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소재로 한 방송 다큐는 이전에도 있어왔다. 그러나 극장용 다큐멘터리는 이번이 처음이다. <미안하다 독도야>는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독도를 지키려고 힘쓰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독도에 대한 사랑 이전에 미안함을 먼저 얘기한다. 영화의 메가폰은 <블루> <산책> <맨발의 기봉이> <식객> 등을 제작했던 지오엔터테인먼트의 최현묵 대표가 잡았다. “2002년 6월29일은 한·일월드컵 3·4위전이 열렸던 날이고 동시에 서해교전(제2연평해전)이 벌어졌던 날이다. 그날 <블루> 촬영차 진해 해군 영내에 있었는데 영내는 비상이 걸렸다. 그런데 바깥세상은 온통 잔칫집 분위기였다. 똑같은 젊은이들인데 누구는 이날 죽은 목숨으로 실려나오고, 누군가는 또 스포트라이트를 받더라. 기분이 묘했다.” 최현묵 감독이 독도 영화를 구상하게 된 계기다. NLL(북방한계선)에 대한 관심은 “주권, 영토, 영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섬” 독도로 가닿았고, 정부수립 60주년인 올해 개봉을 목표로 지난해부터 제작에 들어갔다. 최현묵 감독은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된 것 같았다.
-제작자가 아닌 감독으로서 영화 개봉을 기다리는 심정은 어떤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인 줄 알았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거다. 하겠다는, 꼭 해야겠다는 의지만으로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독도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생각을 굳힌 뒤 기획 단계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뭔가.
=막막했다. 독도라는 팩트는 있는데 접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니까. 정부 관계자도 아니고, 독도 전문가도 아니고, 국제법학자나 역사학자도 아니고. 그런데 그들의 시선이나 잣대로 만들어야 자극적이고 뭔가 충격적인 얘기가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구성안을 만들었는데 정보 프로그램, 교육용 프로그램, 비사를 파헤치는 방송용 다큐멘터리가 될 것 같아서 모두 접었다. 최종적으로는, ‘문제가 뭘까? 정부를 비판하는 것? 일본을 비판하는 것? 그러면 우리는 떳떳한가? 나는 당당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우리 얘기를 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독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집대성한 다큐멘터리는 이제껏 없었으니까.
-연출하면서 특히 신경 쓴 부분이 있었을 것 같다.
=두 가지다. 하나는 독도에 우리의 이웃이 살면서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겠다는 것. 또 하나는 독도를 세계에 알리려 하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자는 것. 예상보다 사람들이 독도에 이웃이 살고 있다는 걸 많이 모르더라. 김성도씨 부부가 독도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고, 돈 벌어서 자식 학비 대고, 손자에게 용돈도 준다. 그 손자는 방학마다 독도를 찾고. 이런 게 실효적 지배다. 또 100년 넘게 독도를 두고 내 땅, 네 땅 하는데 우리의 독도 운동이 올바르게 진행돼왔나 하는 의문점을 제기하고 싶었다. 우리끼리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외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주요 취재 대상을 독도를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리려고 하는 사람들로 삼았다. 내 아들을 부를 때 우리 집에서만 한글 이름으로 부르고 밖에서는 일본 이름으로 부른다면 어떻겠나. 그러면서 조용한 외교하고, 우리 땅은 변함없을 거라고 하고, 정부 탓하고, 일본 탓하고.
-말씀한 것처럼 영화는 조용한 외교를 비판하고 있다.
=우리 영화가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독도문제는 영토, 국가,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좋은 시금석인 것 같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백두산이 장백산이 된 지 오래고, 허리에선 NLL 문제로 북한과 싸우고, 아래로는 일본해,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우리 영토가 국제사회에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상당히 초연하다. 영화를 만들 때 정부, 관료, 시민단체의 변화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을 탓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시간도 없다. 그들이 못 지키면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도병, 의용수비대 같은 것도 있지 않았나. 영화에 나오는 ‘생존경쟁’ 학생들처럼 평범한 학생들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이 일반 관객과 국민의 눈높이일 거라 생각한다. 학생들이 변한 만큼만 영화를 본 관객도 변했으면 좋겠다.
-영화가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더 독한 장면들도 있었다. 서해교전에서 남편을 잃은 김한나씨를 남편이 전사한 그 장소에서 인터뷰했었다. 60일 넘게 수장된 남편의 시신을 바다에서 꺼내지도 못했는데 결국 이민을 갔다. ‘북한, 중국, 일본 등 우리가 준비하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고, 애국심에 호소하고 싶지 않아서 편집했다. 내레이션과 음악은 영화 자체가 잔잔하고 이웃들의 평범한 얘기라서 조금 동적으로 깔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홀로 아리랑> <아리랑> <애국가>를 썼던 것도, ‘그럼 이 음악 대신 어떤 음악을 쓰지?’라고 생각해봤을 때 좋은 대안이 없었다.
-6천명의 손도장이 찍힌 대형 태극기를 독도 앞바다에 띄우는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현장에서 뭉클했을 것 같은데 어땠나.
=동도 정상에서 촬영하고, 헬기 촬영도 하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느라 정신없었다.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고자 정작 거기에 젖지는 못했다. 또 ‘생존경쟁’ 학생인 지승이가 울었는데 카메라맨이 그걸 못 잡았다. 지승이가 약한 모습 안 보여주려고 한 것도 있고. 촬영하는 팀들 엄청 혼냈지. 그 모습 담으려고 여기 온 거 아니냐, 그럼 우리 CG 할 거냐 하면서.
-고생 많이 했겠다.
=물리적인 고생은 우리만 겪는 게 아니니까 괜찮았다. 제일 큰 고생이라면 무관심이다. 영화 만든다고 배급사에 있는 친구들 찾아가서 얘기하면 “왜요?”, “하던 일 하세요” 이런 반응이었다. 또 KBS, MBC, SBS가 독도에 입도해서 찍는 것과 우리같이 조그만 영화사가 들어가서 영화 찍는 것은 환경이 너무 다르다. 정부기관이나 인가해주는 분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부터 다르다. 또 아쉬웠던 건 우리가 인터뷰하려던 분들이 잘 안 만나줬다는 것. “그때 다 인터뷰해줬다”, “금전적으로 지원해달라고 해서 도와줬는데 영화로 만들지도 않더라”라는 반응들이었다. 우리보다 먼저 독도 관련 (극)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거다. 우리는 돈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다만 행정적 편의와 협조를 구하러 갔는데 말이다. 그런 마음고생들을 많이 했다.
-앞으로도 직접 독도 영화를 만들 의향이 있나.
=처음에 서경덕씨가 나한테 한 얘기가 있다. “대표님, 이 한편으로 끝내실 건 아니죠?” 난 사회운동하고 그런 사람 아니다, 팝콘 영화 만드는 사람이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답했다. 물론 서경덕 씨가 얘기한 것처럼 그런 마음은 늘 가지고 있다. 원래 꼭 하고 싶었던 독도 관련 프로젝트가 있는데 아마 다음엔 그걸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