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원에서 방금 나온 여자가 있다. 끊임없이 담배를 피워대는 그녀는 재활원 동료, 직원의 곁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유난히 어두운 눈 그림자와 거칠게 다듬은 단발머리가 설핏 불안해 보인다. 저 멀리 자동차 한대가 다가온다. 여자는 벌떡 일어선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먼 옛날의 과오가 진득하게 달라붙은 끔찍한 스위트홈으로. 그 여자는, 레이첼이 아니라, 킴(앤 해서웨이)이다.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은 혼인서약을 앞둔 양순한 장녀의 이름이다. 재활원에서 몸무게가 불었다지만 아직도 가날픈 전직 모델 킴은 언니 레이첼의 결혼을 맞아 며칠이나마 가족의 품에 다시 안기려는 찰나다. <맨츄리안 켄디데이트>(2004) 이후 다큐멘터리만 고집하던 조나단 드미가 4년 만에 선보인 극영화 <레이첼, 결혼하다>(2008)는 약물중독에서 갓 벗어난 집안의 골칫거리 킴의 귀환과 함께 시작하는 지독한 홈드라마다.
극적이지만 건조하게 밀어붙이는 솜씨
“처음 떠올린 이미지는 이런 거였다. 거울 앞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젊은 신부가 서 있다. 아주 평화로운 순간이다. 그런데 여동생이 신부 대기실로 쳐들어와 모든 걸 망쳐버린다. 나는 그 둘이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할지 귀기울여보기로 했다.” 시나리오작가 제니 루멧의 설명처럼 이 영화의 심장에는 조금만 궤도를 수정했다가는 부딪쳐 산산조각날 한쌍의 자매, 킴과 레이첼이 있다. 미국 코네티컷, 뉴잉글랜드풍의 거대한 저택. 레이첼과 시드니(튠드 아데빔프)의 결혼을 준비하고자 이들 예비부부의 가족은 물론 오랜 친구와 친지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차에서 내린 킴은 부산스레 레이첼의 방으로 뛰어들고 자매는 다정하게 서로를 껴안지만 이들의 대화에서 수상쩍은 기운이 감지된다. 레이첼에게 웨딩 가운을 입혀주던 친구 엠마 역시 묘한 적의를 흘린다. 과장된 환영의 제스처를 나눈 킴은 레이첼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서성인다. 그녀가 걸음을 멈춘 곳은 어떤 이의 소유인지 모를 작은 방. 창가로 다가가 담배연기를 뿜는 킴의 얼굴에 우울한 그림자가 서린다. 이들 가족은 분명 고통스러운 비밀의 역사를 공유한다.
파괴의 화신이자 춤과 음악으로 인간들을 흥분케 하는 힌두교 최고신, 시바. <레이첼, 결혼하다>의 워킹타이틀이 ‘시바와 춤을’(Dancing with Shiva)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결혼이란 지극히 형식적이지만, 가족 내의 문제가 한꺼번에 폭발하기 일쑤인 혼란스러운 통과의례 아니던가. 그러니 “최고로 아름다운 홈비디오”를 만들고 싶었다는 드미의 설명에서 아름다움이란 기대와 두려움, 질투와 선망 등 의식의 참가자들이 품은 이중적인 감정과 거기서 터져나올 카오스적인 에너지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달라 되풀이해 사죄하지만 실상 유치할 정도로 이기적인 막내딸 킴. 거식증을 앓는가 하면 극심한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장녀 레이첼. 막내딸 걱정에 장녀는 뒷전인 아버지 폴(빌 어윈). 그들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조용한 새어머니 캐롤. 그리고 미소 띤 얼굴조차 냉기가 흐르는 친모 애비(데브라 윙거). “크리스마스용 특집 드라마”에나 어울릴 한 가족의 통속적인 비극과 화해를, 드미는 극적이지만 건조하게, 비명이 흘러나올 때까지 굳건히 밀어붙인다.
