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너와 나의 20세기,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11-21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서른한살이었다.
당시 나는 영국의 한 다큐멘터리 프로덕션에 소속된
촬영감독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나와 나의 팀은
1737년 금괴를 싣고 아라비아해에 침몰한
영국상선 인양작업을 촬영하기 위해
인도의 뭄바이에 수개월간 머물고 있었다.

우린 뭄바이 시내의 작은 외국인 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바의 한 구석에 홀로 앉아
만취한 프랑스 관광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당구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담배연기와 술 향기 사이로 간간이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관광객 중 한명과 인도인 청년 사이에 시비가 붙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난 와중에 그가 있는
곳까지 떠밀려갔다.

그는 한국국적 참치잡이 어선의 부주방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다음날이면 뭄바이를 떠난다고 말했다.

우린 많은 인도산 위스키를 마셨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서늘한 바람이 밤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어
그를 그리기 시작했다.
우린 많이 취해 큰 소리로 웃으며 부둣가를 거닐었다.
그는 예술가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밴드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꽤 많은 시를 썼다고도 했다.
한때 미술관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기도 했다는 그는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이 그토록
‘boring’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느날 갑자기 배를 탔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5년이 흘렀다고 한다.

우린 짧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난 홀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춤을 추었고
그는 여전히 조용한 눈으로
나와 나의 하늘색 원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두 위로는 작은 아담스키형 유에프오가 날고 있었고
다음날 그가 뭄바이를 떠났다.

3년 뒤 케미컬 브러더스의 한국 공연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을 때 우린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는 여전히 하얀 손과 조용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우린 그의 자그마한 작업실에서 술을 마시며
서로를 안았다. 그는 어색한 듯 잠시 미소를 지었고
나는 불을 끄기를 원했다.
그는 스탠드를 끈 뒤 비디오를 작동시켰다.

모니터가 밀어내는
하얀 입김들이 그와 나의 맨몸 위로 반사되고 있었다.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거리던 그의 어깨너머로
내가 보고 있던 영상은
2001: a space odyssey의 한 장면이었다.

성냥을 건네며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물체는 멀어질수록 작게 보이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 작아지는 것이죠.

우린 모두 속아왔어요.”

거대한 도시의 미세한 영혼들 위로
작은 유에프오가 날고 있었다.

우린 모두 속아왔어요.

착한금붕어가죽으면가는곳에서

별 byul.org 시낭송모임 ‘별’의 구성원·그래픽/건축 디자이너·작곡가·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작곡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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