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가 만난 사람]
[김혜리가 만난 사람] MBC 뉴스데스크 신경민 앵커
2009-01-16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클로징 30초에 혼을 담는다

최초의 24시간 뉴스 채널 <CNN>이 1980년 출범했을 때 한 평자는 “뉴스중독자들을 위한 전일제 전자오락실”이라는 표현을 썼다. 오래지 않아 뉴미디어가 정보의 수문을 열어젖혔고 뉴스가 범람했다. 과거에는 뉴스가 아니었던 소문의 파편들도 홍수에 합류했다. 정보의 풍요를 예찬하는 한편에서, 종일 듣고 보는 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는 허기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닻’이라는 뜻의 앵커는, 해설과 논평을 곁들여 방송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보와 현상의 해일 속에서 앵커가 닻이 되기를 진지하게 기대하는 시청자는 많지 않다. 전통적으로 한국 대중은 TV 앵커에게 호감과 신뢰를 주는 외모와 진행을 기대할 뿐 종합과 논평의 능력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혹은 바라지 않도록 길들여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다수 앵커들은 전달자의 소임을 성실히 다하고 ‘국민정서’에 부합하는 무난한 맺음말로 안녕을 고했다. “심상치 않습니다”와 “답답합니다”의 수위를 넘는 논평은 희귀했다.

2008년 3월부터 평일 <뉴스데스크> 앵커석에 앉은 29년차 신경민 기자는, 포부를 밝히는 제1성에서 ‘앵커의 적극적 기능’을 말했다. 최고참 기자로서 뉴스 낭독에 만족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9개월 남짓, 신경민은 클로징멘트를 거의 독자적인 꼭지로 활용했다. 30초가 되지 않는 맺음말은, 노회한 완곡어법을 구사한 날카로운 권력 비판일 때가 많았고 노련한 전문 기자의 눈이 낚아챈 팁인 경우도 있었다. 미소에 인색한 얼굴로 일간지 만평이 선사할 법한 블랙유머를 구사하기도 했다. 역대 앵커 중 가장 무표정한 축에 속하는 그가, 시청자에게 누구보다 열렬히 말을 걸고 있다고 느낀 시청자는 나뿐일까. 반정부냐 친정부냐를 떠나 그의 방송 기사에서 우선 돋보이는 것은 꼼꼼함이다. 2007년 12월7일 라디오 <뉴스의 광장>에서 신경민 앵커가 남긴 멘트는 적당한 예다. 당시 그는 강화 총기 탈취사건에 휘말려 사망한 20살 병사의 소식을 전하며, 수사 당국이 직계가족보다 언론에 먼저 사망자 신원을 공개한 점을 짚었다. “어둡고 불안한 차 안에서 스무살 난 아들의 이름과 사망 소식을 듣는다면 그때 심정과 절망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때문에 사고가 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도 성숙한 관행이 자리잡고 충분한 배려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전례없는 양식의 클로징멘트를 굳이 고집해 신경민 앵커가 얻은 것이 있다면 논란과 파문이다. 시청률은 여전히 경쟁사 뉴스를 한참 밑돌고 항간에는 앵커 교체 풍문도 흘러다닌다. 박성제 MBC 노조위원장은 “상당수 현업 기자들이 신경민 앵커를 기자로서 존경한다”며“ MBC가 (외압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자격이 있는 집단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물론 다른 성과도 있다. “신경민 앵커가 날마다 보도할 뉴스 내용을 미리 보면서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잘 전할 수 있을까 방송국 한쪽에서 생각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뉴스데스크> 시청자 댓글 게시판에 오른 메시지다. “뉴스 방영 채널의 수가 늘어난 상황에서 언론이 권력보다는 권력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합리적 균형을 위해 맞는 길이라고 본다”고 사견을 밝힌 KBS 보도국 소속 한 기자도 비슷한 감상을 밝힌다. “신경민 앵커의 뉴스를 보면,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느낄 수 있다.”

그를 만나기로 정한 날 MBC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다. 분망한 상황이 염려돼 약속을 이틀 뒤로 미뤘다. 십분 먼저 도착한 월요일 이른 아침 카페에는 이미 신경민 앵커가 도착해 있었다. 인터뷰 대상으로 나온 자리에서도 그는- 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인터뷰어보다 먼저 종이와 펜을 테이블에 꺼내놓았다. 그는 정보와 사실, 진실이라는 세 단어를 주의 깊게 구분해 사용했다. 둔하고 무던해지는 현상을 노화라 부른다면 신경민은 아직 젊었다.