홈비디오 느낌 살리려 리허설 없이 촬영
그렇다면 감동 아래 손톱을 숨긴 이 홈드라마의 창조자, “극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지만 연출하는 데는 1%의 관심도 없다”던 드미의 마음을 돌린 제니 루멧의 정체는 뭘까. 한때 배우로 활약하기도 했던 그녀는 놀랍게도, <허공에의 질주>의 연출자 시드니 루멧의 딸이자 배우 겸 재즈 싱어 레나 혼의 손녀다. 딸의 간곡한 부탁으로 원고 뭉치를 드미에게 건넨 이 역시 시드니 루멧이었다 한다. 하늘 같은 우상에게 시나리오를 전해 받은 드미는 흥미로운 이야기라 생각하면서도 선뜻 연출을 결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속에 깃든 “공격적이리만치 인디적인 정신”과 순수 창작극에 대한 열망이 그를 설복시켰다. “극영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극본이 나를 흥분시키는 그런 종류의 영화를 만들 기회다 싶더라. 사실 영화제에서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를 봤는데, 이럴 수가, 저만한 용기와 상상력이 있었으면 했거든. 소재에 접근하는 방식이 신선하면서도 완전히 독창적인 영화였다.” 중학교에서 드라마를 가르치던 제니 루멧은 “<스폰지 밥>을 보는 아들에게 치킨 너겟을 데워주다가 틈틈이 써내려간 이 작품”으로 마침내 각본가로 데뷔한다.
문제적인 가족 구성원의 벌거벗은 감정. “플롯이 전무”한 반면에 “캐릭터, 캐릭터, 캐릭터” 일색이던 시나리오의 심장을 싱싱하게 담아내고자 드미가 불러들인 이는 16년간 <지미 카터 맨 프롬 플레인스>(2007)를 비롯해 4편의 다큐멘터리를 함께한 촬영감독 데클란 퀸이었다. “홈비디오를 보는 듯한 느낌을 살려야 했다. 관객이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자리에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제니 루멧의 원작에서 드미가 직감적으로 착안한 건 “도그마 선언의 영향 아래 완성된 <애프터 웨딩> <어둠 속의 댄서> 등과 로버트 알트먼의 연출작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드미와 퀸은 스타일적인 면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방식대로 리허설없이 가는 것”을 제1원칙으로 내세웠다. “배우들에게 경고했다. 의상을 입고 촬영장에 도착하는 순간 게임 시작이다. 언제나 촬영당할 태세를 갖춰라.” 그러니 촬영감독은 핸드헬드 카메라를 짊어진 채 어슬렁거리며 배우들의 연기를 훔쳐낼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하객으로 출연한 엑스트라가 캠코더로 찍은 장면들이 <고스포드 파크>를 편집한 팀 스퀴레스의 손길을 입어 삽입되기도 했다.
누군가는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그 배우가 올해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에 광분하겠지만, 지극히 탈관습적인 이 영화에서 앤 해서웨이는 맨 얼굴 그대로 울거나 괴로워하면서 지난날을 고백한다. 견실했던 밤색 눈동자는 신경질적인 불안으로 흔들리고, 함박웃음이 어울리던 하얀 얼굴은 사춘기 소녀의 그것처럼 일그러진다. “어느 날 레드카펫 행사에서 놀랍도록 생기있는 한 젊은 여성이 시선을 빼앗았다. 동료에게 물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저 사람은 누구지?’ ‘아,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앤 해서웨이잖아.’” 당시를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던 드미는 해서웨이에게 망설임없이 킴 역을 제안했다. “첫 문장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긴 해서웨이는 시나리오를 모두 읽은 뒤 흐느껴 울고 있었고,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드미의 초대에 화답했다. 물론 무수한 하객들이 참석하는 이 웨딩영화에서 해서웨이만이 돋보이는 건 아니다. 로즈마리 드윗(<매드맨> <신데렐라 맨>), 빌 어윈(<CSI>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등의 앙상블도 훌륭하거니와 <맘마미아!>로 하차한 메릴 스트립의 자리를 메운 데브라 윙거는 한순간 얼어붙은 내면 가장 깊숙한 곳, 간신히 감추고 있던 분노와 절망을 꺼내 관객의 마음을 잔인하게 할퀸다.
