 실험
2008-12-18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퓨전사극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1724 기방난동 사건>이 남긴 아쉬움

그 영화가 맺고 있는 맥락 안에서 의미를 건져올려야 하는 영화들이 있다. 여균동의 여섯 번째 영화 <1724 기방난동사건>이 바로 그렇다. 여기서 살펴볼 맥락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장르적 성격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감독의 전작들이다. 이 영화는 퓨전사극에 대한 통념과 여균동의 영화세계라는 레퍼런스를 염두에 두어야만 논의의 장이 열린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CG를 비롯한 기술적인 실험이나 배우들의 변신에 대한 호의적 평가 혹은 단순히 조선시대로 무대만 바뀐 헐렁한 서사의 조폭영화라는 비난 이상의 언급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럼, 맥락 안에서 이 영화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이 영화가 퓨전사극이라는 용어에 대한 통념을 극단까지 밀어붙였으며, 달리 말하자면 ‘역사’를 소비하는 대중문화의 지평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한국영화 감독 중 유난히 자의식 강한 메타영화를 만들어온 여균동의 영화세계가 한 사이클을 돌아 새로운 원점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여균동만이 아니라 자기 반영적인 영화를 생산하는 일군의 감독들이 어떻게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는 어떻게 성공하고 실패하는지 생각해볼 화두를 던져준다. 이 글에선 <1724 기방난동사건>이라는 영화가 역사를 전유하는 태도와 자의식을 버리고 유희성을 획득하려한 감독의 의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상상력을 위해 역사를 차용한 발상의 전환

<1724 기방난동사건>에서 1724는 특정 연도이다. 1724년은 숙종의 맏아들인 조선 제20대 임금인 경종이 승하한 해이자 영조가 즉위한 해이다. 생모인 장희빈보다 훨씬 인지도가 떨어지는 경종은 재위기간이 4년에 불과해서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1724년을 굳이 영화에 표기할 필요는 없었다.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당파싸움으로 정국이 바람 잘 날 없고 고위관료의 매관매직이 성행한 부패한 시대라는 영화 속 설정은 이미 관객에게 익숙한 것이다. 관객은 1724라는 숫자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일부러 특정 연도를 언급한 이 영화의 제목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역사’를 소비하는 방식을 시사한다.

이 영화에서 역사는 일종의 영화적 세트다. 마치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2001년이 ‘미래’를 지시하는 숫자적 상관물이듯 1724년은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과거’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SF물에서 제시되는 미래가 2001년이든 2030년이든 숫자와 상관없이 표상하는 세계가 비슷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1724라는 숫자 자체에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대중화된 용어 퓨전사극은 고증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운, 현재적인 관심사를 과거에 투사하는 사극이라는 정도의 통념을 담고 있다. 이는 문서화된 역사라는 것이 결국은 언어적 집합체라는 인식과 사실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역사관이 투영된 문화적 산물이다. 퓨전사극은 역사에 자유로운 상상력을 부여하며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소비해왔다. 2000년 이후 퓨전사극의 갈래를, 역사서에 기록된 인물이나 사건을 포함하는 <황산벌>(2003) 계열과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지만 충분히 역사적인 맥락에서 소구될 수 있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 계열로 나눌 수 있다면, <1724 기방난동사건>은 이 둘에서 벗어나 있다. <황산벌> 계열이든 <스캔들…> 계열이든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과거는 분명 역사적인 시공간이었다. 코미디라는 선입견을 벗어버리고 보면 <황산벌>은 의외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상당히 충실히 따라가고 있고, <스캔들…>은 구체적 연도가 표기되지 않았지만 근대적 사유가 틈입하는 조선 후기가 시대적 배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홍보 카피가 말하듯 ‘익스트림’하게 자유분방한 <1724 기방난동사건>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위해 역사를 차용하는 발상의 전환을 이룬다. 이제 과거라는 시공간은 이색적인 세트일 뿐이다. 그래서 앙드레 김 의상을 입고 나와도 문제될 것 없고, 성정체성을 커밍아웃한 홍석천이 등장하여 개인적인 특성을 살린 촌철살인 대사를 날려도 이상하지 않다. 콤플렉스의 화신 김석훈이 희한한 표정으로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살다간 흔적일랑 남겨둬야지”라는 조용필 노래 가사를 읊어도 놀랍지 않다. 이 모든 것은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는 직격탄이다. 여기서 순수한 의미의 과거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적인 관점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게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선형적인 시간 개념 자체가 와해된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익스트림 퓨전사극이다.

