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락이 다시 떴다. 새해 벽두에 다시 나타난 그는 ‘너덜너덜해진 젖꼭지’ 이야기로 시작해 공중파 방송사의 대표 예능프로그램들을 모두 장악했다. 개그인생 28년차의 중견이지만, 흔히 신인스타에게나 쓰이는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 하루 9명에서 1만5천명으로 늘어난 그의 미니홈피 방문자 수를 봐도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그의 캐릭터를 등장시킬 모바일 게임이 계획되는가 하면, CF 출연요청이 쇄도하고, 그를 내세운 예능프로그램이 기획되고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최양락은 언제나 웃기는 개그맨이었다. 단지 그동안 방송이 그를 찾지 않았고, 게임 일변도인 지금의 예능프로그램을 그가 거부했을 뿐이다. 최양락과의 인터뷰는 <재미있는 라디오>의 녹음을 마친 지난 1월19일, 본인의 ‘아지트’라고 밝힌 여의도의 한 호프집에서 새우볶음밥을 놓고 진행됐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최양락은 여전히 방송가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부터 리얼과 독설이란 트렌드로 무장한 예능계를 입담 하나로 돌파하는 어느 중년의 투쟁기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 다시 뜬 덕분에 고민이 더 많아졌을 것 같아요.
= 당황스럽죠.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야심만만-예능선수촌>(이하 <야심만만>) 녹화를 했을 때는 그냥 사람들이 재밌어 하겠다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 정도까지…. 처음에는 혼자서 좋다고 끼약끼약 웃고 그랬어요. 방문 걸어잠그고 웃고, 화장실 들어가서도 웃고. 하지만 내가 신인도 아닌데, 여기서 철딱서니없이 엉성하게 대처하면 안될 거 아니에요? 만약 잘 못해서 끝나버리면 더 슬퍼질 것 같아.
- 첫 출연 뒤 바로 <야심만만>의 고정진행자가 됐습니다.
= 그 프로그램은 뭔가가 좀 아쉬워요. 세번 녹화했는데, 세번 모두 ‘오늘 내가 다 죽였다’ 이런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 고정으로 출연한 첫회를 봤습니다. 많이 당황한 것 같았고, 그래서 강호동씨가 일부러 더 오버를 하면서 분위기를 살린 것 같더라고요.
= 결과적으로는 돌발적인 해프닝으로 보였기 때문에 재밌게 갔다고 하지만, 그게 제 스타일은 아니죠. 저는 실수에 의한 웃음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동안 왜 예능을 안 했냐고 그러지만, 지금처럼 게임하고 쿵쿵따하고, 번지점프하는 프로그램에는 센스가 없어요. 뻔한 거잖아요. ‘역시 노인티를 내는 양락’, ’여기서 막히는…’ 분명 이런 자막이 붙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웃기고 싶지 않다는 거죠. 그렇게 보면 <야심만만>의 첫 번째 녹화는 실패였죠. 그렇게 웃겨버렸으니까. 나는 옛날 사람이에요. 나를 최대한 뽑아먹으려 들지 말고 나를 어떻게 하면 사람들한테 더 좋게 보여줄까 고민하면서 보호해줬으면 좋겠어요. 요즘에는 출연자들끼리 말싸움을 시키잖아요? 나는 그것도 걱정이야. 말싸움에서 지는 게 걱정이 아니라, 내가 상처입는 이야기가 나오면 당황할 것 같아. 그럼 또 자막에 ‘당황한 양락, 조용해지는…’이렇게 나올 거 아니에요. 나는 그런 거에 정말 충격을 받는다니까.