-파업 첫날 <뉴스데스크>를 보니 한나라당과 민주당 원내대표를 연결해 인터뷰를 진행하시더군요.
=뉴스 인력도 아이템도 부족한 상황에서 급히 홍준표, 원혜영 두 대표 인터뷰를 섭외해 오후 6시경 녹화했습니다. 저널리즘이 발달한 국가에서는 대개 라이브로 진행하는데 우리는 녹화가 대부분이죠. 생방송을 해야 질문도 자유롭고 인터뷰이의 진짜 의중과 실력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녹화를 하면 자꾸 ‘약속 대련’을 하게 됩니다.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하자고도 하고 후속 질문도 제한적이죠.

매스미디어 수업 첫시간에 나오는 이야기

-박혜진 앵커가 파업으로 빠지고 혼자 뉴스를 진행하시는 모습을 본 일부 네티즌은 “초상집 홀아비”같다더군요. 이 참에 엄기영 사장과 진행하면 어떻겠냐는 농담을 하는 것도 들었어요. (웃음)
=사장이 직접 하긴 힘들 테고 기자 중 누군가와 진행하는 방법은 있겠죠. 엄기영 선배와는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동안 며칠간 같은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적이 있긴 한데, 보기 아름답지 않았는지 두어번 하고 바로 쫓겨나 광안리로 중계차 타고 나갔어요. (웃음)

-이번 파업이 시작된 뒤 노조 소속 보도국 후배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까.
=이 사태를 어떻게 꾸려 가느냐가 급한 현안이라 별로 대화할 기회가 없었어요. 나름 대안을 마련했지만 현실에서 과연 작동할 수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죠. 파업 상황은 여러 번 겪었지만, 방송사의 대내적 문제- 가령 사장 퇴진 요구라든지- 가 아니라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는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싶네요.

-MBC 창사 뒤 아홉 번째 파업으로 압니다. 1997년에 발생한 파업은 안기부법과 노동법이 쟁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1997년 파업은 정치파업이었는데, 정치파업은 형식적이 되기 쉬워요. 이번 파업은 무척 현실적이고 임박한 문제가 걸린 파업이죠. 근본을 파고드는 파업이라 언제 어떤 양상으로 진행될지 예측하기도 힘들어요. 엄기영 사장이 12월24일 발표한 담화문을 봐도 파업을 말릴 수도, 열심히 하라고 말할 수도 없는 고뇌가 묻어 있죠. 일부 신문이 방송 이기주의, 자사 이기주의 운운하는데 국민이 그런 말로 오도될 수준은 아니라고 믿어요.

-최근 정부 여당쪽에서 방송법 개정문제를 정치논리가 아닌 경제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논리는 무조건 파벌 이기주의고 경제논리는 불편부당한 진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수사인데요.
=우리가 논란을 벌이는 모든 문제는 사실 서양 근대사회가 이미 겪고 결론이 난 것들이에요. 언론은 재벌이 한다고 해서 절대 좋아지지 않아요. 만약 그랬다면 제너럴모터스(GM)나 제너럴일렉트릭(GE)이 세우는 언론사가 최고겠죠. 서양에서는 철학적으로 학문적으로 확립되고 역사적으로 증명된 개념이에요. 매스미디어 입문 첫 수업시간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런데 그걸 갖고 또 논쟁을 새로 시작하겠다? 그건 어떻게 보면 개론서도 안 읽어본 거죠.

-저널리즘이 파는 상품은 바로 신뢰인데 그것은 돈으로 얻을 수 없겠죠.
=저널리즘에 대해서도 수많은 연구가 분야별로 이루어져 있고 공통분모가 도출돼 있어요. 그것을 깨는 실증적 경험이 나오기 전에는 논박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걸 자꾸 건드린다고요.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것은 좋아요. 그러나 민사적 손해배상과 형사적 처벌은 별개 문제죠.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고문과 무고한 피해자를 방지하기 위해 형법은 죄형법정주의 등등 엄격하게 만들어놓았거든요. 명예훼손 판례도 세계적으로 다 나와 있고요. 요컨대 우리는 개론 수준에도 이르지 못하는 사회로 들어서고 있는 겁니다. 기본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를 자꾸 하니까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지 모르겠어요.

기자 출신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

-고등학생 때까지 전주에서 사셨죠? 선친께서는 <전북도민일보> 사장을 지내셨더군요.
=일찍 출향해서 서울에서 공부한 아버지는 해방 어간에 서점을 잠깐 운영하다 교사가 부족한 시절이라 선생님이 되셨어요. 그러다 <전북일보>를 창간하면서 기자로 입사했죠. 둘째인 제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는 기자였고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항상 기자였습니다. 80년 즈음 <전북일보>에서 주필로 은퇴를 하고 <전북도민일보>가 창간돼 경영진으로 가셨어요.

-아버지가 언론계에 종사한다는 사실이 가정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언론이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 일찍부터 이해가 있었죠. 자연스럽게 신문사도 오가고 아버지가 만나는 정치인, 경제인, 문화인들을 볼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저를 매우 예뻐해서 많이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50년대 말 60년대 초 전주의 음식점 주인 중에는 70년대 서울로 와 명성을 떨친 명창과 고수들이 있어서 손님들에게 판소리나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어요. 다방에 가도 월전 장우성의 그림, 소전 손재형의 글씨가 걸려 있었죠.

