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넘은 일이다. 예전에 다른 매체에서 함께 일하던 어느 편집장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마감날 저녁 가끔 심하게 술을 마셨다. 불콰해진 얼굴로 들어와 후배들의 기사를 데스킹했다. 게슴츠레하게 실눈을 뜨고 앉아 졸다가 깨다가 했다. 어느 순간부턴 침몰하는 배처럼 서서히 가라앉았다. 자신의 노트북에만 코를 박고 있던 후배들은 알 리가 없었다. 편집장의 부재를 알아차린 누군가가 낌새를 눈치채곤 소리쳤다. “어, 여기 있던 XX 선배 어디 갔지?” 사방을 둘러봐도 없던 그분은 바로 자신의 책상 아래 바닥에서 변사체처럼 발견됐다. 졸던 와중에 엉덩이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의자에서 미끄러지다가 결국 드러누워 자기까지 했던 거다. 한두달에 한번씩 벌어지던 해프닝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의 난 바르게(!) 일하는 편이다. 마감날 무리하게 알코올을 섭취하지 않는다. 후배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술기운에 기대 자판을 두드리는 이들을 한명도 본 적이 없다. <씨네21>엔 그런 음주문화가 별로 없거니와 마감일정이 예전보다 빡빡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론 <씨네21>도 10여년 전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회사 앞 작은 맥줏집의 흥망을 좌우했다는 전설을 남긴 한 여자 선배가 있었다. 그는 마감을 하다 맥주를 마시러 나가는 게 특기였다. 혼자만 마신 게 아니라, 꼭 후배들을 전화로 꼬드겨 한명 두명 불러모았다. 한두잔 즐기다 돌아오면 좋은데, 한번 사라지면 전화도 잘 안 받았다. 편집장의 처지에선 그리 달갑지 않았을 터. 결국 하루는 편집장이 대폭발했고, 두 사람이 날카로운 언어들을 칼싸움하듯 주고받았다는 야설이 내려온다.
술은 예측불허의 에피소드를 제조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추억이 되면 술자리의 유쾌한 안줏거리로 다시 가공된다. 때로는 추태일지라도 그렇다. 내가 아는 어떤 언론사의 고참 기자는 낮술로 대학교수가 된 케이스다. 어느 날 그는 점심에 회사로 찾아온 취재원들과 폭탄주를 돌리다 ‘자폭’하고 만다. 그것은 ‘육교 위 노상방뇨 감행’이라는 백주의 무시무시한 충격적 액션으로 귀결되었다. 정신을 차린 뒤 주변의 증언을 듣고 뇌진탕에 가까운 쇼크를 받은 그는 당장 술을 끊었다. 그뒤 열심히 학업을 병행한 끝에 박사가 되어 학계에까지 진출했다.
최근 개봉한 <낮술>은 술에 관한 귀엽고 사랑스러운 로드무비다. 겨우 1천만원으로 제작한 독립영화라는데, 50억원으로 만들었다는 코미디영화만큼 낄낄거리고 웃게 해주었다. 이 어수선한 시국에 낮술 마시고 취해 비틀거려서는 안되겠으나, 영화 <낮술>엔 취할 만했다. 술과 관련된 어수선한 옛 기억들이 줄줄이 떠오른 걸 보면 말이다. <낮술>이 이제 관객의 인기에 취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