- 이전에는 항상 코너 자체를 장악하면서 개그를 했습니다. 신년 초에 출연한 프로그램들에서도 그랬고요. 스타일이 그런 터라 <야심만만>처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끌어가는 프로그램이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 맞아요. 그러니까 문제야. 거기서는 강호동이 주축이고 나는 불쑥 굴러온 돌이잖아요. 이제까지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요. <네로25시> 하나 빼놓고는. 아니다, 네로도 사실 다른 신하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생각도 안 나. 네로 혼자 막 떠드는 거예요. 그래서 최근 출연에서 제일 약했던 게 <샴페인>이었어요.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니까 ‘몰빵’이 없는 거야. 28년 동안 죽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변신이 힘든 거죠. 그러니까 아쉽지. 만족을 못하고.
- 그래도 다시 공중파에 진입했습니다. 예능프로그램에서 또 다른 자리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나요? 혹자는 유재석, 강호동과 경쟁할 수 있을까란 질문도 합니다.
= 그렇게 구도를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야구에서도 선동열이나 최동원, 장효조, 이만수, 이런 선수들이 왕년에 잘했다고 요즘 선수들을 이길 수는 없는 거잖아요. 지금은 우리 시대가 아니에요. 지금 친구들이 주가 맞아요. 나는 지금 강호동 옆에 있는 게 창피하지 않아요. 오히려 행복하죠. 내가 옛날 사고방식이라면 못하겠죠. 내가 왜 얘 옆에 있어, 이러겠지. 나는 이미 다 해먹었잖아요. 지금은 내 개그 인생에서 보너스 같은 거예요.
- 그렇다면 개그맨 최양락이 지금 만들어갈 자리는 어떤 걸까요. 진행 중인 <재미있는 라디오>나 TV에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에게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개그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만.
= 그럴 거예요. 난 개그를 그렇게 합니다. 최양락 개그는 20대한테 빵빵 터지잖아, 이건 좋은 개그가 아니에요. 그럼 60대 노인분들이 제일 좋아하는 개그다? 이것도 별로 안 좋아. 가장 좋은 것은 내 나이 또래 ‘전우’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라디오에서 시사문제를 이야기할 때도 내 또래들이 재밌으면 하는 거죠. 또 나 역시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또래만큼만 알 뿐이에요.
- <야심만만>에서 아들 친구들에게 ‘아저씨 나왔다’고 하는 장면에서 비슷한 연배의 동료분들이 특히 짠했을 것 같아요.
= 애엄마는 눈물을 글썽거리더라고. “아이고, 저 인간 저렇게 끝나는 줄 알고 이야기하는 거봐.” 이러면서…. 사실 다시는 안 하려고 했으니까요.
- 집에서도 가족들을 항상 웃기는 아버지시죠? 어렸을 때부터 가족환경 자체가 그랬나요.
= 우리 아버님은 말씀이 전혀 없으셨어요. 대신 할아버지가 재밌으셨죠. 팽현숙씨를 정말 많이 예뻐하셨어요. (할아버지 목소리로) “여자의 몸으로 서울에서 여기까지 손수 운전을 하고 온다는 건 신문에 나올 얘기야!” (좌중 웃음) “우리 양락이는 도고면장, 아산시장, 충남도지사보다 잘난 거야!” 이러셨지. 그런데 단점이 약주만 하시면 하신 이야기를 또 하고 그러셨어요. 내가 지금 딱 그래요. (웃음)
- 어린 시절을 온양에서 보낸 류승완 감독은 자신이 중학교를 다닐 때도, 이미 ‘최양락’이란 이름이 유명했다고 하던데요. 데뷔하기 전인데도요.
= 그랬을 거예요. 이미 고등학생 때 온양극장이나 예식장 홀을 빌려서 공연하고 그랬으니까. 카세트테이프를 돌리기도 했어요. 방문 걸어잠그고 녹음버튼 눌러놓고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여러분을 만나게 돼 반갑네요. 전 최양락입니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 저랑 함께 해주세요.” 이러면서 녹음한 테이프들이 근처 여고까지 돌고 그랬으니까. 사람들이 쟤는 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뜰 텐데 그랬죠.