-유독 둘째아들을 일터에 동행하신 까닭이 뭘까요?
=형도 데리고 다녔지만 제가 아버지와 외양과 목소리, 취향과 성격이 닮아 더 많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만 열한살이 되던 해 어느 새벽 아버지가 나를 깨우더니 케네디 대통령이 죽었다고 말씀하셨던 일이 지금도 기억나요. 석간을 만들고 이른 아침에 퇴근한 아버지가 빅뉴스니까 제게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셨나봅니다. 대학 다닐 무렵에는 인턴사원처럼 취재를 시켜 <전북일보>에 기사를 써보라고도 하셨어요.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가 전북 왔을 때 인터뷰를 했더랬죠.

-입시에 요즘처럼 심하게 얽매이지 않았던 시대인데, 10대에는 어떤 책을 읽으셨나요?
=아버지께서 소장한 장서도 많았고 친구 분들 부탁으로 전집류도 자주 사오셔서 집에 있는 책을 다 못 볼 지경이었어요. 작고한 4년 터울 형님이 몸이 약해 독서를 많이 한 덕분에 제가 초등학생일 때는 중학생, 중학생일 때는 고등학생이었던 형의 책을 기웃거리고 형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또 다른 영향으로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은사 이규일 선생이 계세요. 뒷날 한국 최초 미술전문기자가 되신 분인데, 제가 중학생 때 1천권 넘는 장서를 짊어지고 우리 집에 하숙을 하러 오셨어요. 덕분에 그분 책을 몰래 열심히 읽었죠. 그 양반 서재에 소설도 많았지만 함석헌 선생류나 <사상계>류 전집, <신동아>가 있었어요. 부모님이 “사나이는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철학이 있어서 아주 어려서 서당식으로 한자를 배웠는데 한문 소양이 독서에 도움을 많이 줬죠. 대학 진학 뒤에는 함석헌 선생의 노장사상 강의가 열린 정동교회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런 분들의 독재에 대한 항거는, 종교의 힘에서 나온 것 같아요. 지금도 그만한 에너지와 바른 정신을 가진 인물이 아쉬워요.

“청와대 좋아하네”로 내근조치 5년

-서울대 사회학과 71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셨습니다. 유신헌법 공포 1년 전 대학에 입학한 셈인데요.
=저는 유인태나 이철처럼 투쟁하는 부류의 학생은 아니었지만 이 독재의 끝을 봐야겠다는 굉장히 강한 생각이 있었어요. 이 독재만 끝나면 지금보다 나은 다른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타협을 못하는 습성이 배었어요. 그 성격으로 방송사 입사 뒤에도 출입처나 보직에 여러 번 불이익을 당했고 앵커도 여러 번 잘렸어요. 정치부 취재를 하면서 동시에 주말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90년대 초 현안 중 하나가 YS의 아들 김현철 문제였어요. 김현철이 정치에서 손을 떼는 것이 정의다라는 생각을 코멘트에 여러 번 실었더니 경고성 질문이 나오더군요. “그거 당신이 쓴 거야? 누가 써준 거야?” 제 앵커 멘트를 누가 써주겠느냐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즉석에서 쓴 거냐, 오래 생각한 거냐 묻더군요. 그러다 어느 날 잘렸어요. 그것도 통보도 없이 후임이 결정되는 비겁한 방식으로. 일부러 모욕을 준 것이죠. 그런 일의 시작은 전두환 전 대통령 집권 초기부터였어요. 남대문 대한화재지하상가에 불이 났는데 현장검증을 보러갔더니 경찰들이 기자들을 가로막아 싸움이 났어요. “청와대 지시다”라기에 “청와대 좋아하네. 나쁜 놈들”이라고 대꾸했는데 키가 커서인지 경호실 차장이 나를 지목해 끌고 갔어요. 오후에 청와대 경호실로 오라고 해서 갔는데 그때 국가원수 모독죄라는 것을 처음 들었죠. “청와대 좋아하네”라는 말이 문제가 된 거죠. (좌중 웃음) 결국 입사 1년도 못 돼 당한 내근조치가 5년을 갔어요. 그러잖아도 호남 출신인데 골치 아픈 놈으로 찍힌 거죠. 그래도 방송을 깔끔하게 한다는 평가 때문에 화면에 꾸준히 나오긴 했죠.

