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 회고록]
[박중훈 스토리 1] 나는 어떻게 <깜보>의 제비가 됐나
2009-01-16
글 : 박중훈 (영화배우)
정리 : 주성철
밤무대 뛰면서 배우의 길 힘겹게 뚫었으나 그곳은 가혹한 인권의 사각지대

박중훈과 만납니다. 우리 시대 한국 배우를 떠올릴 때 오래도록 현역으로 활동하는 배우 중 ‘아이콘’이라 부를 수 있는 배우는 몇명 되지 않습니다. <깜보>(1986)로 데뷔한 박중훈은 새로운 감각과 화술의 청춘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나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1988)로 대표되는 1980년대 대학가의 해빙 무드, 그리고 <칠수와 만수>(1988)를 전후한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시작과 함께한 배우였습니다. 마치 한국영화의 80년대와 90년대를 잇는 징검다리 같은 존재였던 그는 이후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1990), 이명세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강우석의 <투캅스>(1993), 장현수의 <게임의 법칙>(1994)에 이르기까지 작가와 장르를 넘나들며 그 자체로 변화하는 시대의 표정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과거 박재동 화백이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투쟁 당시 만든 애니메이션 제목이 <중훈아 손님 받아라>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박중훈표 코미디’로 대표되는 ‘흥행의 보증수표’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이후의 이야기는 더 많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격주로 연재될 박중훈 회고록의 첫 번째 페이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80년대 이후 배우의 색다른 시선으로 한국영화사의 한 단면을 펼쳐 보이는 작업이자, 호기심 많은 후배 배우들에게 흥미롭고 생생한 체험담이 되길 희망합니다. 그 첫 번째는 멋진 배우를 꿈꾸던 대학 신입생 박중훈이 <깜보>로 데뷔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배우 박중훈을 얘기하기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고등학교 3년 내내 연극부원이었으니 용산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나는 1966년생인데 1965년생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용산고 시절 잊지 못할 동기는 바로 이제는 감독이 된 농구선수 허재다. 고3 때 내가 연극부장이었고 그가 농구부장이었으니 당시 용산고 예체능의 두 거물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배우를 꿈꿨던 나는 첫해에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시험을 봤다가 떨어졌다. 바로 들어갔으면 84학번이 되는 건데 그때가 아마 연극영화과 입학이 막 어려워지기 시작하던 때였던 것 같다. 그 이전에는 예비고사만 붙어도 들어가는 곳이 연극영화과였는데 점차 그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할 때였던 거다. 39명 모집에 20 대 1 정도의 경쟁률이었다. 물론 어이없는 지원생들을 빼고 나면 실제 경쟁률은 3 대 1 정도였을 것 같다.

대학 입학과 함께 명함을 찍어 돌리다

재미있는 건 보통 예비소집이 먼저고 다음에 면접을 보는데, 1984년에 동국대만 면접이 먼저고 예비소집이 뒤였다. 그다지 성실하지 않고 덜렁덜렁대는 학생이었던 나는 당연히 앞에 있는 일정이 예비소집이라 판단하고 안 갔다. 그러다 딴에는 면접이라 생각하고 두 번째 일정에 갔더니, 앞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나더러 “면접 때 못 뵀던 분이네요” 그러더라. 오늘 면접 아니냐고 했더니 예비소집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자동으로 떨어졌다. 후기로 모 대학 경영학과에 지원해서 합격했는데 정말 못 가겠더라. 학교 교정이 우리 용산고 캠퍼스만도 못한 거다. 그리고 또 예능쪽으로 이름이 알려진 모 전문대에도 지원하러 갔는데, 정말 이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하는 얘기가 아님을 알아달라. (웃음) 고등학교 연극부 선배 중에 정말 깡패 같은 선배가 들어간 학교였던데다, 원서 내고 내려오는 여학생과 마주쳤는데 그 옆에 있던 어머니가 “그래, 이년아, 공부 좀 하지” 그러면서 때리더라. 참 기분이 그랬다. 그래서 떨어질 거 떨어지고 포기할거 포기하면서 재수를 하게 됐다.

