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이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와 <내 사랑 동키호테> 사이에 출연한 <칠수와 만수>는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를 힘차게 열어젖힌 작품이다. 동두천에 사는 칠수(박중훈)는 미국으로 떠난 누나를 그리워하고, 매일 술잔을 기울이는 아버지를 안타까워하면서 만수(안성기)의 조수로 극장 간판과 광고탑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 한편으로 여대생 지나(배종옥) 앞에서는 농담과 거짓말을 잊지 않는 넉살 좋은 젊은이이기도 했다. 그렇게 밝은 표정 뒤로 슬픈 가족사를 숨긴 칠수의 얼굴로부터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로카르노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에도 초청됐던 <칠수와 만수>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세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로써 박중훈은 유쾌한 청춘스타의 이미지 그 이상으로 새로운 면모를 각인시키게 된다. 20대 초반에 영평상 남자연기상을 수상하며 ‘신인’이라는 표현과 작별을 고했다고나 할까. 더불어 <칠수와 만수>는 이후 <투캅스>(1993),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라디오 스타>(2006)로 이어지는 안성기와 박중훈의 멋진 앙상블이 시작된 기념비적 작품이기도 하다.
얼마 전이 밸런타인데이라서 하는 얘기인데, 당시 인기가 난리도 아니었다. 하루 평균 팬레터가 많이 오면 200~300통이 올 때니 밸런타인데이 때는 과천우체국에서 조그만 용달차 하나로 초콜릿과 선물을 실어서 보내오곤 했다. 집이 과천 아파트였고 토요일 밤이면 지방 팬들이 정말 많이 올라왔고 하나같이 주말만이라도 식순이를 하겠다고 조를 정도였다.
남부끄럽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젊었을 적 인기’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따지고 보면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주는 팬들의 층과 수는 오히려 지금이 더 많을 수도 있지만, 그때는 정말 열광적으로 10대나 20대 초반 팬들의 사랑을 받을 때였다. 아무래도 젊은 팬들이 더 적극적이니 그건 정말 굉장한 보람과 실감을 준다. 그래서 외람된 얘기지만 당시 신성일, 안성기 같은 선배 배우들이 우습게 보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요즘 한두편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후배들의 우쭐함을 보면 그게 좀 이해가 된다는 거다. 그때 내가 그랬으니까. 정말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렇게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와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를 하면서 내 인기는 최고조였다. 청바지 뱅뱅, 롯데 하비스트 비스킷, DJ콘, 에티켓 치약, 삼립 샤우면, 밀키스 등 거의 10개의 CF를 찍었다. 그래서 모 종합지에서 ‘개런티 1천만원 시대, 고액 광고 개런티 이대로 좋은가’라는 기사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금 광고 개런티에 비하면 한창 낮을 때였지만 그땐 그랬다.
영화 찍다가 얼떨결에 ‘시국모임’도 참석
<칠수와 만수>의 박광수 감독을 만난 건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를 끝내고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를 찍기 전이었다. 사람이 참 좋아 보였다. 묵직한 맛이 있고 지성적으로 보여 깊은 신뢰감을 주었다. 나중에 꼭 영화를 하기로 하고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촬영을 마친 다음 다시 만난 거다. 개런티로는 1300만원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니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당시 장선우 감독과 <성공시대>(1988)를 찍고 있던 만수 역의 안성기 선배가 처음에는 그 역할을 거절했다. 다시 만수 역할이 문성근 형에게까지 갔는데 그 형도 고사했다. 그렇게 마냥 시간을 보내게 됐다. 그런데 난 정말 <칠수와 만수>가 하고 싶었다. 나에게 뭔가 전환점이 될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 그 사이 다른 작품 제의도 들어왔지만 다 거절했을 정도니까. 그때만 해도 ‘가께모찌’(겹치기 출연)가 당연시되던 때라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당시는 배우들에게 “요즘 몇개(작품) 하니?”