-부서에서 밀려나거나 잘린 경우가 여러 번이라고 하셨는데 공통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첫째는 사주에 새겨진 타협 못하는 천성이고, 다음으로 고향 탓도 꽤 있었죠. 회사도 사람 모인 사회니까 계파가 있는데 “우리 편에 서면 오랜 방황을 일거에 해결해주겠다”는 식의 유혹도 있었어요. 제가 가진 유일한 힘인 ‘후배들의 지지’를 사고 싶어 하는 쪽에서 출입처 배치나 특파원 카드를 갖고 흔들었던 적이 몇번 있죠. 그런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가 다시 내근조치를 당하기도 했고요.

-지금도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을 근거로 공정성을 의심하는 댓글이 달릴 때도 있던데요.
=지연을 강조하는 풍토의 폐해 중 이런 게 있어요. 한쪽이 정권을 잡으면 자질이 부족한 자기네 지방 출신 인사에게 자리를 줄 뿐 아니라, 상대 지방 출신자를 구색으로 끼워 넣을 때에도 개중 무능한 사람을 써요. 유능한 인물을 쓰면 자기쪽 인사들의 무능함이 두드러질까봐 겁나서죠.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의 수준이 저하되는 것이죠.

-방송 뉴스는 임팩트가 강한 대신 눈으로 볼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문맥이나 전망을 파악하기도 힘들고요.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점을 고려하면 어째서 신문이 아닌 방송을 택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데요.
=1980년 여러 언론사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는데 기자 해직 사태가 일어나고 쿠데타 상황이라 <동아일보>는 합격이 취소됐고 <중앙일보>는 시험 자체가 취소됐던가 했어요. MBC는 보류상태로 있다가 연말을 넘기고 채용을 했죠. 그래서 사번이 80이 아닌 81이 됐습니다.

-고교, 대학 동기이자 MBC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입사한 정동영 전 의원과 한데 묶여 언급되는 일이 잦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참여정부 때 한나라당쪽은 두 사람이 돈독한 관계라 신경민 앵커가 열린우리당에 유리한 방송을 한다고 공격했던 반면, 노 정권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두 사람이 오랜 라이벌인 만큼 신경민 앵커가 견제하느라 노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한다고 해석했다는 점이에요.
=정동영과는 학교와 직장이 같고 전주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부모님끼리도 인연이 있으셔서 필연적으로 얽힐 수밖에 없는 관계지만, 둘을 잘 아는 사람은 스타일이 서로 다르다라는 사실을 알아요. 정동영이 고위직에 있을 때 저는 회사에서 보직도 없이 고초를 겪었지만 도움을 청하자는 생각은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제게 특히 적대적인 사람들쪽에서는 ‘이 자식들은 패키지다’라고 생각하겠죠. (웃음) 고교 때는 얼굴만 알고 지내다가 대학에 가서 가까워졌습니다. 젊어서부터 정동영은 정치 지향적인 사람이었고 저는 정치가 중요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정치보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방송은 정동영이 더 잘하는 것 같고 취재는 제가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웃음)

걸프전 당시 <CNN> 동시통역 맡기도

-전주고등학교는 언론계에 졸업생을 유난히 많이 진출시킨 학교로 알려져 있는데요. 왜죠?
=전라북도의 우수한 인재가 거의 전주고에 모여들어 명문대학으로 진학했는데 그들이 갈 수 있는 직장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공무원이 돼도 미래가 뻔하고 검사도 마찬가지고. 결과적으로 판사와 언론인이 많이 배출됐어요. 전주고 교훈이 ‘기자가 되자’라는 소문도 있는데, 그건 거짓말이고요. (일동 웃음)

-80년대 중반까지 외신부 기자로 근무하시는 동안 KAL기 격추 등 큰 사건도 많이 터졌죠?
=KAL기 격추, 포클랜드 전투, 아키노 암살 등 사건이 많았죠. 원래 외신부에 있으면 주목을 못 받는데, 당시는 국내 뉴스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니까 외신을 많이 다루었어요. 위성을 연결하는 방송이 각광을 받게 됐는데, 제 영어가 조금 나은 편이라 위성 신청 절차와 메커니즘을 알아내 비상시에 전화를 들고 직접 수배를 했어요. 지금은 상식이 됐지만 그때는 전인미답의 세계였죠.

-걸프전 때 동시통역사가 도착하지 않은 비상 상황에서 <CNN> 동시통역을 대신한 일화도 접했습니다. 영어에 능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이왕 배운 언어인데 듣기, 말하기도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AFKN> 라디오를 자주 들었어요. 국제부에 배정돼 주한미국대사관을 오가며 외교관들과 이야기할 일이 많았는데, 대학에서 4년간 원서로 공부도 한 내가 이들과 농담 따먹기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웃음) 지금도 발음이 좋진 않지만 라디오를 들으며 따라하려고 노력을 했고 그 결과가 인공위성 청약에 공을 세우니 보도국에서 소문이 난 것이죠.

