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한국멜로의 황금시대, 별이지다, <춘향전>의 홍성기 감독
2001-02-22
글 : 황혜림

한국영화계의 황금기를 일구었던 원로감독 홍성기씨가 2월3일 타계했다. 홍성기 감독은 86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오랜 와병 끝에, 2월3일 오전 11시20분경 경기도 수원시 자택에서 78년의 생을 마쳤다. 우연의 일치지만 마침 EBS <한국영화걸작선>에서 그의 <춘향전> 방영을 30여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고, 갑작스런 별세로 이 방송은 뜻밖에 고인에 대한 추모의 자리가 됐다. 홍성기 감독은 80년대 이후 연출에서 손을 떼고 충무로와 별 왕래가 없었던 데다가 오랜 투병생활로 칩거해온 터. 임권택 감독은 “멜로드라마를 많이 찍으면서 신상옥 감독과 함께 당대 한국영화를 열성적으로 이끌던 분이 오랫동안 작품활동 안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조의를 표했다. 삼성서울병원에 5일간 마련된 빈소에는 고인과 오래 함께 작업했던 심우섭 감독, 방기환 조명감독 등 평소의 지인들을 중심으로 김수용, 임권택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들이 다녀갔고, 장례는 지난 2월7일 한국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

요즘 영화세대에게는 생소하겠지만, 홍성기 감독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멜로드라마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감독이다. 1949년 <여성일기>로 데뷔한 이래 80년 <내가 버린 여자 2>까지 모두 26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별아 내 가슴에> <비극은 없다> 등 인기스타를 내세운 화려하고 세련된 감각의 멜로물로 신상옥 감독과 당대 멜로드라마의 쌍벽을 이뤘다. 1924년생인 홍성기 감독은 공무원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철도국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다녔던 그는 만주에서 중학교를 나왔고, 신경 건국대학교 정경학과 2년을 수료한 뒤 만주국립영화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시대극으로 유명한 일본의 우치다 도무 감독의 연출부를 거쳤고, 해방 뒤 귀국해 고려영화사에 들어갔다. 당시 <자유만세>를 찍고 있던 최인규 감독의 연출부로 일했는데, 이때 촬영을 맡고 있던 한형모, 미술부의 신상옥 등 훗날 비슷한 시기에 주목받게 되는 감독들을 만난다. 영화인력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라고는 없었던 국내 실정에서, 이미 촬영과 편집 등 기술적인 훈련을 쌓은 그는 보기드문 재원이었다. 심우섭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자유만세>를 찍을 때 한형모 촬영감독이 시위조로 촬영을 일시 거부한 적이 있는데, 최 감독이 홍성기 감독에게 대신 촬영을 맡기는 바람에 이틀 만에 돌아온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영화 테크닉을 지닌 인력이 드물었던 환경에서 그는 비교적 빨리 충무로의 도제시스템에서 독립할 수 있었고, 1949년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로 기록되는 16mm 작품 <여성일기>로 데뷔했다. 친구의 오빠를 사랑하지만 유부남임을 알게 되자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보육원 사업에 전념하는 여성을 그린 <여성일기>는, 뒷날 스타가 된 황정순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전쟁의 여파로 군사물과 반공영화가 주류를 이루던 54년에 만든 공군 소재의 두 번째 영화 <출격명령>을 제외하면, 그의 영화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한센병에 걸린 시인 한하운의 사랑을 모티브로 한 55년작 <열애>, 불륜의 도피행각을 벌이지만 결국 가정으로 돌아오는 소설가의 이야기인 <실락원의 별>과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벌이는 젊은이들의 사랑을 그린 <청춘극장> 등 김내성의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영화, TV가 없던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던 라디오 드라마를 각색한 <산 넘어 바다 건너> 등 대중적인 감수성에 충실한 상업적 멜로드라마로, 전후의 혼란 속에 위안거리를 찾던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고인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송했던 영화평론가 김종원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약 8년간 가장 잘 나가는 대표적인 흥행감독”이었으며, “당시 멜로드라마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특히 박계주의 인기 신문연재소설을 각색한 1958년작 <별아 내 가슴에>는 외아들을 키우며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남편을 20년간 기다리는 여인의 눈물겨운 사연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이후 한국영화 붐에 일조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 영화의 성공 뒤 그는 그동안 영화에서 짝을 이뤄온 주연배우 김지미씨와 결혼하면서 연예계의 뉴스메이커로 떠오르기도 했다.