라는 인사가 자연스러운 때였다. 강수연만 해도 그때 <씨받이> <됴화> <감자> <연산군>을 가께모찌하던 때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안성기 선배 없이 칠수 역의 나와 지나 역의 배종옥 정도만 결정된 채로 크랭크인을 했다. 영화 첫 장면이 민방위 훈련 때 사이렌이 울리면서 나와 배종옥 두 사람만 등장하는 장면이고, 두 사람만 등장하는 장면이 꽤 되니까 별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칠수와 만수>는 촬영 시작부터 크랭크업까지 총 13개월이 걸렸고 한창 잘나갈 때(웃음) <칠수와 만수> 한편만 한 게 나로서는 큰 자부심 중 하나다. 박광수 형은 당시 신촌인가 아현동에서 자취를 할 때라 정말 많이 붙어다녔다. 추운 자취방에서 내가 한 분장도 보여주고 작품 해석도 서로 하면서 열정적으로 영화를 준비했다. 그러면서 종종 나를 어디 데려갔는데 그게 늘 무슨 시국모임 혹은 문화인 모임 같은 데였다. 당시의 난 뭐가 뭔지도 모르고 거기 앉아 있곤 했다. (웃음)
따지고 보면 <칠수와 만수>를 하면서 광수 형을 만나기 전의 나는 평범한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보수적인 학생이었다. 그런데 광수 형의 와이프이자 영화지 <키노>의 편집장을 지냈던 이연호 기자나 연우무대 이상우 연출가 등 진보적 성향의 예술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였던 것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광수 형과 1987년 대선 때는 함께 여러 사람들과 고스톱을 치고 소주를 마시면서 개표 방송을 지켜봤던 기억이 난다. 노태우 후보에 비해 김대중, 김영삼 후보 모두 초반부터 열세가 굳어지면서 우리 얼굴도 굳어지며 속상해서 헤어졌던 기억이 난다. 따지고 보면 배우로 출세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던 때라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좋고 믿음이 가는 감독이었지만 ‘왠지 이 사람 앞으로 잘될 것 같다’, ‘이 사람하고 계속 붙어다니면 유리할 것 같다’하는 얍삽한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웃음) 당시는 충무로에서 연출부 생활 10년 정도 하는 건 기본일 정도로 도제제도가 굳건하던 때였는데 그는 정말 어딘가 달랐다. 실제로 그로부터 한국영화의 뉴웨이브가 시작된 것 아닌가.
13개월간 안 빤 양말, 그리고 낚시의자
그러다 촬영 시작되고 얼마 안 가 드디어 안성기 선배가 참여했다. 두말할 것 없이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배우다. 지금도 나에게는 멘토 같은 사람이고 이정표 같은 선배다. 영화하기 전부터 좋아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적도의 꽃>(1983)을 보면서 다른 한국 남자배우에게서는 없는 독특한 매력을 느꼈다. <깊고 푸른 밤>(1984)도 마찬가지고. 게다가 이름이 주는 카리스마도 남달랐다. 안성기, 하니까 뭔가 무협소설이나 기업극화 같은 데나 등장할 것 같은 ‘마성기’같은 느낌도 나서 뭔가 좀 있어보였다. (웃음)
영화 일을 시작하고서도 그를 가까이 하고 싶다는 생각에 호시탐탐 기회만 엿봤다. 그래서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촬영을 끝냈을 때 안성기 선배는 이석기 감독의 <성 리수일뎐>(1987)을 찍을 때였는데, 마침 <성 리수일뎐> 조감독이 친한 강우석 형이어서 ‘최고 배우 안성기는 어떻게 영화를 찍나’ 지켜보려고 형을 통해 ‘접근’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대천해수욕장에서 촬영이 있던 날 안성기 선배가 직접 운전하는 스텔라를 타고 하루 종일 오고간 적 있다. 정말 영광이었지. 하여간 <칠수와 만수>가 동아수출공사 작품이었는데 마침 안성기 선배도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을 만든 동아수출공사의 이우석 사장과 친분이 있어서 오랜 설득 끝에 <칠수와 만수>에 출연하게 됐다.
선배가 옆에 있어서 그랬는지 정말 열심히 작품에 임했다. 배고픈 페인트공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13개월 동안 양말을 안 빨았다. 촬영이 끝나면 차에 던져두고 다시 다음날 신고 그러면서 아예 빨지를 않아서 고린내가 장난이 아니었다. 사실 옷도 안 빨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딱 한번 겹치기 출연을 한 적 있는데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에서 함께 출연했던 진유영 형이 직접 천호진 주연의 <지금은 양지>(1988)를 연출했고, 거기 장례식장에서 행패를 부리는 문상객으로 최재성과 함께 딱 하루 카메오 출연한 적이 있다. 물론 그 안 빤 옷을 입고 가서 말이다.
