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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이 당기는 사건’(The Curious Case of…)이라고 영문 제목 자체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166분의 상영시간 동안 난 그 호기심이 어떤 정념이나 정동을 충분히 호출하지 않아 때로 지루한 느낌조차 들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에서 추출한 경이롭고 그로테스크하며 우화적일 수도 있었던 영화는 이상하게 어떤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 그렇다고 웰메이드 영화가 아닌 것은 아니다. 군데군데 호감 가는 장면과 대사들도 많다. 양로원에서 “난 번개를 일곱번 맞았거든” 하고 읊조리는 노인네의 인생 회고를 비주얼화하는 ‘번개 치는’ 장면은 재미있다. 이 부분은 영화의 엔딩 부분, 인생 다이제스트판에도 재등장한다. 누구는 엄마가 되기 위해 살고, 누구는 번개 맞으며 살고…. 인생 번개, 번개 맞은 인생이 이 영화 희비극의 핵인 듯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찾아보니 벤자민 버튼을 연기한 브래드 피트도 이 대사가 마음에 든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은근히 세트임을 드러내는 미술 장치도 항구의 예인선 부분에서 훌륭하다.
부자간의 기묘한 갈등은 사라지고…
영화가 워낙 유별난 설정- 노인에서 유아로 거꾸로 인생이 전개되는- 을 하고 있고 또 프로듀서가 18년간 만들고 싶어 노심초사한 작품인데 최근에야 완성된 것으로 보면 이 벤자민 버튼이라는 인물을 최근 미국의 ‘개념적 인물’ 중 하나로 읽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당대의 생각을 육화해서 체화하는 인물 말이다. 1920년대에 그 시대적 기원을 둔 인물이긴 하지만 영화 대본은 그 단편소설과 상당한 차이가 난다. 단편소설은 벤자민 버튼과 그 아버지 또 그 아들간의 팽팽한 권력 싸움을 암시하지만, 영화 대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나이를 거꾸로 먹더라도) 여성에게 돌봄이나 사랑을 받는 남자아이, 노인, 청년의 남성 변형 판타지를 브래트 피트를 통해 구현한다. 나이를 거꾸로 먹으니 연인이 어머니 역할로 되돌아와 자신을 돌보아주는 것이다. 황혼 이혼 대신 황혼 엄마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벤자민은 연인이었던 데이지의 품에서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로 생을 마치게 된다. 흥미롭게도 <체인질링>이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각기 다른 경로를 거쳐 아버지된 책임을 못 이기고 떠나는 남자를 다룬다. 표명된 이유는 완전히 다르지만 이러한 무의식의 구조가 현실에 남기는 것은 아이를 혼자 책임져야 하는 엄마다.
즉, 이 영화는 처음 설정은 깜짝 놀랄 만한 비극적 상황을 시도하지만- 태어나면서 엄마가 죽고, 아버지에 의해 버려지며 노인의 몸을 하고 태어난 아기다- 사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청년기를 제외하곤 어머니에게 돌봄을 받고자 하는 남성의 판타지가 전도된 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대신 많은 여자들의 연민을 받으면서 전개된다.
그래서 기차역에 걸린 거꾸로 가는 시계와 거꾸로 가는 생체시계 등 시간에 관한 제시와 암시들이 넘쳐나지만, 이 영화는 시간에 관한 명상으로 넘쳐나지 않는다.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유서 깊은 가문에 관한 이야기도 물론 아니다. 벤자민 버튼은 아버지의 버튼 공장을 팔아 그 돈을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에게 준다. 집을 팔면서 집안의 초상화도 함께 넘겨준다. <포레스트 검프>와 같은 디지털로 가능한 역사 수정에 관심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이야기인가 하면 저 이야기이기도 해서 어디서 심화 체험이 가능할까 하고 자문할 때쯤 시시콜콜한 사족도 등장한다. 데이지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에서의 <슬라이딩 도어즈>와 같은 운명에 관한 자문은 편집에서 잘려나가는 편이 나았겠다.
영화 대본은 또 단편소설과는 달리 벤자민 버튼을 백인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블랙 아메리칸 ‘마마’ 퀴니(폰 체임버스)에게 양육되는 것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마마 퀴니 덕분에 아기 노인인 그는 다른 노인들과 함께 양로원에서 성장한다. 예컨대 피츠제럴드식의 20년대 예일, 하버드대를 거치는 엘리트 백인 벤자민과 아버지와 아들간의 기묘한 갈등이 사라지고 블랙 아메리칸 양모 손에서 양육된 인물이 영화에 등장한 것이다. 블랙 아메리칸 영웅이 등장할 만한 시대정신이 은밀하게 작동되고 있다.