아버지는 행정고시 출신 고위공무원이셨는데, 386세대의 아버지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우리 아버지 역시 보수적인 경상도 분이셨다. 예술과 담쌓은 분이다보니 평소 연극부 활동까지 포함해서 정말 야단을 많이 맞았다. 식사 때는 “데모하지 마라, 다 빨갱이다”, 그런 얘기를 늘 하시던 분이었으니까. 그런데 대학까지 떨어졌으니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재수를 해서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연극과 영화 파트를 나눠 학생을 모집한 첫회였는데 27 대 1의 경쟁률이었다. 그런데 들어가서도 좀 암담했다. 그해 동계 취업률이 5%인 거다. 게다가 신입생 환영회를 갔더니 양복점하다 오신 분도 있고, 또 수업을 듣다보니 교수 노트는 거의 20년 전 선배 노트랑 같은 거다.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이 학교에 왔는데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든 거다. 무조건 졸업하기 전에 내 길을 스스로 뚫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배들 단편영화 찍는 현장에는 무조건 다 나갔고, 직접 명함까지 만들었다. 그때는 휴대폰도 없을 때니까 내 이름과 중앙대 연극영화과 몇 기수라는 거 쓰고, 집 전화번호랑 집에 주로 있는 시간대를 따로 써넣었다. 그러고는 충무로에 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 나눠줬다. 무슨 힘이 있겠나 싶은 연출부 막내에게도 줬는데, 그래도 당시 내 입장에서는 충무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하늘이었다. 그때 내가 명함을 나눠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중에 나와 함께 <게임의 법칙>(1994)을 작업하게 되는, 이원세 감독의 <여왕벌>(1985) 연출부였던 장현수 감독이었다.

합동영화사에 매일 출근해 무작정 매달려

꼭 배우가 돼야겠다는 생각에 당연히 탤런트 시험도 봤다. KBS 11기 탤런트 시험에 지원했다가 2차에서 떨어졌다. 그때 사귀던 여자가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나보다 먼저 시험에 합격했던 KBS 10기 탤런트였다. 여자친구한테 창피한 생각도 있었는데, 그녀 역시도 떨어진 내가 시시했는지 이런저런 이유로 안 만나줬다.

당시 또 내가 저녁때는 뭘 했냐면 밤무대에서 노래를 했다. 재수 생활 끝나면서부터 시작했던 건데 두 군데에서 뛰었다. 가라오케 스탠드바가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던 세종빌딩 지하 세종스탠드바에서는 코미디언 이기동, 영동호텔 맞은편 뉴멕시코 스탠드바에서는 당시 인기있던 가수 방주연의 사전 스테이지에 올라 트로트 노래 몇곡 메들리로 부르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각각 30만원 이상씩 받았으니 꽤 많이 받은 거다. 그 두 업소 사장이 한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프로골퍼 강수연씨의 아버지 강봉수씨더라. 낮에 학교 다니고 밤에 아르바이트하고, 그외 시간에는 또 충무로를 어슬렁거리면서 정말 정신없는 신입생 시절을 보냈다. 말하자면 정말 바쁜 대학생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같은 해 1985년, 곽정환 사장이 있던 합동영화사에서 신인배우를 포함해서 시나리오, 연출 파트의 새로운 인물들도 모집했다. 그때 시나리오 파트에 뽑힌 사람 중 하나가 학교 선배인 강제규와 송능한이었고 이미 합동영화사에 있던 기성 감독들로는 이황림, 홍파, 정지영, 박철수, 정인엽 감독 등이 왔다갔다하던 때였다. 당시 머리를 길렀던 강우석 감독도 <애마부인>(1982) 연출부를 했던 때였다. 그런데 배우 파트는 ‘해당자 없음’으로 해서 뽑지 않은 상태였는데, 당시 합동영화사는 회사의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이황림 감독의 <깜보>를 준비하던 때였고 신인배우를 찾긴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연출부를 통해서 나란 놈이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고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준비한 것 몇개를 보여줬고 시나리오도 주면서 가보라고 했다. 시나리오까지 주니까 난 그게 캐스팅된 거라고 믿었는데 도통 연락이 없더라. 1주일 뒤에 영화사에 가보니까 여전히 신인배우를 뽑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제발 출연만이라도 시켜달라, 연출부든 뭐든 시켜만 달라고 했다. 그리고 무조건 영화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꽃병도 갈아드리고, 걸레로 청소도 하고, 동대문지점에 가서 감독님 돈도 찾아드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또 밤에 연출부 회의를 시작하면 장터국수에서 국수를 받아가서 단무지랑 사무실에 올려드리고 하는 생활을 몇달 한 거다. 배우든 연출부든 뭘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늘 5분 대기조였다. 그러다 이황림 감독이 “너는 왜 만날 나오냐” 그러시기에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졸랐고 테스트 기회를 또 얻었다. 신인이 필요한 역할이 소매치기 ‘제비’였는데,(내가 ‘깜보’가 아니다) 동대문 시장에 가서 내 나름대로 제비를 분석한 옷을 사서 가방에 잔뜩 담아가지고 와서 테스트를 받았다. 그렇게 두세 시간 춤도 추고 난리 피우니까 다들 낄낄대며 재밌는 놈이라며, 나보다 더 괜찮은 놈이 없으면 나를 캐스팅하겠다고 했다. 그러다 다행히 좋은 신인이 안 나타나서(웃음) 12월11일 대망의 <깜보> 첫 촬영에 들어가게 됐다. 드디어 내가 영화배우로 데뷔하던 순간이었다.

