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 노동조합이 강한섭 영진위 위원장의 업무 방식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한국영화 대공황’ 등 적절하지 못한 발언으로 영화계 안팎에서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은 지 두달 만이다. 영진위 노조는 12월9일 ‘귀는 닫는다! 원칙은 없다! 결정은 내가 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영화계와 영진위 구성원을 배제한” 강 위원장의 독선적 태도는 준비된 ‘프로’가 아닌 불성실한 ‘아마추어’의 행태라고 비난했다. 노조와 함께 영진위 조직개편을 추진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추진 과정에서 이견이 발생하자 강 위원장이 영진위 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해당 사안을 처리했다는 내용이다.
영진위 노조의 비판은 강 위원장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조직개편으로 비롯됐지만, 실제 내용은 강 위원장의 실책으로 영진위가 지난 시기 표류했다는 지적으로 가득하다. 영진위 노조는 “(영화진흥)위원회의 핵심 사업인 다양성영화 복합상영관, 중형투자조합 등의 사업이 난항을 겪고 있는 까닭은 강 위원장의 독선 때문이라며, 강 위원장 스스로 “영화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통로를 차단하고 관계마저 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출범 당시만 해도 “비교적 무난한 인사”라는 영화계 안팎의 반응을 들었으나, 이제 4기 영진위는 내부의 신뢰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출범한 지 6개월이 넘은 지금, 영진위는 몇점짜리 성적표를 받아들었을까.
‘600억 영화펀드’ 장담 쉽지 않아
스타트가 늦었다면 열심히 뛰면 될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영진위가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만만치 않다. 12월15일부터 접수하는 중형영상전문투자조합 출자사업은 “안정적인 재원 조성을 통한 한국영화 투자·제작 활성화 도모”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시작부터 우려가 적지 않다. 한 영화인은 “투자작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5% 이상 출자 조합원의 직간접 관계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행위 등을 금지하는 조항을 만들었지만 이를 두손 들고 반길 투자자들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운용사 선정이야 예정대로 12월까지 이뤄질 수 있겠지만 이후 펀드 결성까지 낙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진위 600억 영화펀드 좌초위기’라는 언론의 예측도 중형영상전문투자조합 출자사업에 대한 영화계 안팎의 걱정을 반영한다. 영진위는 “향후 한국영화산업 활성화에 찬물을 끼얹는 악의적인 보도”라고 받아쳤지만, 해당 사업이 오랜 가뭄에 허덕이는 충무로에 단비가 될지에 대해선 장담하기 어렵다.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 속단할 수 없”으나 “600억원 규모의 영진위 펀드가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수준이 아니”며 “통신사들도 상반기 내에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일반 창투사들도 지금은 선투자 대신 결과물을 보고 돈을 넣는 분위기”라는 부정적인 견해가 적지 않다.
한 투자사 관계자는 “영진위의 중형영상전문투자조합 사업은 3기 위원회에서 디자인된 것”이라면서 “2년 전에 마련된 이 정책을 급변한 지금 시장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무리”라고 덧붙였다. 강 위원장은 그동안 영진위의 투자조합 사업이 한국영화 거품 양산에 일조해왔다고 말했지만, “그도 뾰족한 해법은 지니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이다. 그는 “제작비의 50% 이상을 직접 마련해야 하는 시장 상황에서 제작사는 엄청난 부채를 떠안고 있다”면서 “영진위의 중형영상전문투자조합 사업이 이를 단박에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집중적으로 난타당한 다양성영화 복합상영관 사업에 대한 영진위의 추후 대책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애초 “3기 영진위와 서울시는 올해 3월 각각 250억원을 투자하여 총 500억원 규모의 복합상영관을 건립키로 합의하고, 복수의 부지에 대해서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고 있었”으나, 4기 영진위가 “아시아무빙이미지센터를 건립하는 것으로 사업계획을 변경함에 따라” 관련 사업이 중단됐다. 이에 따라 2008년 복합상영관 예산은 물거품이 될 처지에 이르렀고, 국회 심의 과정 중인 2009년 영진위 예산도 전액 삭감됐다. “7개월이라는 시간만 무의미하게 허비하고 말았다”는 게 관련 사업에 대한 영진위 노조의 평가다.
복합상영관 사업 대책은 있는가
다양성영화 복합상영관 사업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독립영화 진영으로서는 강 위원장에 대한 불만이 더욱 높을 수밖에 없다. 한국독립영화협회 고영재 사무총장은 “국정감사 석상에서 강 위원장은 문화체육관광부와 긴밀히 협의해서 해당 예산을 확보하겠다고 했으나 이후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의문”이라며 “2009년 예산을 보면 공공성과 다양성에 관한 기존 원칙들이 영진위 사업 내에서 실종됐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영진위 관계자는 “올해 예산이 불용될 위기에 처했지만 환수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발전기금으로 환원되는 것”이라면서 “좀더 구체적인 계획안 수립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만 설명했다.