-1987년 처음으로 미국 연수를 다녀오셨습니다. 상당히 빡빡한 프로그램이었다고 들었어요.
=그즈음 입사 동기들이 모두 연수를 가는데 회사에서 내게는 말을 꺼내지 않았어요. 혼자 알아보고 다니다 하버드에서 주관하는 니먼 펠로십(Nieman Fellowship)에 관한 정보를 듣고 지원을 했어요. 그런데 마침 보도지침을 폭로한 <말> 사건이 터진 거예요. 친구인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구속 기소되고 난리가 났죠. 그러자 하버드 니먼 재단에서 언론 상황이 그 지경인 국가의 기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취소하더라고요. 나중에 김주언에게 따지기도 했어요. (웃음) 그러다가 아시아 재단이 미국의회 펠로십(Congressional Fellowship)을 권유해 연수를 갔어요. 한달간 미국의 정치인, 의원 스탭, 백악관 사람들의 강의를 듣고 하원의원 사무실에 인턴 자리를 구해 일하는‘공수훈련’이었습니다. 종일 영어로 일하고 나면 금요일 저녁 퇴근할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언덕을 못 올라갈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그 과정에서 영어가 많이 늘었어요.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실체에 어떻게 접근해야겠다는 깨달음도 많이 얻었죠.

-워싱턴에서 연수 뒤 특파원 생활도 했는데 어떤 도시라고 설명하시겠어요?
=로비의 천국이고 추한 정치행위(dirty politics)가 판치는 도시가 분명하지만, 워싱턴을 이해하지 않고 미국을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워싱턴을 자국 정치의 모델로 삼는 나라도 굉장히 많거든요. 양질의 정보가 넘쳐나기 때문에 살기에도 좋은 도시죠.

-(웃음) 가족과 산책하던 거리나 공원에 대한 추억은 없나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요?
=의사당이 대단합니다. 일단 굉장히 크지만 설계가 합리적이죠. 의회가 정치 행위의 중심이 되려면 이 정도 구조는 갖춰야 하겠구나 싶죠. 여의도 국회의사당 같은 구조로는 의회가 중심이 될 수 없어요. 일단 워싱턴 의사당은 관심있는 국민이라면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의원석과 청문회, 위원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구조예요. 미디어의 취재도 굉장히 편하게 이뤄지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모든 위원회에 비디오 촬영시설이 있어 방송사가 직접 카메라를 대지 않아도 다 녹화가 되죠. 우리 의회는 일반인 접근은 물론이고 언론사 간부급 기자라고 해도 국회 출입기자 패스가 없으면 제지를 받아요.

-85년부터 사회부 기자로 취재를 하셨는데 그 시기에 김근태 고문,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뜨거운 뉴스가 많았습니다. 인상이 오래 남는 사건이 있나요?
=열심히 취재하고도 많이 기사화하지 못한 일이 가슴 아픕니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나 김민석 재판, 김근태 사건의 재판과정이 그런 경우죠. 보도지침의 제한도 있었고 MBC의 한계도 있었죠. 카메라 취재도 못했고 송고 자체를 원하지 않았어요.

“공자·맹자·부처님·예수님 말씀 되도록 피해요”

-2008년 3월부터 평일 <뉴스데스크> 메인 앵커를 맡으셨는데 앞서 1993년에 주말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경험이 있죠?
=1년 반 정도 했습니다. 입사 이후 뉴스 앵커를 맡으라는 회사의 요구는 계속 있었지만 거절한 까닭은 앵커 일의 한계가 뚜렷해 보였기 때문이에요. 요즘 입사하는 세대는 앵커를 열망하지만 우리 때만 해도 앵커보다는 현장 취재기자를 하고 훌륭한 에디터, 부장, 국장을 하고 싶다는 소망이 강했죠.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달리 할 일이 없어 앵커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죠.

-방송기자 사회에서 가치관 변화가 있었던 셈이네요.
=요즘 기자들은 70년대생이 다수고 이젠 80년대생들이 입사하기 시작해요. 방송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 70년대부터니까 태어나서부터 비디오 세대인 그들은 방송 하면 앵커가 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세대는 저널리스트라는 이름을 선호하거든요. 저는 50년대에 태어나 성장기에도 TV를 보지 못했고 고등학생 때는 입시준비, 대학 때는 하숙집에서 생활하며 공부하느라 TV와 거리가 멀었어요. 방송기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입사했죠.

-원래 TV 출연이나 분장을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맨 얼굴로도 방송을 했는데 그러면 안된다네요. 대통령도 화장을 하는 걸 보면 하긴 해야겠죠. 넥타이와 재킷은 코디네이터가 가져와요. 패션에 워낙 관심이 없어서 아내에게 만날 혼납니다. 유일한 사치는 아내가 다니는 미용실에서 이발하는 겁니다.

