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성장영화 혹은 모범적인 반나치주의 영화 같기도 한 <굿바이 칠드런> 때문에 한동안 나는 루이 말 감독을 웰메이드 영화의 대가쯤으로 착각했다. <데미지>부터 그의 필모그래피를 거꾸로 되짚어가며 영화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그 착각은 완전히 깨졌다. <굿바이 칠드런>은 그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지만 그의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너무나 그답지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 루이 말에게는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감독’ 루이 말에게서는 가장 멀리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 나타난 관계들의 실제적 원형이 무엇인지를 짐작해볼 열쇠들이 숨어 있다.
여성의 내면에 공존하는 창녀/어머니
기차역에 선 소년과 엄마. 한눈에 보아도 유복한 가정의 모자임을 알 수 있는 이들은 애틋하게 작별을 나누는 중이다. 기숙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소년은 풀이 죽었고 엄마는 달랜다. 그녀는 마치 애인에게 하듯 달콤한 말로 위로하고 아들의 이마에 빨간 립스틱 자국을 남긴다. 반면 소년의 형은 엄마와의 이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짓궂은 형과 무심한 아버지, 아름다운 엄마와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동경하고 연모하는 막내라는 설정은 <마음의 속삭임>에서 가족의 구조와도 동일하다. 거기서 막내아들은 오이디푸스의 금기를 깨고 어머니와 합일하는 쾌락을 맛보았지만, 그는 스스로의 눈을 찌르는 극형을 당하기는커녕 상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족은 평화를 유지한다.
루이 말의 영화에서 엄마는 언제나 지나치게 아름답고 정절 따위를 기대할 수 없는 여성으로 묘사된다. <굿바이 칠드런>에서 줄리앙의 형은 엄마의 부정을 암시하며 ‘모든 여자는 창녀’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물론 엄마의 부정을 의심할 실제적 증거는 없지만, 그의 모든 영화에서 여성들은 (언제나 정절 따위는 우습게 안다는 의미에서) ‘창녀’처럼 그려진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루이 말이 문제적인 감독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의 영화에서 여성의 ‘창녀’적 기질은 전혀 비난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인>에서는 아이가 있는 여성의 불륜을 그저 사랑의 한 모습인 듯 묘사해 엄청난 도덕적 비난을 받았고(독일에서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모든 장면들을 들어낸 채 개봉되기도 했다), <프리티 베이비>에서 엄마를 실제 매춘부로 설정하기도 했다. 루이 말의 여성은 창녀와 엄마 사이를 아주 자유롭게 오간다. 아니, 오간다기보다 그 둘은 여성의 내면에 공존하며 여성은 둘로부터 더 성스러워지거나 더 타락하지 않는다.
<굿바이 칠드런>은 일종의 성장영화다. 줄리앙은 새로운 전학생 보네를 만나자마자 ‘신경 쓰이는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특별한 관계의 출발점이다. 줄리앙은 보네가 사실은 키펠스타인이라는 비밀을 알게 되고 보물찾기에서 둘만 남아 산속을 헤매는 경험까지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줄리앙은 유대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루이 말의 영화에는 어린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는 동심을 보호하거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미화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 <프리티 베이비>의 어린 브룩 실즈는 창녀가 아닌 여성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자라며, 열두살밖에 안된 자신의 처녀성을 두고 벌어진 경매에 설레기까지 한다. <라콤 루시앙>에서 루시앙은 나치가 뭔지 레지스탕스가 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독일군의 앞잡이가 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가 눈앞에서 잡혀갈 때까지 자신이 어떤 일에 가담하고 있는지조차 실감하지 못한다(<굿바이 칠드런>에서 학교식당에서 일하다 쫓겨나 밀고자가 된 급사 조셉은 루시앙의 다른 버전이다).
루이 말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존재가 무방비 상태로 비정한 세계에 노출되었을 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낭만성과의 타협은 없다. 어린 주인공을 과도하게 울리거나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무기력하게 그 존재가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뿐이다. <굿바이 칠드런>에서도 관객과 어린 학생들은 나치의 손에 끌려가는 친구와 스승을 바라볼 뿐이며, 소년은 그렇게 세계의 가혹한 질서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40년이 넘었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1월 아침의 그 모든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라는 회한어린 노인의 고백이 그 담담함을 무너뜨린다.
세계의 잔인성에 눈뜨게 해주네
루이 말은 미국에 건너가기 전까지 자신의 출신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의 치부를 까발리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거실의 값비싼 그림을 유흥비를 조달하기 위해 아들이 모조품으로 바꾼 줄도 모르고 좋은 작품이라며 찬사를 늘어놓는 <마음의 속삭임> 중 한 장면은 껍데기에만 집착하는 이 계급의 속물적 속성에 대한 재치있는 야유였다. 루이 말의 여자주인공들이 자신의 욕망을 따라 부유하며 부르주아의 허위의식에 커다란 구멍을 낸다면 <굿바이 칠드런>은 부끄러운 역사를 회고하며 이 계급의 죄의식을 끄집어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페탱 정부를 지지하거나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국가에서 기득권을 유지했다는 것은 범죄행위에 공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루이 말로 하여금 이 영화를 꼭 만들어야 했던, 그러면서도 40년 뒤에야 비로소 만들 수 있게 한 이유가 아닐까. 현재의 질서가 유지된다면 피 흘리는 이가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질서에 순응한다는 것은 비록 손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살인에 동참하는 것이다. ‘부자가 축제를 벌일 때 가진 것 없는 자의 분노를 이해한다’라는 신부의 설교에 한 학부형이 참지 못하고 일어서는 장면은 부르주아들의 편협한 윤리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루이 말은 전시에 그런 특권적 지위의 보호막 안에서 고통을 면제받았고, 더 나아가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 정부를 둔 덕에 유대인들을 제물로 바치고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가혹한 세상의 폭력에 부지불식간에 공모자가 되었다. 그의 죄의식은 무의식적으로 줄리앙이 보네를 돌아봄으로써 학교에 들이닥친 나치 장교에게 그가 키펠스타인임을 알려주게 되는 장면에 녹아 있다. 그의 시선으로 보네의 정체는 폭로되었다. 루이 말은 줄리앙의 시선에 무거운 죄의식을 씌워줌으로써 자신의 치욕스러운 역사의 현장을 살아남은 자의 수치심을 드러냈다.
루이 말은 자신의 영화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즐겼다. 불편하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가치관이나 세계를 접할 문이 열릴 기회가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줄리앙이 보네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존재가 불편했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줄리앙은 그로 인해 세계의 잔인성에 눈뜨게 되었다. 줄리앙에게 키펠슈타인은 어른으로 가는 슬픈 출입문이었던 셈이다. <굿바이 칠드런>은 언제나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루이 말의 필모그래피에서 이례적인 작품이지만 우리의 관습을 깨뜨리는 그의 ‘불편한’ 영화들로 가는 ‘친절한’ 출입구가 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