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포커스] 3만3천명이 21분을 도난당했다
2009-03-11
글 : 강병진
수입사 맘대로 가위질해 극장에 건 <블레임 : 인류멸망 2011>… 새로운 자막 집어넣기도

*<블레임: 인류멸망 2011>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38분에서 117분으로. 지난 2월26일 개봉한 영화 <블레임: 인류멸망 2011>(이하 <블레임>)이 수입사들 사이에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국내 상영버전에서는 원래 러닝타임인 138분에서 117분으로 20여분이 삭제됐다는 것이다. KTH의 첫 수입작인 이 영화는 <문차일드 > <비밀여행>의 제제 다카히사 감독이 연출하고 쓰마부키 사토시가 출연한 작품이다. 개봉 전부터 2시간46분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2시간3분인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와 함께 2시간18분짜리 영화로 ‘상당히 긴 작품’으로 꼽혔던 영화다. 확인결과 IMDb에도 138분으로 기입되어 있으며 영상물등급위원회 사이트에도 138분이 상영시간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3월3일, CJ CGV에서 상영되고 있는 <블레임>의 상영시간은 117분으로 확인됐다. 정리하자면 <블레임>은 한국에서 등급심사를 받은 뒤 재편집된 것이다. 도대체 이 20분은 어쩌다 사라진 걸까.

117분으로 줄어들며 결말도 달라져

<블레임>에 대한 ‘클레임’이 제기된 건 기자시사가 열린 지난 2월17일부터였다. 미리 원본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 영화의 결말이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원본의 결말에서는 바이러스에 공격당해 초토화된 마을 사람들의 후일담을 보여준다. <씨네21> 사이트에서 ‘’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고정수씨는 “극중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던 간호사가 죽는데, 원작의 결말에서는 그녀의 남편이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나오며 바이러스로 죽은 여자친구를 그리워하는 남자고등학생의 모습이 등장한다”고 말했다. 또한 극중에서 마츠오카(쓰마부키 사토시)와 에이코(단 레이)의 첫만남이 플래시백으로 묘사되고,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명언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기자시사회에서 상영된 <블레임>의 결말은 몇줄의 자막이 대체했다. “일본 정부는 반년 동안 백신을 연구하지만, 백신 개발에 실패한다. 블레임은 결국 다른 나라에도 퍼져 인류를 위협한다.” “원작의 결말이 희망적인 분위기에서 끝내려 한 것과 달리 한국 버전은 절망적인 분위기에서 끝냈다”는 한 수입사 관계자의 말이 적절한 비교일 것이다.

이에 대해 KTH쪽은 “길이조정이 있었지만, 3월4일부터 원본상영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한 기자시사회와 일반시사회에서 상영된 버전과 달리 극장상영버전에서는 원작의 결말은 삭제하지 않았고, 대신 영화의 앞부분을 편집해 117분으로 조정했다고 해명했다. <블레임>의 일본 제작사인 TBS가 기자시사회 뒤 KTH쪽에 원본상영을 요구했고,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원본 프린트를 다시 제작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3월4일부터 138분의 <블레임>을 상영하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쪽 항의로 일주일 뒤에야 원본 상영

20여분을 삭제한 배경에 대해 KTH 파란서비스본부 파란전략팀 PR파트의 임현정 과장은 “상영시간이 너무 길어 편성상의 문제가 있었고, 이 밖에 국내 실정에 맞추기 힘든 여러 가지 이유로 편집이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또한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는 병원신이 많았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에 문제가 없는 부분만” 편집했으며 원본프린트를 상영하기로 하면서 현재는 TBS와도 원만한 합의를 이루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자시사회 버전과 원본의 결말이 달라진 것은 단순히 길이조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원본에는 “백신개발에 실패했고 인류가 멸망했다”는 한국 버전의 자막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자막은 있으나 전달하는 내용이 다르다. 영화의 흐름상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간간이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를 알리던 원본의 자막은 마지막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해준다. “6개월 뒤 백신이 완성, 블레임은 서서히 잠잠해져 갔다. 2011년 7월11일 일본 내 감염자 3950명, 사망자 1120만명.” 수입사인 KTH는 자체 편집과정에서 원작에 없는 새로운 자막을 삽입해 아예 새로운 결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에 대해 KTH 컨텐츠사업부문 컨텐츠기획팀의 정원희 과장은 “처음에 마지막의 해결 국면을 삭제하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맞지 않아 내부적으로 수정을 했다”고 말했다.

앞서 KTH가 밝힌 것처럼 현재 <블레임>은 138분의 원본버전으로 상영되고 있다. 원본 프린트를 상영하면서 개봉 당시 117개였던 <블레임>의 스크린 수는 14개로 줄어들었다. 20여분이 늘어나면서 모든 극장이 상영스케줄을 조절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케줄을 조절할 수 있는 극장에서만 상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라진 20분을 다시 되찾아놨다고 해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 이미 개봉 첫주에 돈을 내고 <블레임>을 관람한 관객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블레임>이 3월1일까지 동원한 관객은 3만2956명이다. KTH는 기자시사회로 시작해 일반시사회를 거쳐 1주차 상영 때까지 원본에서 20여분이 편집된 버전을 상영한다는 것을 공지하지 않았고, 임의적으로 결말을 바꿨다는 부분을 숨겨왔다. 만약 원본 상영 이후, 이 관객이 불만사례를 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환불이나 티켓을 가져오면 138분의 <블레임>을 다시 보여주는 식의 해법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에 대해 KTH는 아직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임현정 과장은 “환불문제까지 결정해서 말하기는 힘들다”며 “만약 여러 가지 불만사례들이 있다면 사례에 따라서 처리하는 것은 고려하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편집본으로 관람한 이들 위한 보상책은?

어쩌면 <블레임>에 대한 이러한 구설수는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 외화들의 해외상영시간과 국내상영시간에 몇분씩 차이가 있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수입사들 사이에서 상영시간을 조정하는 일은 관례로 익숙해져 있고, 과거에는 아예 극장주들이 편집을 하기도 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이 한국에서 상영될 당시 한 지방극장주가 영화의 첫 시퀀스가 마지막에 반복되는 것을 보고 편집이 잘못된 것 같다며 자체적으로 삭제했다는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심지어 편집된 버전이 원본보다 영화를 관람하는 측면에서는 훨씬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당시간을 편집할 경우, 혹은 한국의 심의제도 때문에 편집이 불가피한 경우 등에는 먼저 원저작권자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이기도 하다. 이상일 감독의 <훌라걸스>는 감독의 동의하에 편집된 버전이 상영됐었다. 최근에 개봉이 결정된 <숏버스>는 존 카메론 미첼이 각국의 심의기준을 고려해 성기노출 장면에 가림처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블레임>은 재편집 당시 원저작권자의 동의가 없었고, 편집 뒤 원저작권자의 요구에 의해 원본상영을 결정했다. 또한 재편집 과정에서 아예 결말을 180도 다른 분위기로 바꾸려는 시도까지 했다. 수입사들의 자의적인 편집이 관례적인 일일 수는 있지만, 무리한 편집이 무리한 창조에까지 이르게 만든 이 사건은 단지 해프닝으로만 볼 수 없을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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