-화제의 클로징멘트 이야기를 해볼까요. 일단 신경민 앵커 클로징멘트의 특징은 “여야 모두 각성이 필요합니다”류의 주례사적 멘트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단순치 않은 정보를 담을 때가 많다는 점인데요.
=공자, 맹자, 예수님, 부처님 말씀 같은 말을 싫어해서 되도록 피해요. 그런 말은 교회나 절에 가도 들을 수 있고, 서점에 처세술 알려주는 책이 산더미인데 제가 할 필요가 없죠. 불과 20, 30초지만 나만이, 아니 기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자로서 내가 알거나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되 팩트와 논리, 관점을 취재기자나 정보를 가진 사람에게 더블 체크받고 모자라면 다시 객관적 인물한테 검증받습니다. 때로는 내 독선을 배제하기 위해 남이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도 합니다. 가령 내가 대운하를 반대한다고 해서 뉴스에서 “나, 대운하 반대합니다”라고 하면 누가 귀기울이겠습니까? 어느 정치인이 이야기할 때를 기다렸다가 이러저러한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멘트를 하죠. 정치인이 아닌 기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보면 한계죠.

-미국 대선이 임박한 시기에는 오바마에 관련된 이야기에 며칠간 클로징멘트를 할애했는데요. 그중 오바마가 북한 핵무기 숫자를 적시한 사실을 두고 미국 정계가 이미 그에게 보고를 하고 대세를 인정하고 있다는 징후라고 해석을 보태셨어요.
=그 뉴스의 의미를 잘 모르고 다루더라고요. 그래서 이면을 지적한 거죠. 오바마가 북한이 핵을 8개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미국 조야가 북한을 이미 핵무기 국가로 인정한다는 거예요.

-또 재미있었던 클로징멘트로, “국회 현안 질의에서 국정 전반에 혼선을 일으키게 된 책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지목됐습니다. 북한과 문제 생기거나 대북 정보가 없어지게 된 데에도 경제위기를 몰아간 것도 쇠고기 협상이 잘못된 것도 모두 노 전 대통령 탓이 컸습니다. 흥미로운 평가이고 알아봐야 할 대목입니다”라는 발언이 있었어요. 시청자 게시판이 발칵 뒤집혀서 말 그대로의 뜻이냐 비꼬는 거냐 논란이 있었죠.
=지금의 혼선을 빚은 건 자신들인데 그 책임을 왜 전부 노무현에게 미루느냐는 뜻이었죠. 하지만 노 대통령을 방어하려는 생각은 한치도 없어요. 개인적으로 그가 성숙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보도국 내에서도 너무 어렵게 말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저는 쉽게 이야기하려면 무엇하러 하냐고 답합니다.

-이따금 정부당국의 외교적 대응을 답답해하는 기색이 보이는 멘트도 눈에 띕니다.
=기자로서 전공이 외교, 통일, 법조이기 때문에 관련된 토픽이 나오면 가급적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또 우리나라에는 여러 중요 현안이 있지만 외교 안보 이슈를 이해하는 사람이 정치 지도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근본적으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다 분단상황이 더해져 있고 4대 강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어요. 그나마 DJ를 꼽지만, 그의 경우는 잘 안다는 믿음이 너무 큰 게 흠인 듯해요.

왜 저널리즘을 다룬 영화는 없는가

-한국에서 국제뉴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국제관계가 한국인의 삶을 좌우하는 비중에 비추어 적당하다고 보십니까?
=미국에서도 그 주제를 갖고 토의를 많이 해요. 어느 나라건 먹물 든 사람일수록 국제뉴스가 많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국제뉴스를 하면 시청률이 떨어져요. (웃음) 신문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나라는 외교나 안보문제에 굉장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형편인데 이상하게도 한국인 대부분이 외교, 국방 이야기가 나오면 싫어합니다. 복잡하거든요. 역사적으로 국토와 국민을 그토록 유린당한 것을 생각하면 희한한 일이죠.

-클로징멘트를 스트레이트 기사보다 칼럼에 가깝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본 사설의 논지는 본지 입장과 무관합니다”라는 꼬리말이 달리는 칼럼처럼 앵커의 클로징멘트가 방송사 입장을 대변하는 건 아니라는 뜻일 텐데요.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공중파 메인뉴스 앵커의 맺음말이 어떻게 개인의 견해일 수만 있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비판이 있죠. 보도국 안에서도 비판이 있고요. 한데 보통 때는 별말 안 하다가, 자기들 의견과 생각이 다르고 권력에 기분 나쁘게 들릴 만하면 그런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웃음) ‘칼럼’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과 논리는 나름 신중히 확인합니다. 국민 가운데 공감하는 분들이 50%일지 30%일이지 몰라도 나의 양식에 비추어 이 정도 코멘트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말을 하죠.

