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황인뢰 감독의 드라마 <돌아온 일지매>에서 반가운 얼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일지매(정일우)와 대마도에서 우연한 만남을 갖는 미야모토 무사시 역할로 황정리가 출연한 것. 오직 7회에만 카메오 출연했을 뿐이었지만 그 날카로운 눈빛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황정리는 홍콩 무술영화 팬들에게는 전설적인 존재다. <사형도수>(1978)와 <취권>(1978)에서 매서운 눈빛으로 성룡을 끝까지 괴롭혔던 악당이 바로 그다. 화려한 발차기로 우리의 착한 성룡을 쉴새없이 공격하던 악당이 한국 사람임을 알았을 때의 그 황당함과 놀라움이란.
<남권북퇴>(1976)를 시작으로 <남북취권>(1979), <사망탑>(1980), <용지닌자>(1980), <부귀열차>(1986) 등에 출연하며 홍콩영화계를 뒤흔든 최고 용병이자 테크니션이었다. 직접 감독과 주연을 겸했던 <광동살무사>(1983) 외에 <해결사>(1982), <뇌권>(1983) 등 국내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맹활약하던 그는 드라마 <모래시계>(1995)와 영화 <보스>(1996)에 무술감독을 겸해 출연한 이후 사실상 은퇴하고 현재 제주도에 정착해 사업가로 변신했다. 최근 제작이 논의 중인 박광현 감독의 두 번째 영화 <권법>으로 멋진 재기를 노리는 그를 제주도로 찾아가 직접 만났다.
-제주도에 온 이후 출연 제의도 많았을 텐데 어떻게 다 뿌리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드라마 <형제의 강>(1996)이 마지막 작품이었다. 제주도에 정착한 지는 8년쯤 된다. 당시에는 액션영화가 서서히 인기가 없어질 때였고, 또 드라마를 계속 하자니 나처럼 영화만 하던 사람은 좀 성에 안 차는 느낌도 있었다. 그러면서 일절 영화, 방송 제의는 거절하고 지냈다. 지금은 레스토랑을 비롯해서 주류사업, 수산업 등 여러 사업을 벌이고 있다. 2월 내에 씨앗주라고 새로운 술도 출시되는데 거의 비아그라 같은 술이다. 한두잔만 마셔도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데 복분자주 같은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남자들 95%가 효과를 볼 텐데 그 나머지 5%는 아무리 딴 방법을 써도 효과가 없는 남자들일 거다. (웃음)
-최근 유독 <돌아온 일지매>에만 출연한 이유가 궁금하다.
=<돌아온 일지매> 제작사인 지피워크샵의 강석현 대표가 바로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아들인데 내가 제주도에 있다는 것만 알고 백방으로 수소문했더라. 사실 내가 그다지 비중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잠깐을 위해 나를 찾았다는 사실이 참 기분 좋았다. 게다가 최근 나도 박광현 감독과도 만나고 하면서 재기를 생각해보고 있었고 조금 더 지나면 완전히 늙어버리니까(웃음)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옛날 얘기가 가장 듣고 싶다. (웃음) 데뷔해서 홍콩으로 건너가기까지 말이다.
=곽정환 사장이 있던 합동영화사에서 배우를 모집한다고 신문광고를 냈다. 액션배우를 꿈꾸면서 응시를 했는데 지원자들을 버스에 태워서 노량진 어딘가의 체육관으로 다 데리고 갔다. 순서대로 각자 개인기를 선보였는데 내가 7번째였다. 발차기도 보여주고 샌드백도 팍팍 차고 있는데 곽정환 사장과 이두용 감독의 눈이 둥그레지더라. 그래서 그중에서 나 혼자만 바로 뽑혔다. 그런데 정작 역할은 단역이었다. 오디션에서 1순위로 뽑힌 사람이면 몇편 하고 주인공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홍콩으로 가버릴까 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웃음) 그러다 홍콩 오사원 감독이 한국에 <남권북퇴>를 한·홍 합작 형식으로 찍으러 와서 배우들을 물색했다. 합동영화사에 가서 영화 스틸들을 보게 된 건데 그중에 내가 이두용 감독의 <무장해제>(1975)에 출연한 스틸이 있었나보더라. 흰 머리에 갓 쓰고 도포를 두르고 날면서 액션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영화에 딱 한신 그렇게 출연한 거였다. 그걸 보고 오사원이 ‘이 사람 찾아달라’고 한 거다.
