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영상자료원에서 한국 무술영화열전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다. 아무래도 처음 갖게 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열악한 필름 보존상태에 슬퍼하며 김시현, 최영철, 박우상, 이혁수, 김정용, 남기남 같은 감독과 황인식, 황정리, 한용철, 바비 킴, 왕호, 거룡, 정진화 같은 추억의 배우들을 골고루 배치하려는 욕심이 컸다. 그러다보니 11편이라는 제한 속에서 부득이하게 빠지게 된 사람이 <흑룡강>(1976), <특명>(1976)의 김선경 감독과 또 한명의 짝퉁 이소룡인 여소룡이다. 황정리가 본명인 황태수로 출연하고, 왕호도 출연한 <흑룡강>은 다음 기회에 꼭 소개하고 싶은데 여소룡의 경우 프린트가 여의치 않아 전혀 소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이소룡 사후 <사망유희>(1978)를 마저 완성한 부산 사나이 당룡(김태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짝퉁 이소룡의 계보는 거룡, 여소룡(사진), 하종도 등으로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이는 바로 ‘Bruce Lee’가 아닌 ‘Bruce Le’라는 소심한 영어이름으로 등장했던 여소룡이다(하종도의 영어 이름은 ‘Bruce Lai’였다. -_-;). 단역 혹은 엑스트라로 활동하던 대만 출신 배우 이여룡이, 역시 홍콩으로 건너가 활동했던 수많은 한국 액션배우들 중 하나인 남석훈의 눈에 띄어 여소룡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게 된 것. 이수현 주연 ‘아시아 슈퍼히어로’ 영화 <중국초인>(1975) 등에 출연했던 그는 오히려 한국에서 남석훈의 <속 정무문>(1977), 최우영의 <십자수권>(1978) 등에 출연하며 짝퉁의 명성을 이어갔다.
사실 여소룡은 눈만 빼면 이소룡을 빼다박았다. 일단 체격 조건 자체가 판박이처럼 일치하고, 얼굴만 빼면 연기 패턴이나 제스처도 똑같다. 다른 짝퉁들과 달리 얼굴만 가리고 보면 진짜 이소룡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이소룡과 같은 복장과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와도 한국에서 만든 영화다보니 묘한 느낌을 줄 때가 많은데, 묘가수와 <맹룡과강>(1972)에서 로마 거리를 걷던 이소룡이 <속 정무문>에서는 여소룡으로 바뀌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자와 눈 내리는 용인 민속촌을 거닐며 담소를 나눈다. 게다가 <사망유희>의 5층 구조를 그대로 모방한 <십자수권>에서는 2층인가 3층에서 수십 마리의 뱀을 내던지는 고수(?)와 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모방은 했으되 어쩔 수 없는 짝퉁의 슬픔이랄까.
더 슬픈 운명은 사실 <용쟁호투>(1973)에서 이소룡과 대결을 펼쳤던 거구의 배우 양사다. 이소룡과도 싸우고 그의 아들 브랜든 리와도 <용재강호>(1986)에서 싸웠던 그는, 급기야 <십자수권>에서는 혹한의 한국에서 짝퉁 이소룡인 여소룡과도 싸우다 죽는다. 그야말로 이소룡과 그의 아들, 그리고 여러 짝퉁 이소룡 등 이소룡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과 싸우다 영화 인생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노래 한곡으로 평생을 산 가수처럼 그 역시 수많은 이소룡의 망령들과 싸우면서 생계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