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호메로스의 영웅처럼 숭고한
2009-03-19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자신을 모욕하는 세상에 ‘복수의 램 잼’을 날리는 <더 레슬러>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분노의 주먹>의 첫 장면을 떠올렸다. 사각의 링에서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었다가 추락의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주인공은 유사한 인물이지만 자신의 몰락에 대처하는 방식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더 레슬러>는 퇴물 레슬러 랜디 램(미키 루크)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램 잼’을 하기 위해 로프 위로 올라가 링 바닥을 향해 몸을 날려 공중에 뜬 순간 화면이 정지되고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이 낙하를 통한 비상의 순간을 포착한다면, <분노의 주먹>의 첫 장면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하락하는 삶의 한 국면을 도려낸다. 마틴 스코시즈는 복싱계를 은퇴한 중년의 제이크 라모타(로버트 드 니로)가 클럽 분장실에서 스탠딩 코미디를 연습하는 장면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제이크는 자신의 전성기를 소재로 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다음 “그것이 엔터테인먼트다”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이들의 상반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에 ‘엔터테인먼트’라는 단어가 있다. 모두가 ‘쇼’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시합의 얼개를 미리 짜놓는 레슬링을 하면서도 랜디는 그것을 엔터테인먼트라고 생각하지 않는 반면, 제이크는 복싱뿐 아니라 삶 전체를 엔터테인먼트로 파악한다. 몰락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원하는 퇴물 레슬러의 숭고한 마지막 선택을 보여주는 <더 레슬러>와 오만하고 폭력적인 복서 제이크 라모타의 삶이 어떻게 망가져갔는지를 되짚어보는 <분노의 주먹>의 간극은 크다. 그러나 랜디와 제이크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인간 승리형 인물은 아니다. 가령, 엔터테인먼트라는 단어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록키 발보아>와는 가는 길이 다르다.

실패와 거절 속에 외로운 사람들

<더 레슬러>는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처럼 정해진 운명을 향해 서사를 진전시킨다. 그 운명은 죽음의 선택이고 그 죽음의 의미는 링 안의 삶이 진실했다는 신념을 증명하는 것이다. 랜디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몇 차례 노력하지만 결국 운명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여기에 비하면 제이크의 삶은 영화가 발명되기 전 근대소설이 발견해낸 세계와 일치한다. 길을 인도할 밤하늘의 별을 상실한 고독한 개인이 출구없는 미로 같은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근대의 장르인 소설이다. 근대 이후 개인은 어떤 의미도 미션도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해답없는 삶을 살고 있다.

왕년의 챔피언 제이크 라모타는 온 세상을 그의 링으로 여기고 또 한판의 엔터테인먼트를 벌인다. 그러나 랜디에게 링과 링 밖의 세상은 전혀 다른 곳이며 그가 진정으로 귀속되고 싶어 하는 세상은 링이다. 영화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랜디가 로빈 람진스키라는 본명을 한사코 거부하며 랜디로 불러달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가 원하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로빈으로서 그는 실패한 가장이자 외로운 중년남자일 뿐이지만 랜디로서 그는 찬란했던 과거를 간직한 명예로운 레슬러이다. 그럼에도 랜디는 레슬링 링에서 내려와 세상이라는 링으로 들어가고자 시도한다. 랜디를 세상의 링으로 불러낸 인물은 스트립 댄서 캐시디와 그의 딸이다. 다시 가족을 구성하고 가장이 될 희망에 부푼 그는 랜디가 아닌 로빈으로 삶의 모드를 전환한다. 랜디가 로빈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대형마트의 샐러드 바 코너로 들어갈 때 화면 구성은 그가 레슬링을 하기 위해 장내로 입장할 때 모습과 흡사하다. 투명 비닐로 된 휘장을 가르고 샐러드 바로 들어가는 랜디의 뒷모습에서 세상과 결전을 벌이겠다는 레슬러의 의욕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마지막 시합에서 랜디가 붉은색 천으로 된 휘장을 걷고 걸어나오는 앞모습과 정확히 조응된다. 그러나 짧았던 희망의 시간은 허망하게 끝이 난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었던 캐시디는 그저 댄서와 고객의 관계였을 뿐이라고 선을 그어 랜디의 가슴에 상처를 낸다.