-그러고 보니 그 모습이 <남권북퇴>에 출연한 ‘실버 폭스’ 캐릭터와 비슷하다.
=맞다. 그 때문인지 <무장해제>랑 비슷하게 은빛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르고 왕도, 유충량과 싸웠다. 그런데 <남권북퇴>를 촬영하면서 홍콩, 한국 스탭들 사이에 좀 말썽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합동영화사에서 돈 받는 게 아니라 오사원한테서 돈 받고 일하는 거니까 ‘그래도 촬영은 끝내야 하는 거 아닌가’하고 의리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국 배우와 스탭들은 다 짐 싸고 돌아갔는데 나 혼자 남은 거지. 그러다보니 또 한국쪽에서는 앞으로 황태수(당시 가명)를 한국영화에 캐스팅하지 말자는 얘기가 돌았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내 의도대로 됐다. 오사원이 자기와 함께 홍콩으로 가자고 했으니까. (웃음)
-하지만 홍콩영화계에서 적응하기 쉽진 않았을 것 같다.
=일단 한국에서 황태수라는 가명으로 시작했는데 홍콩에서는 황정리라는 본명을 썼다. 황정리(黃正利)라는 이름이 뜻도 좋고 중국어 발음으로 ‘황쩡리!’라고 끝을 올려주면 상당히 멋지게 들리거든. 왜 이런 좋은 본명을 안 썼냐고 다들 그러더라. 그리고 일종의 퍼포먼스 같은 게 있었다. 오사원에게 기자들을 불러달라고 하고 홍콩의 그 어떤 사람도 도전해오면 3분 안에 다 제압할 수 있다고 광고를 했다. (웃음) 침사추이의 한 레스토랑으로 홍콩의 쿵후 사범들을 비롯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후 벌어지는 일들이 대서특필 되니까 영화사 입장에서는 제대로 홍보가 된 거다. 그래서 <남권북퇴>가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물론 내가 떠벌리기만 한 게 아니고 실제 영화에서 잘했으니까 별탈이 없었을 거다. 당시는 강대위, 로례 등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성룡을 비롯한 다음 세대가 등장하던 때였는데 나의 발기술은 홍콩영화계에서도 드문 테크닉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악역으로 딱 좋으니(웃음) 무조건 악역으로 나를 쓰려고 현금 뭉치를 들고 찾아오는 제작자들이 많았다. 관리하는 매니저도 없고 해서 돈을 받으면 그냥 방 벽에다가 벽돌 쌓듯이 차곡차곡 쌓아놓았었다. 정말 엄청났지.
-악역을 많이 해서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클 법도 한데.
=내가 좀 인상이 더럽게 생기지 않았나. (웃음) 그래서 실제 성격이 그런 게 아닌데도 배우나 스탭들이 내 주변에 잘 안 왔다. 원규 감독의 <용지닌자>에 함께 출연한 일본 배우 사나다 히로유키가 있는데, 그 친구도 이전에 내 영화를 보면서 나를 참 좋아했는데 현장에서는 무서워서 접근도 못했다고 하더라. 그렇게 악역으로만 영화에 두세신 정도 출연하는 작품들이 많았으니까 거의 열흘에 한편꼴로 출연했고 그러다보니 지금껏 340편 정도 출연한 것 같다. 당연히 나도 착한 역할도 하고 싶지만 그게 욕심대로 되는 게 아니다.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해본 적도 있지만 그건 내가 봐도 재미가 없다. (웃음) 주인공이 나 같은 악당에게 당하다가 막판에 이겨야 확실한 클라이맥스가 되는 건데, 나는 인상이 너무 세고 실력이 좋으니까 남한테 맞는 것 자체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
-홍콩에서 함께 활동했던 다른 한국 액션배우들에 대한 얘기도 궁금하다.
