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어서 늙어야겠어요,생생한 연기 하려면” <와니와 준하>의 주진모
2001-11-21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이혜정

주진모는 늘 크고 검은 배낭을 짊어지고 다닌다. 마치 금방 산이라도 갈 사람처럼 둘러멘 그의 배낭 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미처 물어보지 못했지만, 그는 배낭의 용량 이상으로 담고 싶고 채우고 싶은 게 많은 배우다. <댄스댄스> <해피엔드> <무사> <와니와 준하> 그리고 출연을 결정한 <발해>까지, 99년 데뷔 이후 꾸준히 필모그래피의 한줄 한줄을 채워나간 주진모는 결코, 본인이 출연했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욕심을 겸손함이라는 미덕으로 숨기지 않는다. <와니와 준하>는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좋은 느낌 그대로 영화가 나온 것 같다”고, 혹독한 모래바람을 견뎌가며 찍은 <무사>의 냉담했던 반응에 대해서는 “관객이 야속하기도 했고 실망도 많이 했지만 내 몫의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무사>는 저한테 너무 소중한 작품이에요. 준하의 편한 표정도 <무사>를 거치지 않았다면 나오기 힘들었을 거예요. 예전엔 카메라가 돌아가면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찍힐까만 신경이 쓰였는데 <무사> 끝내고나니 카메라 주변의 것들이 보이고, 이 신이 영화 전체에서 어떤 부분인지 보이고, 배우로서 촬영장에서의 역할이 보였어요. 결국 그 영화를 통해 영화를 보는 넓은 눈을 가질 수 있게 된 거죠. 흥행여부를 떠나 개인적으로 보람도 성과도 컸던 작품이에요.”

강인한 고려 무사 최정에서 다정다감한 보통 남자 준하로의 급격한 변화는 쉽지 않았을 터지만 주진모에게 준하는 “나랑 너무 비슷한 녀석이라 오히려 받아들이기 편한, 주진모의 근사치”였다. 그런 타고난 기본토대 때문인지, 연습 때부터 줄곧 동네 아저씨처럼 배우 곁을 어슬렁거렸다는 김용균 감독의 파파라치식 관찰 덕분인지, 영화 속 준하는 그 어떤 배우들보다 스크린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나이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와니와 준하> 촬영 뒤 오랜만에 가진 휴식 동안 비디오로 보게 된 <에너미 앳 더 게이트>. 독일군 장교로 출연한 에드 해리스는 주진모에게 지금 나이에 할 수 있는 연기와 할 수 없는 연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휼륭한 선생님이었다. “그냥 던지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다른 설명이 필요없더라고요. 저런 연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전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이고 싶어요.”

차기작으로 결정한 <발해> 이야기를 꺼내며 “<에어포스원> 비슷한 영화라죠?” 했다가 야단을 맞았다. “그건 해리슨 포드가 나오는 영화죠. <발해>는 제가 출연할 영화고요. 저는요, 모두들 ‘그럴 거야’ 하는 것들이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신중함과 진지함을 핑계로 조로해버린 청춘배우들 사이에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믿고 있는 것을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는 배우 주진모. 욕심이 많은 사람은 잃을 것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마련이다. 이제 스크린 속에서 늙어갈 그의 모습에서 희망을 찾는 것도 이런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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