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턴에도 비극적인 감정을 담을 수 있을까? 관객이 눈물을 흘릴 정도의 감상주의를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도 존 웨인이 주연하는 웨스턴에서. 존 포드의 마지막 걸작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는 이런 역설적인 물음에 답하는 작품이다. 존 포드와 존 웨인, 웨스턴 장르를 발전시키고 대중화시킨 두 장본인이 바로 그 웨스턴과의 애달픈 이별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 속에 들어 있는 서부의 영웅
영화는 기적을 울리는 기차가 신본시티라는 서부의 어느 작은 도시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역마차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동부의 문명이 황야로 들어왔다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런 소도시에 상원의원 랜스(제임스 스튜어트)가 아내(베라 마일스)와 함께 도착했다.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의원은 평범한 장의사의 사무실로 가서 장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볼품없는 나무 관 앞에 선다. 바로 톰(존 웨인)으로 불렸던 서부사나이의 관이다.
하나 기억해야 할 점은 영화는 도입부부터 존 웨인의 주검이 든 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다. 아마 영화를 (다시) 본 많은 관객은 바로 이 장면, 곧 덩그러니 놓여 있는 볼품없는 나무 관을 보고 살짝 눈물을 참았을 것이다. 한 시대의 영웅을 담은 관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작은 나무 상자….
존 포드는 이미 <수색자>(1956)에서 웨스턴과 서부사나이의 죽음을 존 웨인이 문밖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대신 표현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의미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관객에게 이제는 아예 서부의 상징을 관 속에 넣고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수색자>의 속편으로 본다. 장르로서의 웨스턴과 웨스턴의 상징인 존 웨인과의 이별의 아픔을 정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랜스는 법대를 졸업하자마자 큰 희망을 품고 서부로 향했다. 그런데 신본시티에 도착하기도 전에 리버티 밸런스(리 마빈)라는 전설적인 악당에게 걸려 녹초가 되도록 두들겨 맞는다. 강도질을 하던 그에게 어설프게 따지다 ‘서부의 법’을 제대로 배운 것이다. 총으로 상징되는 리버티 밸런스의 폭력, 곧 서부의 법 앞에 랜스는 동부의 무기력한 샌님일 뿐이다. 영화는 서부와 동부, 폭력과 법, 야만과 질서의 대조법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웨스턴의 갈등구조를 갖고 있다.
톰은 이곳 개척마을에서 유일하게 리버티 밸런스에 폭력으로 맞설 수 있는 서부사나이다. 늘 그렇듯 존 웨인은 느릿느릿 말하고 여유있게 행동한다. 랜스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톰은 리버티 밸런스의 폭력을 일정하게 통제하고, 또 사랑하는 연인 할리(현재의 랜스의 아내인 베라 마일스)와 결혼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몸 하나도 지키지 못할 것처럼 약해 보이는 동부의 법률가가 리버티 밸런스 일당을 감옥에 처넣고 이 지역을 법이 통제하는 문명의 땅으로 만들겠다고 의욕을 보이면서 톰의 삶은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톰에게 동부의 법은 황야에 기차가 들어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법과 질서가 세워진다면 서부사나이 톰은 영웅으로서의 위치에서 내려와야 한다.
비밀스런 반칙…그리고 불을 지르다
법대를 나온 신사를 의식하여 톰이 선인장 꽃을 든 채 어울리지도 않는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할리의 식당을 방문했을 때, 그는 어느새 할리가 동부의 청년에게 마음을 뺏겼다는 사실을 안다. 톰이 어색해하며 그곳에서 혼자 빠져나오자, 할리는 기다렸다는 듯 선인장 꽃의 아름다움을 랜스와 함께 찬양한다. 톰의 퇴장은 여기서 한번 강하게 암시된다. 톰의 자리는 더이상 없는 것이다.
톰의 퇴장은 랜스가 리버티 밸런스와 결투를 벌이는 날 절정을 맞는다. 그날은 랜스가 영웅으로 등극하는 날이고, 반면 톰은 전설 속으로 사라지는 날이다. 랜스는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리버티 밸런스와 결투를 벌인다. 결과가 뻔한 이 결투에서 랜스는 의외로 리버티 밸런스를 쏘아 죽인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랜스로 알려지고, 그는 졸지에 ‘전설’이 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톰은 합법적인 결투의 기회를 이용하여 골목에 숨어 있다가 랜스가 총을 쏘는 순간 리버티 밸런스를 쏘았다. 다시 말해 톰은 랜스를 살리기 위해 서부사나이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되는 비밀스런 반칙을 했다. 모두 할리를 위해서였다. 할리가 랜스를 살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고, 톰이 할리의 집에 왔을 때, 영웅이 된 랜스는 그녀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고 있다. 또다시 밀려난 톰은 무너질 것 같은 가슴을 달래며 자기 집으로 마차를 몬다. 그는 초점 잃은 눈으로 등불을 들고, 자신과 할리의 미래 보금자리가 될 집에 불을 지른다. 존 웨인이 얼마나 뛰어난 연기자인지 확인할 만한 명장면 중 하나다.
시민들이 집회를 열어, 랜스를 워싱턴의 의회로 보내는 대표로 선출하는 날, 그 집회 바깥에서 홀로 건물 밖으로 걸어나오는 톰, 곧 존 웨인의 모습은 <수색자>에서 이산 에드워드가 홀로 문밖에서 황야로 멀어져 가는 장면의 반복이다. 존 웨인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고, 그래서 웨스턴의 역사까지 사실상 끝나는 전설적인 순간을 맞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