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김연수와 그의 영화를 함께 이야기하고, 그의 친구인 내가 나의 영화를 그와 함께 이야기하는 (어쩐지 무척 복잡한 사이인 듯), ‘나의 친구 그의 영화’는 글의 성격이 성격인지라 김연수에게 첫 번째 원고를 미리 받았다. 그는 ‘정말 좋은 영화’ <쌍화점>에 대해 썼다. 나도 보고 싶다, <쌍화점>. 그렇게 재미있다는 <쌍화점>. 그런데 나의 친구 김연수는 내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는 글의 한가운데에 이렇게 썼다. ‘지금부터 스포일러가 시작되니까 읽고 싶지 않다면 아랫부분을 찢어서 버리시길.’ <씨네21>을 읽는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그래도 책을 찢으라니요, 아랫부분을 찢어서 버리시라니요, 가로로 책을 찢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고나 하는 소리요- 원고를 다 읽고 답문을 써내려가야 하는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극장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사람들에게 “절름발이가 범인”이라거나,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라고 소리 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나는 무방비 상태로 글을 읽다가 <쌍화점>의 결말을 보고야 말았다. 첫 번째 칼럼부터 이런 식이라면, 나도 고분고분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모든 글을 스포일러로 도배해버리고 말겠다.
어허, 책을 찢으라니요
한국을 떠난 지 어언 2개월이 지났고, 그동안 한국에서는 수많은 영화들이 개봉했다. 돌아가면 볼 영화가 많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극장을 자주 찾았는데, 스웨덴에서는 영화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영화 관람료가 비싸다. 싸다고 해도 한글자막이 없다. 자막이 필요없는 할리우드영화를 볼 수도 있었지만- <007 퀀텀 오브 솔러스>나 <마다가스카2> 같은- 먼 북방의 나라에까지 와서 할리우드영화를 보는 것도 어쩐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스웨덴에서 유학 중인 분과 진한 커피를 마시다가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말했다.
“어제 묘지공원에 갔다가 그레타 가르보 묘지에 인사하고 왔어요.”
“그레타 가르보가 거기 묻혔던가요?”
“네. 묻힌 사람 중에 유명인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레타 가르보뿐이던걸요. 무덤 앞에 꽃 한 송이 없더군요. (인기가 없어서 그런가) 겨울이라서 그런가. 스웨덴 출신 영화인이 별로 없죠?”
“왜요, 잉마르 베리만이 있죠.”
“아, 잉마르 베리만! (이름만 들어봤지 영화는 본 게 없군요)”
“최근 개봉한 <렛미인>도 인기라던데요?”
“아, <렛미인>! (그건 봤어요)”
“<렛미인> 촬영지가 멀지 않은데, 내일 가보실래요?”
그렇게 해서 영화 <렛미인>의 촬영지 블라케베리(Blackeberg)로 출발하게 됐다. 계획은 야심찼다. (내가 무슨 영화 전문 기자인가) 머릿속에 제목이 떠올랐다.
한국 최초 (어쩌면 아시아 최초) , 영화 <렛미인>의 촬영지를 다녀오다.
영화 <렛미인>의 쓸쓸한 화면을 사진 속에 담아오고, 두 주인공의 절절한 사랑을 글에 담아낸다면 한편의 아름다운 기사가 될 것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세 가지 의문이 생겼다. 첫째, 과연 사람들이 <렛미인>의 촬영지를 궁금해할까. 둘째, 혹시 영화 촬영지 방문의 달인 이동진씨가 (아뿔싸!) 이미 다녀온 것은 아닐까. 셋째, 영화를 본 지가 오래돼 실제 촬영지와 영화를 비교할 수 있을까.
나의 의문과 걱정은 1승1무1패였다. 우선,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한국에서의 흥행 성적도 좋았고 평가도 좋았기 때문에 영화 속 눈 덮인 아름다운 마을이 어딘지 궁금해했다. 이동진씨가 다녀갔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검색을 해보았지만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시는 분이라 궤적을 좇을 수가 없다.
