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결국 매끄러운 감동 멜로였네
2009-03-05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역사는 있으나 역사의식은 제거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현재 극장가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후 <벤자민 버튼>)는 주연배우에 대한 호감도, 스토리에 대한 공감도에서 꽤나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다. 이 영화는 잘 알려졌듯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주인공의 이름이 벤자민 버튼이고 늙은 몸으로 태어나 아이로 죽는다는 것, 친부가 버튼 공장 사장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그 구체적 내용이나 전개방식에서 원작과 영화는 매우 상이하다. 원작 자체는 벤자민 버튼이라는 인물을 통해 역사의 시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냉소하는 짧은 비유에 가깝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서늘한 단편처럼 기이한 상상력을 보이며 냉담과 염인(厭人)의 감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원작에선 단지 ‘비유’일 뿐이었던 발상이 영화에선 그대로 현실이 되어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51686;은 단편은 2시간40분이 넘는 인생 드라마로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냉소와 염인은 사라지며 이해와 공감이 온정적으로 엮인다.

회고로 구성되는 ‘데스베드무비’

임종 직전의 데이지(케이트 블란쳇)가 딸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영화는 시작된다. 정한석 기자는 이를 <포레스트 검프>와 비교한 뒤 주인공이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유형의 영화를 ‘홈타운 무비’라 명명한 바 있다(<씨네21> 689호). 여기에 첨언하자면 나는 <벤자민 버튼>류의 영화를 ‘데스베드(deathbed) 무비’라 부르고 싶다. <아마데우스>나 <이브닝> 등의 영화가 그러하다.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는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마침표를 찍는 인생에서 살짝 벗어난 사람들의 회고로 구성된다. 임종을 앞두고 무언가를 고백하거나 회고함으로써 그들 인생에 있었던 미스터리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벤자민 버튼이 시간을 거꾸로 산다는 초자연적 현상이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가설이 된다. 제목에서부터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가. 따라서 여기서 미스터리의 대상은 벤자민 버튼의 ‘특이한 삶’의 방식, 즉 시간을 거스르는 그의 특이한 삶이 어떠한 방식으로 시간의 단층들과 만나는가이다.

영화 <벤자민 버튼>에 역사는 있으나 역사성은 부재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 이벤트는 있지만 역사적 사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 이벤트마저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클라이맥스에 이른 이후엔 완전히 실종돼 버리고, 그들의 기억은 구체적 역사성을 상실한 채 보편적 감수성의 언저리에만 머물러버리고 만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기억과 시간을 ‘관조’하지만 그것을 실재하는 역사로 ‘경험’한다는 실감을 주지 않는다. 특히 영화의 결말에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추정되는 거대한 태풍으로 인한 커다란 물난리를 암시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그 물결 속에 죽은 사람들의 추억이 행복하게 소환되는 방식은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발생했던 참상을 상기해보건대 그다지 바람직한 방식은 아닌 듯하다.

거꾸로 가는 시간, 즉 역사에 대한 독특한 접근방식이 유효하지 않다면 이 영화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인책은 다른 곳에 있다. 스토리의 대부분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상당히 긴 제목 속에 얼추 들어 있으니 남은 것은 두 배우가 얼마나 상승적인 화학작용을 일으키는가 하는 점인데, 개봉 초인 현재까지의 반응을 보면 두 배우의 능력은 기대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보인다. 고혹적 매력을 지닌 두 배우의 아름다운 얼굴은, 오래 홀로 고독하게 사는 사람의 얼굴에 깊은 주름을 새기는 세월의 흔적을 쉽게 망각시키는 주술적 마력을 지녔다.

영화에서 꽤 길고 고통스럽게 진행되는 벤자민의 유년 시절의 경험이나, 주름진 데이지의 노년의 병실장면은 충격적임에도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만나 사랑을 나누는 벤자민과 데이지가 제시하는 이미지의 우월성이 압도적인 탓이다. 모션캡처의 방식으로 촬영된 얼굴에 물질성이 없어 그다지 경이롭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주연배우의 열연에 대해서 혹은 보편적이면서도 공감 가는 스토리에 대해서만 주로 언급될 뿐 감독인 데이비드 핀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만큼 이 영화에선 핀처-피트의 결합보다는 피트-블란쳇의 우아하고도 낭만적인 만남이 더욱 인상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홍보 역시 충분히 인지도있는 감독의 이름이 아닌 오로지 이 두 배우의 얼굴에 집중하는 것이다.

남은 것은 찬란한 두 배우의 얼굴 뿐

한편으로 <벤자민 버튼>은 남북전쟁을 통해 건국의 역사를 영화사에 남긴 그리피스의 방식처럼, 기억을 통해 미국의 역사를 불러온다. 벤자민과 데이지의 인생은 1차 세계대전 종전부터 2005년까지의 미국의 역사를 포괄한다. 그리고 벤자민이 만난 사람들의 사연 속에서 링컨 대통령의 암살, 남북전쟁, 1·2차 세계대전에 이어 비틀스의 시대를 넘어 포스트 9·11 시기를 포괄한다. 내용의 차원에서 미국의 역사가 개입되었다면, 형식의 차원에서 <벤자민 버튼>은 영화의 역사를 불러들인다. 뤼미에르 형제의 활동사진 양식의 소극(번개를 맞는 장면)에서부터, 고전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상과 필름 누아르를 상기시키는 뉴욕 야경의 시각화까지 이 영화에는 복고적인 분위기도 한껏 살아 있다. 그러나 다만 이 모든 내용과 형식이 멜로의 무의식과 닿아 있다는 것이 한계다. 세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은 그다지 지루하지는 않지만 매우 번잡한 인상을 준다.

형식적 판타지를 허용하면서도, 영화는 욕망의 판타지를 허용하지 않고 대단히 중립적인 노선을 견지한다. 노년의 벤자민과 어린 데이지의 관계 혹은 그 역으로 꽃청년 벤자민과 장년의 데이지의 관계는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은 듯하다. 20세기 초에서 현재까지의 시간을 관통하는 이 영화는 데이지가 벤자민의 삶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기술된다. 그것도 철저히 연대기적이다. 물론 벤자민이라는 인물은 시간을 거스르지만, 그는 여전히 시간의 질서 안에 있다. 단지 늙음에서 젊음으로 역주행할 뿐, 탄생과 성장과 죽음이라는 순차적 질서에 따르는 것이다.

영화는 또한 역사의 격렬한 지점들을 유연하게 피해간다. 이 와중에 원작에는 없던 것이 영화의 중심으로 개입되는데, 그것이 바로 로맨스다. 로맨스는 원작의 역사의식이 제거된 곳에 자리잡았다. 벤자민 버튼은 팽팽한 피부의 아기로 생을 마감하지만, 삶과 사랑과 죽음 이외에도 인생에는 수없이 섬세한 주름들이 많다는 것을 영화는 의도적으로 묵살한다. 매듭 없이 매끄러운 나일론실처럼 영화는 어떤 누빔점 없이 역사의 무대를 술술 빠져 나가버린다. 오로지 남는 것은 꿰맨 자국 없는 매끄러운 감동 멜로의 서사와 가장 아름다운 시절 만나 사랑을 나누던 찬란한 두 배우의 얼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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