랜디와 캐시디는 두개의 정체성을 오가는 쌍생아 같은 존재다. 캐시디 역시 랜디처럼 두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클럽에서 춤을 출 때는 캐시디지만 아홉살배기 아들의 엄마로서 그녀는 팸이다. 캐시디는 랜디가 손님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쉽게 판단하지 못한다. 거래에 의한 관계가 주는 피곤함과 얄팍함에 지친 캐시디는 대가없이 랜디에게 호의를 베풀지만 곧 후회한다. 캐시디가 충동적으로 랜디와 데이트 약속을 하기 전, 그녀는 클럽 안 모든 남자들에게 거부당한다. 캐시디의 시점숏으로 잡은 카메라가 클럽 안 남자들의 모습을 훑는 화면에서 그녀가 얼마나 그들에게 넌더리를 내는지 느껴진다. 심장수술을 받고도 위로받을 사람 하나 없는 랜디나 아이 엄마라는 사실을 숨기고 남자들에게 호객행위를 해야 하는 캐시디나 똑같이 외로운 사람들이다.

굴욕적인, 더 굴욕적인, 가장 굴욕적인

랜디에게는 아름다움은 없지만 숭고함은 있다. 칸트의 구분에 따르면 비극은 숭고함을, 희극은 아름다움의 감정을 발생시킨다. 숭고함은 상상적 표상을 넘어선다. 숭고함은 두려움이나 우울함, 경솔함, 방종 같은 어두운 감정까지 껴안을 수 있다. 랜디의 삶은 온갖 인간적인 실패의 흔적들로 얼룩져 있다. 가족을 방기한 방만하고 무절제한 젊은 랜디나 향수와 회한에 젖은 나이 든 랜디의 삶은 그늘져 있다. 마약에 취해 낯선 여자 집에서 자느라 딸과의 저녁 약속에 늦고, 샐러드 바에서 고기 써는 기계를 주먹으로 내리치거나, 애정고백을 거절당하자 돈으로 캐시디를 모욕하는 랜디를 보며 아름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긴 어렵다. 그러나 생애 마지막 ‘램 잼’을 위해 심장이 터져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링으로 몸을 날릴 때 그의 모습은 숭고하다.

칸트는 엄청난 굴욕 뒤에 복수를 하는 호메로스의 영웅은 숭고하고, 우스꽝스러움은 숭고함을 추락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라 말한다. 랜디는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스스로 이마를 째고 기꺼이 몸에 철심을 박지만 그에게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다. 그가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샐러드를 덜어내면 더 담으라고 하고 더 담으면 다시 덜어내라고 하는 손님의 비위를 맞출 때지만 이것도 견딜 만하다. 그가 좀더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로빈 명찰을 단 자신을 보고 챔피언 랜디를 기억해내는 사람과 맞닥뜨린 순간이다. 하지만 가장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휑한 팬 사인회장에서 장애인이 된 동료들을 바라볼 때다. 랜디는 이 모든 굴욕에 복수하기 위해 링으로 돌아간다. 영화에는 세번의 ‘램 잼’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1989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현장을 중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로만 들리고, 두 번째는 과거의 순간을 재현해주길 환호하는 관객을 위해 초라한 동네 링에서 램 잼을 전시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비루한 일상의 바다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길어올리는 의식으로의 램 잼이다. 그가 링에서 짓누를 마지막 상대는 ‘중동의 짐승’ 아야톨라가 아니라 그를 모욕하는 이 세상이다. 모두가 엔터테인먼트의 세계로 생각하는 링을 자신의 숭고함을 증명하는 ‘내 세상’으로 바꿔버린 비극적 영웅 랜디 램은 링이 아니라 이 세상이 거대한 엔터테인먼트의 장이라는 걸 보여준다. 질문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운명적 해답을 선택하는 랜디는 근대적 인물이라기보다 고전적 영웅에 가까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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