=나보다 홍콩으로 먼저 건너간 신필름 출신의 홍성중, 쇼브러더스에서 활동했던 남석훈, <사망유희>에서 이소룡과 공연한 황인식 같은 선배들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갔을 땐 다들 한국으로 돌아오셨을 때라 그냥 혼자였다. 이후 왕호, 거룡, 권영문 같은 후배들이 건너와 활동했다. 홍콩에는 무술영화를 찍을 공간이 한정돼 있는데 어떤 산 같은 데를 가면 정말 여러 팀이 동시에 무술영화를 찍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 나와 왕호와 권영문이 각기 다른 세 영화를 가까운 데서 찍게 됐는데 홍콩 스탭들이 서로 다른 촬영장을 기웃거리며 우리의 발차기나 기술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기 황정리 보러 가자, 저기 또 왕호 보러 가자, 그러면서 우리가 주름잡았던 거지. 왕호의 가위차기는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거였고 하여간 정말 뿌듯했다. 황인식 선배는 나 이후에 성룡과 <사제출마>(1980), <용소야>(1982)를 찍었는데, 사실 나나 황인식 선배가 없었다면 그 영화들이 그렇게 인기를 끌지는 못했을 거다. 왜냐하면 무술영화라는 게 공격하는 주인공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일대일로 싸우는 거면 그 공격을 다 받아주는 상대방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성룡은 나한테 ‘어떻게 그리 다음 동작을 잘 알고 다 미리 기다리고 있냐’며 감탄했다. 나나 황인식 선배는 발차기는 물론이고 그 속도에 있어 홍콩 배우들이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떻게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된 건가.
=내 이름으로 영화가 먹힌다는 생각이 들 때쯤, 한국에 가서 내가 만든 영화를 가지고 해외시장을 개척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홍콩 스탭들을 데리고 와서 준비했다. 종로 YMCA호텔에 다들 머무르며 시나리오를 개발했는데, 종로 거리는 늘 시위가 끊이질 않으니 분위기가 어수선한데다 시나리오도 잘 진척이 되지 않아서 거의 6개월 동안 논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도 내가 홍콩에서 돈 많이 벌어왔다는 걸 다들 아니까 아는 사람들이 계속 찾아왔고, 또 안 도와주기도 그렇고 해서 참 돈 많이 썼다. 그 난리를 치면서 내가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영화가 바로 <인무가인>(1980)이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머물던 시기 출연한 영화 중에서는 <해결사>가 가장 인상적이다.
=인천 월미도 근처 폐공장에서 마지막 액션장면을 촬영했는데 배우들이 2층, 3층 오르락내리락하며 다 깨부수면서 액션의 힘만으로 그 건물을 다 철거한 것 같다. (웃음) 이두용 감독의 액션영화는 정말 힘이 넘쳤다. 당시 이두용 감독을 비롯해서 배우들인 신우철, 현길수, 그렇게 넷이서 정말 잘 어울려 다녔다. 그러다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 출연한 첫 작품이 <홍금보의 대나팔>(1986)이었다. 그리고 덕보필름에서 양자경 주연의 <중화전사>(1987) 같은 작품도 했다. 거기 말 타는 장면이 있어서 양자경과는 같이 말 타는 것도 배우고, 나한테 발차기 기술도 가르쳐달라고 해서 가까이 지냈다. 양자경은 액션하면서 다치거나 고름이 날 지경까지 가도 절대 아프다고 하는 법이 없었다. 성공할 수밖에 없는 여자였지.
-배우로서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어떤 아쉬움이 남나.
=언제나 바쁘게 일했고 늘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 후회없이 일했다고 생각한다. 액션배우로서 느꼈던 건 무술감독과 배우를 겸하는 게 참 힘든 일이었고 연출까지 하는 건 더 그랬다. <인무가인>으로 제작과 연출을 꿈꿀 때는 액션영화 역시 치밀한 시나리오 준비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최근에 제작을 해볼까 하는 생각에 시나리오를 맡겼는데 좀 아니다 싶어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역시 난 배우가 체질에 맞는 것 같다. 박광현 감독이 나를 만나러 와서 보자마자, 생각했던 것보다 젊어 보여서 생각했던 장면들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을 때 참 기분 좋았으니까. 어떤가? 나 이렇게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지 않나. 더 늙기 전에 멋진 연기 한번 더 보여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