-신경민 앵커의 멘트를 모아서 곱씹어보면 정부건 비판하는 입장이건 공허한 말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막연히 희망을 말하지 말고 구체적 대책을 말하라는 촉구가 많아요. 동시에 비웃기는 쉽지만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의식도 보이고요.
=학창 시절에는 추상적인 내용의 책도 즐겨 읽었지만, 저널리스트로서 추상적 단어는 좋아하지 않아요. 저널리즘은 구체적 이야기를 해야죠. 뭐가 잘못됐는지 꼭 집어줘야 하고. 대안이 있다면 그것도 논해야죠. 모두가 착해지자, 모두 같이 나누자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신문이나 방송을 보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방송 기사는 짧습니다. 현실을 간명하게 표현하는 법을 어떻게 고민하십니까?
=사전을 가까이 두고 적확한 단어를 고르려고 노력하고, 한자나 영어 공부를 한 경험도 도움이 됩니다. 법률서적과 법조인으로부터는 세분화된 용어 중 정확한 말을 골라내는 고민을 배웠고 경제학, 경영학에서도 많이 배웠어요. 국제경제학적 지식은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합니다. 기사는 일단 쓴 다음 불필요한 단어와 조사를 지워나갑니다. 형용사나 부사, 조사를 넣었다 뺐다 하며 읽어보고 말의 감칠맛을 생각합니다. 문학적 표현을 부러 구사할 때도 있고 주어, 동사만 갖고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때도 있죠.

-MBC 보도국은 KBS보다 인력도 적고 조직 체계도 달라 물량이 달리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뉴스를 취사선택해 깊이 보도하는 의제 설정 기능에 좀더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KBS를 물량으로 따라가는 건 궁극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결국 편집 판단과 취재 역량 강화 외에는 해결방안이 없다는 방향은 오래전에 잡혔어요. 문제는 인사의 안정성입니다.

-타깃 시청자층이 확실한 뉴스라는 평도 있는데 어떤 가상 시청자층을 염두에 두나요?
=대체로 젊은 시청자, 비판적인 층, 식자층을 겨냥한다고 봐야죠. 좀더 진보적인 층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수, 진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아요. 친정부와 반정부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뭐 다 보수죠. (웃음) 한국은 근본적으로 보수를 벗어나본 적이 없어요.

-미국에서 앵커가 공인이라는 판례가 있었다고 해요. 사람들은 뉴스 앵커에게 정치인 수준의 도덕성을 기대합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받는 사람 위에 있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생각도 있고요. 예를 들어 앵커가 무심코 쓰레기를 버린다거나 매너없는 행동을 한다고 했을 때 꽤 파장이 있을 텐데요.
=미국에서는 공인의 범위를 굉장히 넓게 보기 때문에 법에 정한 건 아니지만 공인일 겁니다. 저도 무단횡단 안 합니다. (웃음) 식당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에도 참고요. 쓰레기야 원래 함부로 버리지 않고 술을 안 마시니 주사 걱정은 없고 담배도 안 피우니 꽁초 버릴 일도 없어요. 패션에 무관심하니 호사스러운 옷 입고 다닐 일도 없고요. (웃음)

-저널리스트에 관한 영화 가운데 재미있게 보신 작품이 있습니까.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대통령의 사람들>이나 <네트워크>는 봤죠. 우리나라에는 아나운서가 나오는 영화는 많은데 저널리즘을 다룬 영화는 그리 많지 않거나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넓게 보면 한국영화가 현대사를 그리 진지하게 다루지 못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우리 아버지 세대가 어려서 겪은 일이나 언론인 해직사건도 충분히 극화되지 못했죠. 빨리 취재해서 다큐로도 만들고 다큐로 만들 수 없는 건 드라마로 제작해 집단적 경험으로 공유해야 할 텐데 말이죠. 그런 작업이 부족해서 우리 사회가 형식적으로만 발전하고 실질적으로는 발전하지 못한 것 같아요. 과거로부터 레슨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거죠.

운전하거나 웹서핑할 때도 뉴스 생각뿐

-매일 뉴스를 제작하는 일을 사료(史料)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스스로 무엇에 중독된 인생이라고 말하시겠어요?
=뉴스에 중독돼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사무실에서도 계속 뉴스를 듣고, 차만 타면 뉴스를 틀고 웹서핑을 할 때도 국내외 뉴스 사이트를 돌아다니죠. 모든 분야를 알아야 한다는 강박은 아니지만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궁금함이 있어요.

-간혹 한가한 시간에는 울증이 오지는 않습니까?
=혼자 잘 놉니다. 책도 보고 친구도 만나죠. 미국 연수 기간에 아들, 딸과도 친해져서 직접 운전해 드라이브를 가곤 합니다. 영화도 자주 봐요. 아들 녀석이 효자인 것이 이미 본 영화도 보러가자면 묵묵히 같이 갔다가 나중에야 세번 봤다고 실토해요. 나이 들어서도 쫓겨나고 물먹는 아비가 안쓰러운지. (웃음) 엄마보다야 내가 멀겠지만, 다른 아빠들보다는 아이들과 좀 가까운 것 같아요.