아무튼 <칠수와 만수>에 대한 애착이 커서 늘 촬영 전부터 100% 다 맞춰보고 리허설을 완벽하게 끝냈는데 그러다보니 막상 슛 들어가면 지쳤다. (웃음) 그걸 보더니 안 선배가 너무 그렇게 연습을 100% 하면 안 좋다는 충고도 해줬다. 게다가 안성기 선배가 의자까지 줬다. 그전까지 보통 촬영현장에서 벽에 기대서 기다리거나 허리 아프면 다리 하나 벽에 대고 그렇게 있었는데, 처음으로 현장에서 자리에 앉게 된 거다. 내가 서서 빌빌대고 있으니까 대뜸 차 트렁크에서 엉덩이 하나 겨우 들어가는 낚시 보조의자를 내주셨다. 생각해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순간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공식적으로 처음 영화 현장에서 내 의자가 생긴 날이었다. 그날이 너무 생생해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후 다른 후배들하고 영화를 하게 되면 촬영 의자를 선물하는 습관이 생겼다. <불후의 명작>(2000)의 송윤아, <세이 예스>(2001)의 김주혁과 추상미가 내 의자를 받은 후배들인데 그 이후로는 제작부에서 알아서 의자를 마련해주기에 더이상 그럴 필요는 없게 됐다.(웃음)
아찔한 옥상 촬영에 임권택 감독 “미쳤구먼”
<칠수와 만수>의 하이라이트는 강남터미널 옆 빌딩에서 벌어지는 후반부 옥상 시퀀스다. 옥외 광고탑 그림을 그리던 칠수와 만수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장면인데, 지상으로부터 족히 30~40m는 됐다. 쉽게 말해 10층 건물 옥상에서 다시 한참 올라가야 우리의 공간이 나오는 거다. 옥상 철탑이 X자로 한없이 이어져 있고 우리는 정말 아무런 보조 장비 없이 그걸 스파이더맨처럼 맨손으로 타고 올라가서 한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공간에 도착해 연기를 했다. 서 있는 합판도 철사줄로 묶어놓은 거라 강풍이 불면 흔들흔들했다. 그 옥상 시퀀스가 영화에서 족히 20~30분은 되니까 옥외 광고탑에서 거의 3개월 정도 촬영한 거다. 그렇게 우리가 위험한 광고탑 위에서 소리치고 그러면 유영길 촬영감독은 또 “성기야, 중훈아, 좀더 앞으로!” 그랬다. 밑에서는 거의 90도로 앙각으로 올려다보며 촬영하고 있으니 우리가 앞으로 나오면 나올수록 더 상반신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그런 건데 정말 우리는 그럴수록 아찔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장면은 따로 광고탑 윗부분만 세트를 만들어서 1~2m 위에 설치하고는 촬영해야 하는 게 맞다. 그래야 배우나 스탭들도 안전하고 더 다양한 동작을 연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옥상장면을 촬영하던 중에 마침 임권택 감독님도 현장을 방문하셨는데, 그 옛날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를 해오신 임 감독님도 그 광경을 보고는 농담처럼 “다들 미쳤구먼” 하고 얘기하셨다더라. (웃음) 임 감독님과의 이전 인연을 살짝 소개하자면, <깜보>를 막 끝내고 <티켓>(1986)에서 극중 전세영에게 돈 얻어 쓰는 못된 대학생 남자친구 ‘민수’ 역할을 제의받은 적 있었는데 사정상 함께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완성된 영화는 역시 또 개봉이 문제였다. <깜보>가 검열과 싸웠고,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가 당시 시위대와 싸웠다면 이번에는 TV와의 싸움이었다. <칠수와 만수> 개봉일이 바로 5공 청문회 기간 중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나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장세동을 쩔쩔매게 해서 청문회 스타가 됐다는 건 뭐 다 아는 일일 테고. 하여간 난 왜 이렇게 개봉일에 일이 많은지. (웃음) 최종적으로 <칠수와 만수>는 7만 관객 정도를 동원했다. 히트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은 셈이다. 그렇게 다들 열정적으로 참여한 작품이 바로 <칠수와 만수>였다. 한국영화로서는 거의 동시녹음이 안착되기 시작한 작품이고 음악도 김수철씨가 맡았고, 유영길 촬영감독의 존재는 물론 당시 각광받는 신인감독 박광수가 만든 어두운 시절의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였다. 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안성기의 출연은 말할 것도 없고. 물론 나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축구로 치면 신인선수가 국가대표로 뽑혀 큰 경기를 치르게 되면 부쩍 성장한다. 나에게는 <칠수와 만수>가 그런 작품이다. 어린 나이에 영평상 남자연기상도 수상했고 대종상에도 후보로 올랐다. 정말 꿈같았다. 내가 어린 축구 선수라면 A매치 데뷔골을 넣은 작품이 바로 <칠수와 만수>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