이상이 166분에 걸친 서사의 고전적이고 아날로그적 측면과 그 변형이라고 한다면 예의 개념적 인물로 돌아가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쌍을 들여다보자. 오스카상 결과를 이 영화에 대한 잣대로 들이댈 생각은 없지만, 영화는 13개 부문의 후보상에 올랐으나 분장, 시각효과상, 미술상을 받았다. 감독상, 작품상, 연기상과 같은 주요 상에선 제외된 것이다. 적절한 선택적 수상이라고 생각된다.
오스카에서 인정받은 분장·시각효과
알려진 대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하는 벤자민 버튼의 유년에서 노년까지의 모습, 행동, 양태는 뛰어난 분장과 디지털 도메인이 담당한 시각효과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튜브에 가면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렉 캐놈의 상세한 인터뷰가 나온다. 이 인터뷰들은 영화가 뉴올리언스에서 촬영을 할 때 제작된 것들이다. 그는 매우 얇은 티슈, 거의 멤브레인 제품 같은 것을 얼굴에 씌워 주름살을 만드는 섬세한 작업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정교한 메이크업과 더불어 아기 때부터 76살까지 연기에 일관성을 준 것은 디지털 도메인의 디지털 감정 라이브러리로 데이터베이스화한 브래드 피트의 감정에 따른 갖가지 표정들이다.
먼저 브래드 피트의 기기묘묘한 감정의 변화를 데이터베이스화해놓고 연령에 맞는 체격을 한 배우들에게 블루 스크린 대신 블루 후드를 씌어 연기하게 한 뒤 거기에 브래드 피트의 목소리와 컴퓨터그래픽화된 퍼포먼스를 입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전의 영화 같으면 브래드 피트의 유년 역, 청·중·장년 역, 노년 역 등 다중 배우들이 필요했겠지만 결국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 대역을 제외하곤 정교한 분장을 한 브래드 피트와 CG 퍼포먼스가 스크린상의 벤자민 버튼을 다 해낸 것이다.
그래서 단편소설일 때는 문학적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벤자민 버튼의 케이스가 2007년, 2008년의 영화에 와선 기묘한 디지털 매직의 케이스 스터디감이 된다. 위의 <체인질링>과도 이 영화는 우연한 짝을 이루었지만, 역시 안젤리나 졸리가 디지털 감정 라이브러리를 제공했던 <베오울프>의 마녀 역이 신화적 질서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화한 것이라고 한다면 벤자민 버튼은 미국의 근현대에 대한 적용이다.
같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디지털 도메인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케이트 블란쳇의 데이지는 다른 영화보다 더 정교한 정도지만, 벤자민 버튼의 전 생애의 변화의 추이를 메이크업과 컴퓨터그래픽 퍼포먼스로 따라가는 것은 거의 강박에 가깝다. 물론 <세븐>에서 시작된 데이비드 핀처와 브래드 피트의 오랜 협업도 있고 이 배우의 스타성에도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베오울프>를 전후해 컴퓨터그래픽과 배우의 퍼포먼스를 결합해나가는 할리우드, 그리고 좀더 확대하자면 할리우드와 미국, 글로벌 시장을 설득할 수 있는 포스트 포디즘 시대 일종의 디지털 ‘개념 인물’로 벤자민 버튼을 볼 수 있다. 이 시도는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베오울프> 때보다는 언캐니 밸리의 영역이 줄어들었으며, 친밀감을 준다.
왜 과학적 의료 담론은 쏙 빠졌나
아이러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디지털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영화에서는 시계 제조나 버튼 제조를 제외하곤 산업화, 합리성과 함께 근대성의 배열을 만드는 과학적 의료 담론에 관한 어떤 언급도 없다는 점이다. 벤자민 버튼과 같은 의료 케이스가 있는지, 학명은 무엇인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시사가 없고, 영화는 그 사실을 의학적으로 묻지도 캐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성령 치료 장면이 있고 영화 중반에 이르면 마마 퀴니는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을 향해 성령의 힘일 것이라고 말한다. 일단 의학적으로 파고들어가면 영화가 성립하지 못할 수도 있고, 주인공이 지닌 불가사의한 삶의 시간의 운용에 대한 신비가 줄어들어서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의료 담론의 부재로 영화는 매직처럼 인물을 등장시키고, 디지털 매직이 그의 전 생애에 걸친 퍼포먼스를 가능케 한다. 유전학 등의 발달로 생정치가 점점 교묘해지고, 몸의 ‘신비’가 과학의 영역에 포섭되어갈 때 벤자민의 케이스는 어떻게 보자면 시대 착오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시대 착오성이 디지털 매직으로 현실적인 것으로 증강되면서 벤자민 버튼을 오히려 친근한 대중성과 기묘한 재현성이 결합된 인물, 당대 할리우드의 ‘개념’적 인물로 만들어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