- <명랑히어로>의 김유곤 PD는 “이경규가 노력형이라면, 최양락은 천재형”이라고 하던데요. 예전부터 한국에서 자신이 제일 웃긴 개그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 그런 생각이 굉장히 강했죠. 내가 국가대표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좌절도 많이 했죠. 아마 그때 조금 더 겸손했다면, 좌절하는 일이 적었을 수도 있어요. 옛날에는 PD랑도 많이 싸웠거든. “당신은 이대 영문과 나와서 PD를 하고 있지만, 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개그만 공부했어. 다른 건 아예 공부도 안 했어. 이것만 집중했어. 그럼 내 말도 맞는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싸우는 일이 많았죠. 고집도 많이 피웠고.
- 대부분 자신의 뜻이 관철되는 상황이었을 것 같은데요.
= PD들이 많이 양보해줬죠. 예전에는 내가 편집점까지 다 일러줬었어요. 작가가 내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도 했고. “원고 나왔어요, 내가 잘 못 정리했죠?” 그러면 “응, 잘 못 정리했네. 이걸 또 왜 이렇게 풀었냐. 보태지 말고 불러준 대로만 하지” 이랬죠. 지금은 그럴 기력도 없어요. 속은 그렇게 생각해도, 겉은 그냥 좋게나 편집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요. (잠시 매니저와 다음날 촬영할 CF 콘티를 봄)
- 예전에는 CF도 많이 했죠.
= 많이 했어요. 개그맨 중에서 굉장히 많이 한 편이에요. 저가로 많이 했죠. 중저가도 아니고. 1천원 안 넘는 거만 했어요. 과자, 아이스크림, 라면…. 이런 거요. 단가가 1천원을 안 넘는다는 거지. 아, 치킨은 1천원이 넘는구나. 페리카나 알죠? <알까기> 한 뒤에도 주로 과자 CF만 했네. 그때 그것도 700원짜리였는데, 아무튼 1천원을 잘 안 넘어요. (웃음) 내일 찍는 것도 국제전화요금 반값해준다는 내용이야. (좌중 웃음)
- 한때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이하 <청춘 스케치>) <어른들은 몰라요> 같은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최근에는 <맨발의 기봉이>에 카메오로도 등장했고, <잘살아보세>는 시나리오 감수를 했고요. 임하룡씨도 영화배우로 전업했는데, 혹시 공중파 방송을 쉬는 동안 꼭 영화가 아니어도 다른 제의는 없었나요.
= 사투리 감수를 해달라는 제의는 몇번 있었어요. <잘살아보세>는 개그쪽도 각색을 했죠. 그런데 좀 아쉽더라고. 처음부터 날 불렀으면 더 재밌게 했을 텐데…. (웃음) 출연제의는 거의 없었죠. 인기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영화 좋아해요. 배우도 하고 싶죠. 조연급에서 재밌는 캐릭터를 맡아보면 좋을 거 같아. (웃음)
- 개그맨이 아닌 영화배우 임하룡씨를 보면서 부러웠나요.
= 부러웠죠. <웰컴 투 동막골>을 보니까 아주 딱이더라고. 그 형이 부티나는 얼굴이 아니잖아. 그리고 형님 고향이 충북 제천이라 사투리가 약간 이북사투리랑 비슷해요. 나도 나한테 맞는 조연이 있으면 해보고 싶어요. 주연급이 60신 정도 나오나? 그럼 나는 20신 정도로 나오면 되잖아. 10신은 좀 아쉬운 것 같고. 그래 절충해서 15신 정도. (웃음) 아, 이 인터뷰 기사 제목을 “하룡이 형의 뒤를 잇고 싶어요”, “하룡이 형이 너무 부러워요” 이렇게 내보내면 어떨까? 혹시나 정말 캐스팅되면 내가 한턱낼 게요. (좌중 웃음)
- 마침 이번 <씨네21> 합본호에 <청춘 스케치> 스틸이 실렸습니다. 정말 젊은 모습이던데요.