“누가 그만 좀 하라고 말해주면 안될까?” <레이첼, 결혼하다>의 한 장면. 레이첼과 한바탕 설전을 벌이던 킴은 발코니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일군의 음악가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현실적일 것, 꾸미지 않을 것. 도그마 선언을 염두에 둔 드미의 원칙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인 저택을 라이브 음악이 흐르는 생기어린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니 거실 한쪽에서 들려오는 진짜 노래가 킴과 레이첼의 신경전을 비집고 나른하게 배경을 채우는 이 영화에 뮤지션들이 대거 출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혼 서약을 읊조리는 대신 닐 영의 <Unknown Legend>를 부르는 튠드 아데빔프는 인디 록밴드 ‘TV 온 더 라디오’의 보컬. 바이올리스트 자퍼 타윌, 재즈 색소포니스트 도널드 해리슨, 드미의 18살 난 아들이자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브룩클린 등이 음반회사 간부인 폴과 음반 제작자 시드니의 친구로 등장해 자신만의 선율을 선사한다. 굳이 음악을 연주하지 않더라도 낯익은 얼굴들도 있다. B급영화의 대부 로저 코먼, 드미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던 영국 싱어송라이터 로빈 히치콕과 시스터 캐롤 이스트 역시 게스트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튠드 아데빔프가 차지한 시드니 역까지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이 받아들였다면 더없는 호화캐스팅으로 주목받지 않았을까.
오바마 시대에 걸맞는 민주당적인 영화
더군다나 재즈, 팝, 포크송, 아랍풍 민속음악에 두루 능한 결혼의 증인들은 흑인, 백인, 아시아인, 라틴계 등 다분히 다인종적이다. 많은 리뷰들이 오바마 시대에 딱 들어맞는 민주당적인 영화, 라는 표현을 쓴 것도 수긍할 만하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면서 평생 행복하게 살아갈, 그리고 오바마에게 표를 던질 선하고 착한 사람들을 목격하고 있다.” 카우보이 셔츠를 풀어헤친 백인 노인이 군복을 걸쳐입은 흑인 청년과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평등한 공간. 게다가 백인 여자 레이첼과 흑인 남자 시드니는 인도식 결혼으로 결합을 인정받고, 폴이 두 번째 아내로 받아들인 캐롤 역시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니던가. 고집스러운 인종의 안배는 먼저 흑인과 백인, 거기다 유대계 혈통까지 뒤섞인 제니 루멧의 복잡한 가계도에서 기인했을 것이요, 드미의 진보주의에도 근거가 있을 것이다. 오스카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그의 전작 <필라델피아>(1993)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꼬집는 단단한 드라마였다는 점을 곱씹어보라.
<필라델피아>의 앤드루 배킷, 죽음 직전 승리를 거머쥐었던 그 진취적인 영혼과 달리 이토록 자유로운 화음 속에서도 킴과 레이첼, 폴과 캐롤, 애비에게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지옥 같은 밤을 보낸 뒤 온통 멍이 든 얼굴로 돌아온 킴을 레이첼은 품 안으로 끌어들이지만 그게 진정한 용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느닷없이 들이닥쳐 걱정을 자아내던 비가 그친다. 레이첼과 시드니의 결혼식은 세상 모든 결혼식이 그러하듯 시끌벅적하게 치러진다. 한바탕 축제가 끝나고, 잠시 재활원을 빠져나온 여자는 다시 그곳으로 향한다. 어두운 눈 그림자와 거친 단발머리가 여전히 불안정한 그녀는 계속 줄담배를 피울 테고, 때론 거짓말을 늘어놓을 테고, 대개 자기 연민에 빠져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체득했을 것이다. 어떤 고통을 맞더라도 이 지긋지긋한 가족은 거기에 있으리라고. 서로를 저주하는 한이 있어도 죽기 전까지 결코 그녀의 등 뒤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