눈밭에서 피흘리던 그 아름다운 명장면
세 번째 나의 걱정은 적중했다. 블라케베리는 인구 6천명 규모의 작은 동네로, 영화의 원작인 <Lat den ratte komma in>의 작가 욘 린퀴비스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1981년의 블라케베리가 소설의 배경이 됐고, (작가가 1968년생이니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영화 역시 그곳에서 찍었다, 고 하는데 나는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스웨덴에 가보신 분이 계시다면 아시겠지만, 눈 내리고 눈 덮이면 다 거기가 거기 같고, 여기가 거기 같다. 나와 함께 한국 최초의 <렛미인> 촬영지 탐방에 동참한 스웨덴에서 유학 중인 그분은, 놀랍게도 전날 인터넷을 뒤져 영화의 배경이 됐던 장소의 지도를 인쇄해왔다. <렛미인>의 팬이 직접 그려서 인터넷에 올려놓은 지도였다.
“여기가 오스칼이 괴롭힘을 당하던 학교라네요.”
“(기억이 가물가물) 맞아, 괴롭힘을 당했죠. 그런데 학교가 이런 모습이었나, 좀더 을씨년스럽지 않았나요?”
“아, 저는 아직 영화를 못 봐서….”
“아, 그렇군요. 저 다리 밑이 (이름도 기억 못하는) 주인공 뱀파이어가 누군가를 덮쳤던 곳 같은데….”
“제가 영화를….”
영화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과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이 한조를 이뤄 영화 촬영지에 도착했으니 무슨 도움이 되고 무슨 글이 되겠나. ‘분위기는 참으로 그럭저럭 비슷하군요’라는 결론에 도착하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날따라 날이 너무 추웠다. 사진을 찍으려고 해도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블라케베리를 빠져나오는 길에 커다란 나무들을 보았다. <렛미인>의 장면이 떠올랐다.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에 한 남자가 매달려 있다. 누군가 그 남자의 목을 딴다. 떨어지는 피를 통에다 받는다. 김연수가 효수에 관심이 많다면 나는 요즘 피에 관심이 많다. 남자가 흘린 피는 통을 다 채울 수 있을까. 남자의 몸에서 피를 다 뽑아내고, 알코올을 집어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피가 시원해진다. 영화는 피 흘리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데 본 것 같다. 하얀 눈 위에서, 쭉쭉 뻗은 나무에 매달린 남자가 피 흘리는 모습은 내 마음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 나무들은 실컷 보고 왔으니 촬영지 견학은 제대로 하고 온 셈이다.
R.E.M의 노래 <렛미인>이 떠오르네
영화의 영어 제목 ‘Let the Right One In’은 모리시의 노래에서 가져온 것이라는데, 나는 한국 제목 ‘렛미인’이 더 마음에 든다. 알이엠(R.E.M)의 노래 <렛미인>이 떠오른다. 마이클 스타이프가 커트 코베인을 생각하며 만든 <렛미인>의 어두컴컴하고, 쓸쓸하고, 소름 끼치는 선율이 떠오른다.
그나저나 마지막으로 스포일러라도 하나 터뜨려야 하는데,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는다. ‘소녀가 뱀파이어야’라고 소리 지르고 싶지만 그건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거고, 앞쪽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스포일러를 터뜨리기엔 너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스포일러 폭탄은 다음번으로 미뤄야겠다.
마지막으로 스웨덴에서 자료를 구해주고, 영화도 보지 않은 채 함께 영화 촬영지를 관람했으며, 이번 글에 대사까지 제공해준 이유진씨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생각해보니, <렛미인>도 정말 좋은 영화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겐 정말 좋은 영화다. <렛미인>만 생각하면 스웨덴의 풍경이 곧바로 떠오를 것이다. 스웨덴의 차가운 바람을 기억해낼 수 없을 때 <렛미인>이 나를 그곳으로 다시 데리고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