= 사실 그때 태흥영화사의 전속배우였어요. 이태원 사장님이 날 좋아했거든. 그래서 전속을 2년 했어요. 2년 동안 찍은 게 <청춘 스케치>랑 <어른들은 몰라요>였다고. 그때는 극장 간판에 걸리는 게 꿈이었지. 그런데 <청춘 스케치>의 간판을 보니까 나를 정말 조그맣게 그려놓은 거야. 그래서 이태원 사장한테 내가 막 따졌잖아. 그때 이미 <청춘 스케치>가 서울극장에서 상영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어요. 그런데도 결국에는 간판하는 분 불러다가 베니어판 잘라서 내 것만 별도로 그려서 극장 문 옆에 세웠다고. 따로 내가 그 옆에서 사진도 찍었었고. (웃음)
- <재미있는 라디오>를 통해 시사풍자 개그를 하고 계십니다. 시사풍자라는 게 나름의 정치적 관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 옛날에는 그런 게 있었어요. 일부러 드러내놓고 특정후보를 지원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지금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모습이 안 맞는 것 같아요. 진행자는 특히 그래요. 내 속마음이야 따로 있겠지만,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봐요. 물론 잘 못해서 야당된 거고, 잘해서 여당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집권당이기 때문에 시사풍자에 더 많은 소재로 나오는 게 당연한 거죠. 수위가 센 것도 아니에요. 대통령이 방송 듣고 진노할 만큼은 안 하죠.
- 그래도 청취자를 설정하는 건 있을 것 같습니다. 개그를 할 때도 시청자를 고려하잖아요.
= 일반적으로 나쁘다, 좋다 하는 기준을 보는 거죠. 쇠고기 문제가 터졌을 때, 집권당과 대통령이 인기가 없었잖아요. 그럼 우리도 그 정도에서 방송을 하는 거예요. 지금 대운하를 한다, 안 한다 하고 말이 많은데, 여론이 그래도 결국에는 할 거야라는 쪽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맞춰가는 거죠. 절대 앞서 가지 않으려고 하죠. 나는 정치풍자 개그맨이 아니잖아요. <네로25시> 때문에 그렇게 비쳐졌는데, <고독한 사냥꾼> <알까기>처럼 시사풍자도 개그의 한 종류일 뿐이에요.
- 어떤 자리에서든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게 개그맨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나요.
= 중요한 건 웃음으로 사기를 치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생각하면 할수록 웃기는 개그가 좋은 개그예요. 예전에 팽현숙씨랑 <남 그리고 여>를 할 때, 어떤 분이 “녹화해놓고 한번 더 봤는데, 더 재밌다”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게 진짜 매력있는 개그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개그맨들도 정신 바짝차려서 연구를 해야 해요. 보면 콘테스트 한번 당선되고서는 나이트클럽 다니면서 여자 꼬이려고 하는 애들이 있어요. 이상하게 말도 안 되는 거 하나 유행시켜서 CF만 하려고 하는 애들도 있고. 그런데 지금 시청자의 수준이 개그맨보다 높잖아요. 그랬다간 망신당하지.
- 나중에 어떤 개그맨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나요.
= 음… 서영춘 선생님이 1986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내가 개그맨이면서도 가끔 그분이 연기한 걸 생각하면 막 웃을 때가 있어요. 내가 훗날 이 세상에 없을 때도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아, 그때 최양락이 정말 웃겼는데, 결국 치매로 고생고생하다 죽었구나. (웃음) 옛날에 젖꼭지 너덜너덜해졌다고 이런 이야기했을 때 얼마나 웃겼냐. 이렇게 추억할 수 있는 개그맨으로 남고 싶죠.
인터뷰 당일로부터 일주일 뒤, MBC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최양락을 다시 만났다. <재미있는 라디오>의 생방송을 마치고 나온 그는 다음 주(2월2일)에 방영될 <예능선수촌>을 꼭 보라고 당부했다. “게시판이 난리가 났대요. 왜 최양락을 후반부에만 내보내냐고….” 그래서 앞으로는 전·후반에 걸쳐 입담을 늘어놓게 됐다는 이야기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