너무 익숙한 것들이 조합된 스토리

역사의식에 대한 강박을 벗어버리고 퓨전사극이 얻은 것은 유희성이다. 퓨전사극은 과거를 배경으로 연애 게임을 하고(<스캔들…>), 전쟁터를 욕설 배틀장으로 만들고(<황산벌>), 아예 놀이판을 끌어들여 놀이의 본질을 묻고(<왕의 남자>), 현실과 소설의 줄타기를 실험(<음란서생>)한다. 그런데 유희성의 절정을 이룬 <1724 기방난동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추상적인 유희를 하고 있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구체성이 없다. 너무 익숙한 것들의 조합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부패한 사회라는 설정은 일종의 클리셰다. 1940년대 필름누아르의 세계와도 다를 바 없다. 관직을 뒷거래하고 그 대가로 돈을 챙기는 세도가가 검개(조폭) 조직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전국의 주류유통권을 준다, 이 정도의 설명은 누구나 상상하는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조폭영화라기엔 너무 엉성하다. 흥행한 조폭영화는 이런 추상적인 정보 차원보다는 훨씬 정교한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다. 여자 조폭의 사생활을 상상하고 명문대 출신 일반인과 혼인을 설정하고 조폭보다 더 조폭다운 스님을 끌어들인 차별화된 구체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런 게 없다. 그 까닭은 여균동 감독은 조선시대 조폭영화를 만들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획 단계에서 그런 컨셉이 오고갔다 하더라도 감독의 무의식은 그것을 지향하고 있지 않았다. 감독이 진짜 원한 것은 순수한 액션과 로맨스다. <죽이는 이야기>에서 분열을 일으켰던 액션과 로맨스를 <1724 기방난동사건>에서 태연히 시치미 뚝 떼고 결합시켰다.

<세상밖으로>(1994)에서 출발해서 <1724 기방난동사건>에 이르는 여균동의 필모그래피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현실에서 허구로’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사이에 놓인 네편의 영화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진자운동이다. 이를 도식화하면, 허구(<맨?>)->허구+현실(<죽이는 이야기>)->허구(<미인>)->현실+허구(<비단구두>), 이런 궤적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세밀히 살피면 미묘한 변화들이 있다. 같은 허구라도 <맨?>과 <미인>은 블랙코미디와 멜로드라마만큼의 차이가 있고, 허구와 현실이라는 조합은 같지만 <죽이는 이야기>는 허구가 우세하고 <비단구두>는 현실이 우위에 있는 영화였다. 주인공이 영화감독인 <죽이는 이야기>(주인공의 이름부터 펠리니의 <8과 1/2>을 연상시키는 ‘구이도’였다)나 <비단구두>에서 여균동 자신을 연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적 판타지로 가득 찬, 영화가 체험할 수 있는 알레고리의 극단을 탐험한 <맨?>에서 감독은 직접 중요 인물로 등장한다.

순수한 서사, 참신한 허구 구축엔 실패

<1724 기방난동사건>은 순수한 허구의 세계를 추구한다. 양주골 짝귀라는 인물로 영화에 등장하는 여균동이 영화 초반 기절해서 영화의 끝에야 깨어나는 에피소드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창작물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려는 의식과 개입하고 싶은 무의식이 타협한 결과 기절한 채로 긴 시간 화면에 등장하는 것이다. 현실과 허구 사이를 끊임없이 오락가락하게 만들던 동력은 자의식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의도적으로 자의식을 억압한다. 아니면 양주골 짝귀가 그랬듯, 자의식을 잠시 기절시켰다. 이렇게 자의식을 포기하고 얻고자 한 것은 완벽한 허구의 유희다. 여균동은 관객이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즐거운가? 생각할 틈 없이 즐기기엔 구멍이 다소 많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조선시대 조폭 이야기라기엔 구체성이 결여된 추상적인 스토리이고, ‘사랑과 복수’라는 원형적인 화소만으로 관객을 매혹시키기에는 영화적 새로움이 부족하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퓨전사극 극단의 풍경을 보여준다는 것인데, 이것도 올해 방영된 <쾌도 홍길동> 같은 TV사극과의 공진화(co-evolution)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으므로 완전히 신선하지는 않다.

<1724 기방난동사건>은 한바탕 소동극으로 즐기기에 나쁘지 않지만 여균동의 영화세계로 보자면 답보에 가깝다. 이것은 <세상밖으로>에서 보여주었던 현실인식을 이 영화가 성취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비록 <세상밖으로> 이후의 영화들은 자의식 분열로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자의식을 포기하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이번 영화에서는 자의식을 포기한 대신 오락성이라는 목표를 확실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킬 빌> 같은 영화가 이루어낸 순수한 서사와 화끈한 영상의 화합을 제대로 성취하진 못했다는 데 있다. 허구라는 종착역이 문제가 아니라 그 허구가 얼마나 참신한가가 문제이다. 자의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어낸 성과로는 아쉬운 영화다. 현실과 허구의 진자운동을 끝내고 도달한 이곳에 구멍이 나 있다면 다음 행보는 다시 현실(구체성)에 접근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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