강 위원장은 다양성영화 복합상영관 사업을 두고 “사업 파트너인 서울시와 양해각서 한장 없었다”면서 이전 영진위의 준비 소흘을 질타해왔다. 하지만 7개월이 지난 지금, 4기 영진위가 서울시 등 여타 파트너들로부터 다양성영화 복합상영관 사업에 대한 어떤 확실한 답변을 들었는지 알 수 없다. 예산 확보 등과 관련, 영진위가 국회 등 정치권을 향해 적극적인 설득 작업을 벌이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 한 보좌관은 “의지가 있다면 국회쪽에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청할 수도 있을 텐데”라며 “국정감사 이후 해당 사업에 대해 영진위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4기 영진위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내년이 돼야 가능하지 않겠느냐.” 강 위원장 체제의 영진위에 대해 좀더 지켜보자는 견해가 없지 않다. 하지만 영화계 전체가 더듬이를 곤두세우고 주시하던 1기 때와 비교해도 4기 영진위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다. 뒷짐 지고 목청 높이면 아우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강 위원장을 비롯한 4기 영진위에 대한 영화계 안팎의 주문은 별다른 게 아니다. 뒷짐 풀고 악수하고, 목청 줄이고 귀를 열라는 요청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내년 또한 시비와 논란의 중심에서 영진위는 또다시 1년을 서성일지 모른다. 한국영화산업의 위기가 단독 드리블로 해결될 수 없음은 강 위원장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
영진위 노동조합 한인철 위원장 인터뷰
“신뢰 노력하면 적극 협력”
-강한섭 영진위 위원장을 겨냥한 두 번째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강 위원장은 진흥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영화계와의 관계를 풀지 못하고 대안없는 비난만 계속해왔다. 어려운 영화계에 영진위가 힘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내부적으로도 머리를 맞대야 할 시기이지만 강 위원장은 독선적인 결정으로 무리수를 두고 있다.-이번 성명서는 내부 조직개편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됐다. 애초 노사가 협력해 추진키로 한 조직개편의 원칙은 무엇이었나.
=조직개편은 강 위원장이 먼저 제안해온 것이다. 강 위원장의 설명이 궁색했지만, 4기 영진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는 그의 전제에 동의했고 우리도 도와줄 용의가 있다는 뜻을 수차례 전달했다. 협의 과정에서 강 위원장은 팀 수를 줄이겠다고 했다가 또 기능 조정만 하겠다고 했다가 우왕좌왕이었다. 조직개편의 목적이나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노조는 그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하기로 했다. 심지어 강 위원장의 인사권 주장을 대폭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선까지 물러섰다. 그런데 이후 강 위원장은 20차 영진위 회의에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불법적으로 무리하게 관철시켰다. 2층 회의실이 아닌 3층 영진위 위원장 방에서 말이다.-조직개편과 관련해 노조는 영화정책 개발, 진흥사업 기능 강화를 주장했던 반면 강 위원장은 경영평가, 기관장 평가 등을 위한 평가 업무 강화를 들고 나왔다고 했는데.
=노조는 어려운 영화계 상황에서 영진위가 얼마만큼 역할을 할 수 있는지가 경영평가와 관련된다고 봤다. 해야 할 일을 더 잘하면 긍정적인 평가는 당연스레 따라오는 것이다. 반면 강 위원장은 정부의 경영평가를 위한 준비팀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노조가 이런 강 위원장의 주장을 모조리 거부했던 것이 아니다. 노조와 사쪽의 조직개편안을 들여다봐도 크게 다른 바가 없다. 그런데 강 위원장이 대화를 거부하고 독선적으로 조직개편을 단행했다.-성명서에는 강 위원장을 비롯한 4기 위원회의 지난 6개월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담겨 있다. 내부 구성원으로서 강 위원장과 4기 위원회에 몇점을 주겠나.
=글쎄. 강 위원장과 만났을 때 이런 이야기까지 했다. 영진위 위원장이 되기 위해 10년을 준비했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준비한 것 맞느냐고. 10시간 혹은 10분이 아니냐고.-사퇴 요구까지도 생각하고 있나.
=강 위원장이 영진위를 제 궤도에 올려놓을 의지가 충분하다면, 또 영화계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우리는 적극 협력할 것이다. 하지만 칼자루를 쥐고 백기투항만을 외친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싸움을 진행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강 위원장이 독선을 거두고 노조의 대화 요구에 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