-최근에도 앵커를 교체하라는 외부 압력이 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교체 명분은 시청률이 되겠지만 시청률은 늘 그만했으니 구실일 테고요. 여건이 그리되면 할 수 없죠. 저 역시 주야장천 앵커하려는 열망도 없어요. 늦게 시작했으니 누구처럼 10년을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미국이 아니니 댄 래더나 월터 크롱카이트처럼 70 넘어 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다만 하는 동안 하루하루 열심히 할 뿐이죠.

-지난해 미국 방송의 대통령 선거전 보도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후보자들이 유세에서 주장한 내용 중 객관적인 진위를 가릴 수 있는 부분을 골라서 참, 거짓을 검증해주는 코너가 흥미로웠어요. 기계적 중립이 능사가 아니라 사실과 다른 주장과 잘못된 인용을 짚어주는 선거방송도 가능하겠다 싶었습니다.
=우리도 시도할 수 있을 테지만 분명 정파성 논란이 나올 겁니다. 당신 어디 학교 나왔냐, 고향이 어디냐 따지겠죠. 미국이 천국은 아니지만, 거기서는 처음 만났을 때 어느 지방에서 왔느냐고 묻지 않아요.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묻지요. 학창 시절 공부 잘하고 환경이 받쳐줘서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평생 기회를 누리지만, 그 시기에 힘든 일을 겪거나 능력이 늦게 발현되면 평생 애를 먹게 돼요. 불평등한 일이죠. 법조기자 시절, 고시에 합격한 이 나라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사람들을 수시로 접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면 절대로 우수하지가 않았어요. 분명 인재들인데 왜 그럴까요? 건설적 경쟁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생산적 경쟁을 통해 능력을 업그레이드해 조직의 안팎에서 발휘해야 하는데, 일단 자리를 얻고 나면 누가 술 잘 먹고 아부 잘하는지, 연줄 잘 타는지 등 파괴적인 경쟁 내지 비생산적 경쟁을 하니까 직급이 올라갈수록 우수한 사람이 줄어들어요. 과장보다 국장이 우수해야 옳은데, 똑똑한 사무관이 과장이 되면 흐물거리고 국장이 되면 존재감이 거의 사라진다고요. 양질의 사람들은 조직을 떠나거나 사라지거나 변질하고요. 그러니 사회가 향상되지 않는 것이죠.

-스스로 젊은 날의 태도를 견지하며 자신을 지켜왔다고 생각하시나요? 만일 일관성을 지켰다면 지탱해준 힘은 뭐라고 보세요.
=글쎄요. 그저 나를 계발하고 기자로서의 능력대로 평가받고 싶었어요. 비루하게 살지는 않겠다는 자존심이 지탱해준 것 아닐까요? 문리대에서 좋은 선생님과 올곧은 친구들을 많이 만난 것도 큰 힘이 됐어요. 교수님들이 권력에 아부하는 모습도 교훈이 됐고 반면 훌륭한 모습도 봤죠. 그 시절 만난 사람, 읽은 책과 토론, 독재 상황이 제 의식과 인생행로를 결정한 것 같아요. 지금도 고민스러울 때면 꾸준히 연락하고 토론하는 대학 친구들이 많아요. 내 인생의 반려자들이죠. 의식과 정신의 반려자.

追伸 12월29일 오후 5시 반. 여의도 MBC 남자 분장실에 신경민 앵커가 들어섰다. 메이크업을 쑥스러워하는 그가, 보정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약점’은 눈썹. 조명을 받으면 사라져버린다고 한다. 분장 담당자가 그날 뉴스에 대해 그와 나지막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익숙하게 손을 놀렸다. 앵커실로 돌아오자 20여개의 뉴스가 그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6시부터 8시까지는 그가 앵커 멘트를 작성하는 하루 중 가장 고독한 시간. 저녁식사는 그 와중에 부인의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시계가 8시를 가리키자 그는 보도국 정치 국제 총괄 데스크로 자리를 옮겨 최종점검에 들어갔다. 파업 중이라서인지 을씨년스러움이 감도는 보도국 한쪽에서 담배연기 한 줄기가 올라오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피아노 줄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생방송을 마치고 돌아온 앵커실. 그의 책상에 쌓인 종이더미 꼭대기에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이 쓴 <저널리즘의 기본요소>가 놓여 있었다. 요즘도 원론적인 책들을 가까이 두냐고 물었다. 몇번이나 읽고 딸에게 부탁해 원서까지 구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들춰본 <저널리즘의 기본요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새로운 세기에는 진실이 아닌 것들이 너무 많이 유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진실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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