집합 늦었다고 조감독이 ‘이단옆차기’

당시 <깜보> 개런티로는 150만원을 받았다. 3부 이자로 6개월짜리 어음을 끊어줬다. 당시는 개런티를 어음할인으로 해줬는데 바로 옆 서무과에서 ‘깡’을 하는 거다. 그리고 배우협회 등록비가 50만원 정도 됐으니 실제 손에 쥔 건 60만∼70만원 정도였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이황림 감독이 의상을 잘 입어야 한다고 소개해준 데가 당시 하용수씨가 운영하던 숍 파라오였다. 그런데 옷값이 200만원인 거다. 그때 가격으로 그 정도면 정말 어마어마한 거다. 그땐 영화제작비가 1억원도 안되고 보통 3천만∼4천만원 정도일 때였다. 친구들한테 돈 빌리고 해서 겨우 사긴 했는데 이미 크랭크인 전부터 개런티가 마이너스가 된 거다. 정말 죽겠더만. (웃음) 그리고는 김혜수라는 신인 여배우를 뽑았다. 당시 아이스크림 CF로 유명했는데 겨우 중3이라 늘 어머님과 함께 다녔다. 촬영 끝나고 술 마시고 그럴 수도 없으니 사실 별다른 추억은 없다. 그래도 내 옛 사진 중에는 혜수가 덕성여중 졸업할 때 가서 꽃다발 주면서 찍은 졸업식 사진이 있더라. (웃음)

<깜보> 강원도 장면은 평창에서 찍었는데, 7시간 정도 이동한다고 치면 나는 가장 어린 조명부 막내보다도 어린 나이였으니 그 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트래킹숏 찍을 때 쓰는 발판을 계단에 얹어놓고 거기 비스듬하게 기대서 이동했다. 현장에서도 반짝이는 반사판은 늘 내가 들고 다녔다. 게다가 그 추운 겨울에도 제비는 패셔너블한 역할이라 얇은 옷을 입고 나온다. 지금은 배우들에게 ‘웜업’이라는 게 중요해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몸을 덮혀놓는 게 필수적이다. 그런데 촬영감독이 코트를 입고 있으면 부피감 때문에 앵글을 못 잡는다고 해서 밤새도록 그 상태로 있었다. 내가 앉는 배우 의자 같은 것도 없었다. 내가 현장에서 의자에 앉아본 건 <칠수와 만수>(1988)가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스러워 분노가 치밀 정도인데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대였다. 한번은 집합시각에 30분 늦었다고 조감독한테 이단옆차기로 ‘아구창’을 맞은 적도 있다. 그때 우리집이 과천에 있었는데 집합시각이 새벽 6시라 4시쯤 일어나서 지하철 첫차를 타도 조금 늦을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오늘은 어떤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하는 게 아니라 ‘묻지 말고 일단 다 들고와’라고 해서 모든 의상을 기어이 다 들고 이동했었다. 합승 안된다고 택시는 탈 수도 없었다. 그 조감독에 대해서는 ‘영화 끝나고 보자, 때려 죽여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다가 나중에 결국 현대백화점 신축공사 현장에서 일대 격투를 벌인 적도 있다. 엑스트라나 스탭들 다 보는 데서 감독한테 쌍욕 듣는 건 너무 흔했고 그렇게 의상, 분장 다 직접 해결하면서 인권의 사각지대라 해도 틀리지 않은 우울한 동네가 바로 당시 영화판이었다.

기찻길에서 사람이 걸으면 안된다고?

그런데 <깜보> 개봉은 더 우울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뿌듯한 영화였는데, 청소년을 타깃으로 찍은 이 영화를 두고 공연윤리위원회에서 마지막 장면을 걸고넘어지면서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을 내준 거다. 청춘영화로 알고 극장을 찾았다가 그냥 돌아가는 중고생들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당시 공윤 이영희 위원장은 두 가지를 문제 삼았다. 마지막에 장두이씨가 연기한 깜보와 내가 기찻길에서 헤어지는데, 먼저 “기차가 다녀야 할 기찻길에서 사람이 걷고 있기 때문에 잘라야 한다”고 했고, 그 다음은 “두 주인공이 헤어지면서 끝나서는 안된다”는 거였다. 전두환 통치 태평성대에 두 사람의 이별은 ‘퇴폐’라는 거였다. 이미 다 찍어온 영화를 가지고 기찻길을 걷지 말게 하고 헤어지지 않게 영화를 끝내라니. 그건 영화를 그냥 없애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위원장님 참 유명한 사람인데(웃음)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영화를 두고 제목에 ‘공포’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된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으로 만든 주인공도 바로 그분이었다. 그렇게 <깜보>는 성인 관람가 영화가 되어 2주 만에 극장에서 간판을 내렸다.

사진제공 월간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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