당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였지만, 철저한 상업영화 공식에 충실한 그의 작품은 평단에서 이렇다할 인정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맞붙어 화제를 모았던 <춘향전>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해가 컸다는 게 지인들의 말이다. 61년 1월에 개봉한 <춘향전>과 <성춘향>의 흥행대결은 당대의 화젯거리였다. 두 작품 모두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이며, 최인규 감독 문하 동인이면서 당대의 라이벌격인 홍성기, 신상옥 감독이 각각 부인이자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김지미, 최은희를 내세워 만든 영화란 점이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개봉 전에는 흥행 귀재였던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더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 열흘 늦게 극장에 걸린 <성춘향>에 관객이 몰렸다. 우선 캐스팅에서 주인공 이도령 역에 신인급이던 신귀식을 내세운 <춘향전>이 당대의 스타 김진규를 내세운 <성춘향>에 밀렸고, 허장강과 도금봉이 연기한 <성춘향>의 코믹한 방자와 향단이가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 데 비해 진지한 이미지로 알려진 김동원이 연기한 <춘향전>의 방자가 어색했던 것도 실패의 주된 이유였다. “<춘향전> 끝나고 충격을 엄청나게 받았다”고 당시 홍성기 감독을 회고하는 심 감독은, “신필림에서도 만든다니까 먼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초조해서 급하게 만들었겠지만, 그래도 <성춘향>의 코믹성 대신 우리 특유의 잔잔한 사랑이야기가 더 있다”며 당시 관객의 외면이 아쉽다고 말했다.

<춘향전>의 실패 이후에도 <에밀레종> 같은 시대물, <별은 멀어도> 같은 멜로드라마를 만들긴 했지만, 이렇다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진지한 문예영화와 사극이 대세를 이룬 60년대가 지나는 동안 그의 영화는 점차 관객에게서 멀어졌고, 김지미씨와의 결혼도 파경을 맞는 등 그의 영화인생 말년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70년에 <너와 내가 아픔을 같이 했을 때>를 만든 뒤 10년의 침묵 끝에 다시 메가폰을 잡았지만, <내가 버린 여자2>라는 졸속 멜로드라마 속편 기획을 마지막으로 의욕을 잃고 영화를 접었다.

1955년 <애인>부터 촬영부로 들어가 <실락원의 별> <재생> <길은 멀어도> 등 5편 이상의 영화를 촬영하고, 틈틈이 편집을 도맡아하며 홍성기 감독과 함께 작업해온 심우섭 감독은, 그가 “한마디로 다정다감한 분”이라고 기억한다. “정에 약해서 누구든 어려우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세지도 않고 줘버리고, 누가 사정을 하면 자르질 못하는” 성격이라며, 배우나 스탭을 쓸 때도 인정에 이끌려 적당한 인력을 쓰지 못할 경우가 생길 정도였다고. 하지만 카메라의 메커니즘을 잘 아는 감독이라 앵글까지 다 그려진 꼼꼼한 콘티 구성과 편집, 촬영 등에 재주가 많고, 배우의 연기 조절에 능한 감독이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김수용 감독 역시 전성기 홍 감독의 영화가 “콘티 확실하고, 연기 지도가 좋고, 투자도 많이 한 수준급 멜로드라마”라며, “화려한 대작들로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에 어떤 브릿지 역할을 했던 1급 감독”이라고 그에 대해 회고했다.

작품성에선 높은 성가를 누리지 못한다 해도 홍성기 감독은 한국영화 황금기의 토양을 가꾸었다. 전후의 폐허 아래서 곤궁과 불안에 지친 한국인들에게 그는 따뜻한 벗 같은 멜로의 세계를 선사했고, 맞은편에선 김기영, 유현목 등 미학적 에너지로 충만한 감독들이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1960년대엔 그 모든 것이 공존하며 꿈틀거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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